•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1.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 2)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2) 통의부의 결성과 활동

 통의부는 재만 독립운동계의 지도자들이 합의를 본 결과 탄생한 통합 독립운동체였다. 따라서 통의부 성립을 주도한 인물들은 남만한족통일회에서 결의한 사항을 충실히 이행코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우선 넷째와 여섯째의 결의 사항에 따라 다음과 같은 부서와 간부를 선임하였다.

총장:金東三, 부총장:蔡相悳, 비서과장:高豁信, 민사부장:李雄海, 검무국장:崔明洙, 교섭부장:金永萬, 선전국장:金昌義, 군사부장:梁圭烈, 사령장:金昌煥, 법무부장:玄正卿, 사판소장:李永植, 재무부장:李炳其, 학무부장:申彦甲, 권업부장:崔濟潤, 교통부장:吳東振, 참모부장:李天民

 부서 조직 및 간부의 선임과 함께 통의부는 남만한족통일회에서 결의한 헌장을 제정하였다. 이 최초의 헌장은 아직 그 원자료가 밝혀지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다.522)최초로 제정된 9장 63조의 헌장은 1922년 12월 29일부터 다음 해 1월 8일까지 개최된 제 1회 中央議會에서 7장 53조로, 그리고 다시 1924년 1월 8일 개최된 중앙의회에서 5장 38조로 개정되었다. 하지만 성립 이후 통의부가 펼친 활동을 고찰함으로써 헌장의 내용을 대략 추정할 수 있다.

 통의부의 활동을 크게 나누면 이주한인을 대상으로 한 자치활동과 항일 무장활동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자치와 관련된 활동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의부는 남만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는 이주한인들을 중앙에서 총괄하여 관할할 수 있도록 각 지역에 행정체계를 갖춘 지방조직을 설치하였다. 한인 거주 수에 따라, 1천 호를 기준으로 總管事務所를 설치하고 그 책임자를 總管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총관 밑에는 지방의 실정에 따라 100호 또는 200호로 1區를 조직하고 책임자인 區長을 임명하였다. 이 같은 방식에 의해 1923년 겨울까지 통의부의 총관사무소는 通化縣의 通化·通南, 桓仁縣의 桓西·桓南·桓東, 集安縣의 集安·集西·集南, 寬甸縣의 寬東·寬南·寬北을 비롯하여 興京·柳河·臨江·長白縣 등까지의 지역에 26개소가 설치되었다.523)<大正 12年 12月 24日附 在通化阿部分舘主任發信, 不逞鮮人團大韓統義府에 關한 件>(≪한국독립운동사≫4), 778쪽.

 통의부의 자치활동은 바로 이 지방조직들을 이용하여 행해졌다. 총관과 구장은 자신들의 책임 하에 일정한 행정체계를 갖춘 후 관할지역 내 한인을 대상으로 실업 장려·교육사업과 같은 자치업무를 처리하는 한편, 한인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임무까지 수행하였다. 1922년 6월 20일 각 지방의 총관들은 總管會를 개최하여 실업 장려책을 결의하였다.524)≪독립신문≫, 1922년 7월 22일. 즉 이 회의는 총관의 주도하에 관할 한인들에게 양잠·직조·목축 등을 장려해 농업 이외의 분야에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고, 회의 결과는 이후 한인사회에 충분히 반영 실시되었다. 그런가 하면 1924년 초에는 보다 체계적인 경제 향상을 목적으로 각 한인 촌락에 노동강습소가 개설되었다. 이 노동강습소에는 17세 이상 35세 이하의 한인 청장년들을 입소시켜 합리적인 영농 교육을 습득시켰다.

 이어 통의부는 한인 청소년들이 민족의 주체성을 이어 가고 구국활동을 펼칠 동량으로 육성하기 위해 교육사업을 펼쳤다. 기록에 나타난 대표적인 교육사업을 보면, 1923년 10월 지금까지 서당으로 활용하던 흥경현 旺淸門의 서당을 확장하여 신식교육 기관인 光東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왕청문 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청소년 70여 명을 모집하여 국어·국사는 물론이고 수학·지리 등 새로운 학문을 교육시켰다.525)金正明 編,<大韓統義府の現況報告の件>(≪朝鮮獨立運動≫Ⅱ, 日本 東京:原書房, 1967), 1086쪽.

