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1. 19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의 동향
  • 1) 1920년대 전반의 ‘문화운동’
  • (2) 청년회 운동

(2) 청년회 운동

 앞서 본 것처럼 1920년의 초기 문화운동은 ‘신문화건설’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신문화건설의 방법론으로서 제시된 것은 신교육보급·수양·풍속개량·농촌개량의 네 가지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1921년 경부터 본격 대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이후 ‘문화운동’의 주요 슬로건이 되었다. 여기서 수양이 강조된 것은 사회의 개조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개인의 개조, 즉 수양이 필요하다는 논리 위에서였다. 풍속개량은 구관습개혁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여기서 구관습은 관혼상제, 반상의 관습과 의식, 조혼, 의복, 지방관념, 무조건적인 노인숭배관념, 가족주의, 노동천시풍조 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농촌개량은 농촌에서의 교육·산업·도덕·관습 등 모든 분야에 걸친 개량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문화운동의 주된 실행기관으로 설정된 것은 청년회였다. 청년회는 3·1운동 이전에도 비록 소수이지만 존재했었다. 그러나 1919년 말부터 1921년 사이 전국 각지에서 청년회 설립 붐이 일어나 청년회는 엄청난 수로 증가하였다.<표 1>은 전체 사회단체 가운데 청년회가 차지한 비중과 그 급격한 증가추세를 잘 보여준다.

연도 정치
사회
노동 소작
인회
청년회 종교
청년회
금주 수양 사교 부인회 산업 교육
1920
1921
1922
11
18
19
33
90
81
0
3
23
251
446
488
98
226
271
46
71
75
25
126
84
1
201
146
12
15
29
83
189
195
19
64
114

<표 1>1920년대 초 각종 사회단체 현황

*<조선인단체조사비교표>(≪조선치안상황≫, 1922년), 179∼180쪽.

 <표 1>에서 보는 청년회 외에도 수양·사교·금주 등의 단체도 사실은 청년회와 성격을 거의 같이하는 단체였다. 당시 청년회는 ‘청년구락부’·‘청년수양회’ 등의 각종 명칭으로 조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종교단체 안에도 엡웟청년회 등 청년회에 포함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종교계의 청년회를 제외하더라도 이 시기 설립된 청년회는 약 500∼600개에 달하였다.

 각 도별 청년회의 분포는<표 2>와 같다. 여기서 보면 황해도와 전남·경남북의 청년회 수가 다른 도에 비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연 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북 평남 강원 함북 함남
1920
1921
1922
2
22
14
10
10
12
13
17
22
24
30
13
28
44
84
20
49
54
29
58
66
44
78
91
21
14
13
28
33
39
15
15
24
11
57
28
6
19
28
251
446
488

<표 2>각 도별 청년회 분포상황

*≪조선치안상황≫(1922), 179쪽.

 이 시기 조직된 청년회는 대체로 이른바 ‘유지청년’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일부 청년회는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이 주도한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 청년회 가운데 일부는 겉으로는 ‘수양’을 내걸고 속으로는 대중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평안남도 지사는 1921년 4월 도지사회의에서 “작년 3·4월 경부터 종교에 관계된 청년회 및 보통청년회가 앞을 다투어 각지에서 설립되어 작년 말 즈음에는 본도 내에 124개 단체, 회원 1만 3,088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 가운데 온건한 단체는 겨우 27개에 지나지 않고 대개 겉으로는 청년의 품성향상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면은 모두 불온한 것이다. 그 단체의 牛耳를 잡고 있는 자 가운데 다수는 위험인물 혹은 전과자들로서 자주 강연회 등을 열어 기교한 언사를 농하여 인심을 미혹하게 하였다. 그런데 근래는 민심이 안정됨에 따라서 불온분자의 청년회는 점차 해산하고 지금은 선량한 것이 남아있는 실정이다”고 말하였다.011) 朝鮮總督府,≪道知事會議速記錄≫(1921. 4), 44쪽. 또 일부 청년회는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려 하다가 적발된 경우도 있었다. 평안북도 회천군 신풍면의 청년회가 그러한 예였다.012)≪동아일보≫, 1921년 5월 26일,<독립을 목적한 청년회원>.

