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가 있기 전에 김구는 국내 민심을 격동시킬 목적으로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암살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단원 李德柱와 兪鎭植에게 폭탄과 권총을 주어 3월에서 4월 사이에 밀파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연고지인 황해도에 들렀다가 곧 피체되어 한인애국단의 국내거사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738)國會圖書館 編,≪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32∼733쪽.
그 뒤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건립에 대한 중국정부의 제소로 국제연맹 조사단이 1932년 5월 하순에 만주 현지를 조사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김구는 이에 때맞춰 투탄·저격거사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조사단을 출영·환송하러 나올 관동군사령관(本庄繁), 관동청 장관(山岡萬之助), 남만주철도 총재(內田康哉) 등, 만주의 일제 요인들을 암살함이 거사의 일차 목표였다.739)嚴恒燮,≪屠倭實記≫(國際文化協會, 1946), 66쪽. 아울러 일제의 중국침략 죄상과 대륙공략 흉계를 폭로하고 한·중 두 민족의 강렬한 반일·항일 의사를 국제적으로 널리 인식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김구는 단원 柳相根과 崔興植에게(이들은 上海韓人靑年黨 당원이기도 했다) 대형 수통폭탄과 권총을 지급하고, 조사단이 4일 동안 머물기로 예정되어 있는 대련으로 밀파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최흥식이 김구에게 보낸 자금지원 요청 전보가 일제 관헌의 수사 단서가 되어, 거사 예정일 이틀 전인 5월 24일에 두 단원이 피체됨으로써 거사 기도는 좌절되었다.740)嚴恒燮, 위의 책, 63∼64쪽.
國會圖書館 編,≪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32∼735쪽.
일제는 이 의열거사 계획을 조사단 암살 목적의 가공할 테러계획인 것처럼 날조하여 역선전하려 했다. 이에 한인애국단은 동년 8월 10일에 선언문을 발표하여 내외에 해명하고, ‘폭렬행동’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우리가 허다한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끝끝내 폭렬한 행동으로 대항하는 것은 우리 손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고 사선을 쫓겨난 우리 한국사람인지라 이 길을 버리고는 또 다른 길이 없는 까닭이라. 그러므로 한국의 독립이 성공하는 날까지는 이런 폭렬한 행동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嚴恒燮,≪屠倭實記≫, 國際文化協會, 1946, 66쪽).
이렇듯 한인애국단이 실행했거나 계획했던 폭탄거사들은 반침략 민족독립 쟁취의 대의에 따른 항일특공작전의 성격을 띤 것이었지, 흉포한 테러리즘으로 매도될 성질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에 따른 일제의 보복적 대탄압으로 상해는 더 이상 안전한 독립운동기지가 되지 못하여 임시정부는 杭州로 이전했다. 이런 이유들로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더 지속되지를 못하였고, 김구는 1934년에 韓國特務隊獨立軍을 결성하여 새 인력으로 군사적 의열투쟁을 도모한 것으로 보이나 그 성과는 기록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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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