 한편 이러한 자치활동 외에 통의부는 다음과 같은 의용군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펼쳤다.

사 령 관 金昌煥
부  관 金昌勳
제1대대 대대장 姜南道
제1중대 중대장
白狂雲
제1소대
제2소대
제3소대
소대장 金保國
소대장 田奉道
소대장 金基準
병력 100여 명, 무기 100여 정,
전성기 인원 800∼900명
제2중대 중대장
崔碩淳
제1소대
제2소대
제3소대
소대장 金田
소대장 李奎成
소대장 申泰鳳
병력 130여명, 무기 136정,
전성기 인원 600∼700명
제3중대 중대장
崔時興
    병력·무기 미상, 국내진공전을 주임무로
하였음.
전성기 인원 500명
제4중대 중대장
洪基柱
제1소대
제2소대
제3소대
소대장 張世龍
소대장 金國輔
소대장 申洪永
병력 50명, 무기 37정,
전성기 인원 500명
제5중대 중대장
金明鳳
제1소대
제2소대
제3소대
소대장 金昌天
소대장 金光秋
소대장 金一
병력 120명, 무기 123정,
전성기 인원 500명
유격중대 중대장 金昌龍·金河錫·文學彬 병력 150명
헌병대 헌병분대장 宋憲

<統義府 義勇軍 간부 명단>

 이 같은 편제의 통의부 의용군은 임무수행을 위하여 중대별로 각각의 관할구역과 특수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즉 이들 5개 중대와 산하 각 소대 그리고 유격대 및 헌병대는 통의부 중앙본부가 있는 寬甸縣 下漏河를 비롯하여 통화·관전·임강·집안·환인·海龍·흥경현 지역에 배치되었다. 대원의 계급은 將士·正士·副士·參士의 등급이 있었고, 소대장과 중대장은 중국군 소위·중위·대위의 복제와 비슷한 다갈색 군복을 착용하였으며 군모와 휘장은 대한제국의 태극기 모양으로 가운데 부분은 금과 은을 섞어 만든 것이었다. 간부가 아닌 병사의 경우는 정식 복제는 없었으나 한인 부녀자들이 제조한 중국 민병복과 비슷한 누르스름한 복장에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 또한 국내진입을 대비하여 변장하기 위한 일경의 복장도 다수 준비하였다.526)朴杰淳,<大韓統義府 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243쪽.

 이러한 체제를 갖춘 통의부 의용군은 국내와 만주를 무대로 일제를 상대로 한 항일전을 펼치는 한편, 일제의 주구인 친일 무리들까지 척결해 나갔다. 즉 1922년 12월, 의용군은 북쪽의 長春에서 남쪽의 大連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 내의 친일파들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3개의 隊를 편성하여 각지에 파견하였다. 임무를 완수치 못할 경우에는 죽음에 임하겠다는 서명까지 하고 출발한 파견대는 활발한 활동을 벌여 수많은 친일파들을 척결하였다. 그리고 1924년 6월에는 친일기구인 奉天 保民會長을 역임하고 일본 외무성 촉탁이었던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친일파 崔晶圭를 처단하는 전과까지 올렸다.527)朴杰淳, 위의 글, 244쪽.