 당시의 청년회들이 내면적으로는 민족의식 고취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외면적으로는 대부분 ‘문화운동’의 취지에 따라 수양·농촌개량·풍속개량 등을 주요 사업으로 설정하였다. 즉 ① 수양을 위한 지·덕·체의 함양, ② 풍기의 개선, 즉 교풍, ③ 실업의 장려, ④ 공공사업의 지원 등을 설립목적으로 내걸고 있었다. 특히 ‘유지청년’들이 주도하던 청년회는 ‘민족의식’ 고취보다는 ‘문화운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당시 청년회를 적극 후원, 지도하고 있던≪동아일보≫도 청년회의 목적이 신사회의 건설(사회의 혁신), 지식을 천하에 구함, 일치단결, 德·義의 존중, 신체건강, 산업의 진흥, 세계문화에의 공헌 등에 두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013)≪동아일보≫, 1920년 7월 9일, 논설<청년회연합에 대하야 각지 同會에 更告하노라>.

 이같은 취지에 따라 당시 청년회는 주요 사업으로서 지·덕·체의 함양을 위한 신문·잡지의 구독 열람, 강연회·토론회·야학의 개최, 運動會·遠足會 등의 개최, 민풍개선 사업, 농촌개량사업 등을 설정하였다. 이러한 사업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사업은 강연회·토론회·야학·운동회 등이었다. 강연회와 토론회는 ‘문화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대중들의 의식을 깨우치려는 가장 중요한 장으로서 활용되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장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청년회가 우후죽순처럼 설립되기 시작하자≪동아일보≫는 곧 각지 청년회의 연합을 제창하고 나섰고, 1920년 6월 28일 서울에서 각계 인사 53인이 모인 가운데 ‘전조선청년회연합회’가 발기되었다. 청년회연합회는 그 주의로서 “吾人은 세계개조의 기운에 순응하여 各人의 天賦한 생명을 창달하며 민족의 고유한 生榮을 발휘”할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리고 7가지 강령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사회를 혁신함, 지식을 널리 구함, 건전한 사상으로 단결함, 德義를 존중함, 건강을 증진함, 산업을 진흥함, 세계문화에 공헌함 등이었다.014)≪동아일보≫, 1920년 7월 16일. 청년회연합회는 뒷날 이에 대해 설명하면서 위의 ‘사회를 혁신함’이란 구습·폐습의 개혁을 의미하며, ‘건전한 사상으로 단결함’이란 인격수양·지식교환·문화발전주의를 중심으로 단결하며, 정치적 의미는 추호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015) 吳祥根,<聯合會와 主義 綱領>(≪我聲≫1, 1921. 3), 16∼21쪽.

 1920년 12월 2일 조선청년회연합회는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창립 당시 이 회에는 모두 224개 청년회가 회원단체로 참여하였다. 창립대회 직후의 간담회에서 安廓·張德秀·李秉祚 등이 “우리 청년회는 오직 수양을 목적하는 것이 제일주의이니 신중하야 他에 간여치 않는 범위 내에서 인격을 自成하기를 노력”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연합회의 수양단체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016)<聯合會 彙報>, 위의 책, 98쪽.

 그러나 청년회운동은 1921년 초에 들어서면서 주춤하기 시작하여 점차 그 활동이 침체상태로 들어갔다. 각 단체는 통상회가 열리는 날 출석자가 전 회원의 3분의 1도 되지 않아 개회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늘어갔고, 회비 수납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같은 활동 부진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도층에 있었다. 당시 청년회를 이끈 주도층은 이른바 ‘유지청년’들로서 그들은 청년운동에 대한 확고한 전망이나 의지도 없이 분위기에 휩쓸린 지식청년들이거나, 아니면 청년회장 등 명예를 탐낸 지방유지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假志士 假紳士’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청년회가 다시 활성화된 것은 1923년 봄 각지의 청년회에서 혁신운동이 일어나고, 그들이 그해 3월 말 서울청년회의 주도하에 열린 조선청년당대회의 깃발 아래 모이면서부터였다. 조선청년당대회에 참여한 청년회는 모두 94개 단체였는데, 이들은 이 대회 이후 점차 청년회의 운동방향을 사회주의운동쪽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4월 초에 열린 조선청년회연합회의 4회 총회에 참여한 청년회가 겨우 35개 단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청년회운동의 추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청년회운동의 방향전환은 이 시기 전개되고 있던 민립대학기성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의 지방조직이 무너진 것을 의미하였다. 청년회운동은 이제 실력양성·수양·구습개량 등의 ‘문화운동’에서 벗어나 사상운동, 노동·농민운동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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