 통의부 의용군은 국내진입전을 통해서도 수많은 일제의 기관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대표적인 것을 보면, 1923년 6월 20일 의용군 1대는 신의주 고녕삭면의 영산주재소를 습격하였고, 또 다른 유격대는 동년 8월에 청성진주재소 및 세관출장소·우편국 등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528)≪동아일보≫, 1923년 6월 23일·10월 2일. 이 같은 통의부 의용군의 전투사례는 정확한 통계가 어려운데 한 자료에 의하면, 1924년 4월 24일부터 6월 29일까지 약 2개월간 국내진입전만 29회가 전개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529)≪獨立新聞≫, 1924년 7월 26일,<我獨立軍의 活動>. 또한 일제측의 한 보고자료에 의하면 “현재(1924년 6월 이전) 평안북도 방면에서 시국에 관한 사고가 빈발하는 것은 본 단체(통의부)와 직접 간접으로 관계있는 불령자의 침입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고 있어, 의용군의 국내진입전이 빈번히 전개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530)朝鮮軍司令部編,<不逞鮮人ニ關スル基礎的硏究>(1924), 31쪽.

 통의부 의용군이 이같이 활발한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독립군단이 통합됨으로써 대병력을 보유한 까닭도 있었지만, 통합 이전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단의 병사들이 지리에 밝아 만주는 물론이고 국내진입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통의부가 이주한인을 대상으로 자치활동을 펼침으로써 한인들이 통의부를 지원하여 무력투쟁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의부는 성립된지 얼마 되지않아 구성원들간에 갈등이 노출되어 분열 위기에 직면하였다. 통의부 구성원들은 성립 당시 통합만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나머지 이념과 노선에는 소홀한 면이 있었다. 그 결과 성립 초기부터 간부들간에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측과 복벽주의를 주장하는 측으로 나뉘어 이념적인 갈등과 軍權을 둘러싼 인선 및 조직상의 이견 등이 생겨났다.

 이 갈등은 통의부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던 전덕원과 梁起鐸의 불화로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전덕원은 1906년 金斗燮과 평북 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531)朴敏泳,≪舊韓末 西北邊境地域의 義兵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6), 5쪽. 국권피탈 이후에는 渡滿한 뒤 大韓獨立團의 간부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반면 양기탁은 국권피탈 이전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였고, 1920년 말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는 통의부 결성을 위해 남만지역 독립군단의 통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精神品行講演團을 조직하여 통의부 관할하의 한인을 대상으로 계몽활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532)한상도,<통의부>(≪한민족독립운동사≫4, 국사편찬위원회, 1988), 175쪽. 전덕원은 그의 전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절대 복벽주의자였으며 양기탁은 공화주의자였다. 이같이 두 사람 사이에는 독립운동의 방략이나 이념상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 두 지도자간에는 통의부 성립초부터 반목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었다. 여기에 전덕원이 통의부로의 통합을 후회하며 공화계 지도자 모두를 거부하게 된 불만의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통의부 성립 초기 전덕원이 맡은 직책이 문제였다. 전덕원은 그 자신이 재만 독립군의 지도급 인사로 자처하고 대한독립단의 많은 병사들이 그를 따라 통합에 가담한 것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통의부의 여러 요직은 공화계 인사들이 담당하고 그에게는 큰 권한이 없는 檢務局長이라는 직책이 주어졌다.533)≪雙公 鄭伊衡 回顧錄≫(國家報勳處, 1996), 70∼71쪽.

 이러한 갈등과 불만의 요인들은 급기야 무력적 충돌을 불러오게 하였다. 1922년 10월 14일 관전현에 있던 양기탁 일행을 전덕원계의 독립군 병사들이 습격하여 선전국장인 金昌義를 사살하고 양기탁·玄正卿·고활신 등 주요 간부를 포박하고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534)≪獨立新聞≫, 1922년 11월 8일,<慘憺한 西間島事變>.
≪雙公 鄭伊衡回顧錄≫, 70∼75쪽.
이 사건 이후 통의부 내 복벽주의계열과 공화주의계열 사이는 완전히 적대관계가 되었다. 그리하여 1923년 1월에는 紅廟子 방면에서 양측간에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 일련의 불상사를 겪고 나자 양측은 더 이상 한 조직 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전덕원을 비롯한 복벽주의계 인사들은 1923년 2월 통의부에서 분립하여 새로이 大韓義軍府를 설립하였다. 義軍府는 柳麟錫이 주장하는 충의를 계승할 것을 천명하고 ‘隆熙年號’를 사용하는 등 의병의 복벽적인 의식이 확고하였다.535)朴杰淳, 앞의 글, 231쪽. 의군부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총재:朴長浩, 부총재:蔡相悳, 사한장:朴弘濟, 정무부장:金有聲, 군무부장:全德元, 교통국장:韓鼎潤, 재무부장:李炳奎, 경무국장:桂聘, 종교부장:成寶運, 경리부장:趙大能, 참모부장:朴日楚

 의군부는 성립 후 통의부와 잦은 마찰과 대립을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 대립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백방으로 노력하는 통의부측의 인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갈등을 겪고난 뒤 분열된 양 軍團간에는 더욱 심한 대립과 투쟁이 발생하여 양측만의 노력으로 다시 통합한다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 蔡燦(일명:白狂雲)을 비롯한 金元常·朴應伯 등은 양대 세력을 하나로 다시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구심점이 있어야 함을 깨닫고 1923년 말 상해의 大韓民國臨時政府로 찾아갔다. 이들은 임정의 관계자들에게 그간의 전말을 설명하고 임정이 그 구심점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536)≪獨立新聞≫, 1923년 12월 26일,<蔡·金 兩氏의 談>.
金承學,≪韓國獨立史≫(獨立同志會, 1956), 398∼399쪽.
愛國同志援護會,≪韓國獨立運動史≫, 265쪽.
그리하여 임정의 인사들과 협의한 끝에 1924년 4월 南滿軍人代表 78명이 서명하여 다음과 같은<선언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一.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直轄임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一. 우리는 대동통일의 선봉이 된 것을 내외에 알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치 하에 통일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힘쓴다.

一. 우리는 대한민국 육군으로 내외 무장 各團의 가입을 권유하여 가입시킨다(<大正 13年 5月 21日, 通譯官木藤克己 警務局長丸山鶴吉殿, 南滿統義府軍隊ノ上海假政府管下ニ歸スル宣言文及警告文送付ノ件>).

 그러나 이 선언서의 내용은 독립군단들이 통의부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임정의 밑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이러한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상해에 간 채찬 일행은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측들이었다. 하지만 남만의 통합군단인 통의부는 이전의 군단들보다 규모는 방대했지만 자치와 무장투쟁이라는 두 가지 사업을 실시하면서 오히려 자치활동에 더 치중하는 면을 보였다. 때문에 이들은 그와 같은 통의부의 노선에 얼마간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임정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이 기회에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자들을 통의부에서 분리하여 그들만으로 임정직속의 군대를 만들 것을 결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선언서에 서명한 78인은 통의부 의용군 제1·2·3중대와 유격대 및 獨立小隊의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한 달 후인 5월에 또 다시 임정의 기치 하에 통일되어야 할 당위성을 밝힌<선언서>를 발표하고 통의부에서 분리하여 대한민국림시정부 陸軍駐滿參議部를 조직하였다.537)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1976), 323∼324쪽. 기존의 연구에서는 참의부 성립 일을 1923년 8월로 보는 견해도 있다(유준기,<참의부>,≪한민족독립운동사≫4, 국사편찬위원회, 1988, 210∼212쪽). 이어 6월에는 金鳴鳳이 이끄는 통의부 의용군 제5중대도<선언서>를 발표하고 통의부를 이탈하여 참의부에 가입하였다.538)≪獨立新聞≫, 1924년 7월 26일,<南滿洲義勇軍第5中隊에서 ‘宣言書’를 발포>.

 의군부에 이어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세력이 또 다시 참의부를 조직하여 이탈하자 통의부의 세력은 현격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통의부는 이들 두 세력의 이탈로 성립 초기보다는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남만지역에서는 가장 큰 세력을 보유한 독립군단이었다. 따라서 이후 통의부의 지도부는 이러한 혼란을 빠른 시일 내에 수습하고, 주변의 다른 민족운동 세력들을 다시 규합하여 통일된 세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蔡永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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