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도는 1928년 12월 조선공산당이 해체된 후 노동자·빈농에 기초한 새로운 당재건운동이 시작되는 원년이고, 광주학생운동이 전개되고, 신간회 내부에는 일제와 결탁한 민족개량주의 세력이 침투하고, 세계경제공황으로 노동자 등 민중들의 생존권이 한층 더 위협받게 되는 시기였다. 1929년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 건수는 102건, 파업참가자 수는 8,293명이었다. 1929년의 파업 참가자들의 지역별 분포상태를 보면, 함경도·경상도·평안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전라도·강원도 순으로 비중이 컸다. 파업 참가자들의 직업별 분포상태를 보면, 토목건축·잡공장·인부·방적제사 등의 순으로 비중이 컸다.476) 윤여덕, 앞의 책, 135∼136쪽.
1920년대 노동자운동을 통해서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은 1929년에 일어난 원산총파업이었다. 원산총파업은 1920년대 수많은 노동자운동들을 결산하는 위치에 있었던 동시에 1930년대 이후의 노동자운동에 새로운 과제를 부여해 주었던 투쟁이었다.
1880년 개항한 원산에는 일찍부터 노동운동이 발달해서 1925년 10월부터 지역별 노동연맹체로서 원산노동연합회가 성립되어 있었다. 원산노련에는 총파업이 일어날 무렵 약 2,000명의 조합원을 가진 54개의 가맹단체가 있었다. 1928년 초 영국인이 경영하던 문평의 석유회사에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200여 명의 노동자들은 9월 중순 ‘문평석유노동조합’의 지도 하에 일본인 감독의 遷職, 최저임금제의 확립, 단체계약권의 체결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을 일으켰다. 회사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들 중에 일부는 승인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3개월 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기일이 지나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28년 12월 말 원산노련은 그 산하단체인 문평석유노동조합의 제의에 의하여 아직 해결되지 않은 요구조건의 이행을 회사측에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인 지배인은 “본 회사에서는 노동단체를 일체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원산노련과 토의할 수 없다”면서 거절하여 자본가들이 이전부터 인정하여 오던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까지 유린하려고 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을 파괴하려는 자본가들의 책략이었다. 그러자 문평석유회사 노동자들은 ‘단체계약권의 획득, 8시간 노동제의 실시, 파업기간 중 임금의 지불, 지배인의 축출’ 등을 회사측에 다시 요구하고 이를 관철할 때까지 파업하기로 결의했다.
원산노련은 1월 13일 비상집행위원회를 열어 문평석유회사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할 것을 결정하고 산하 노동단체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지시를 내렸다. ① 문평석유 및 운수노조는 1929년 1월 14일에 파업을 단행할 것, ② 원산노동자들은 문평파업에 궐기한 제유 및 운수노동조합에 적극 동정할 것, ③ 원산노동연합회 성원은 문평노동자들의 파업과 함께 라이징 썬 석유회사에 관계되는 일체 상품의 수송을 거절하고 동정파업을 단행할 것, ④ 파업기금의 축적을 위하여 매개 조합원은 금주하고 매일 5전씩을 지출할 것.
그 산하단체들은 이러한 원산노련의 지시를 수행했다. 그러자 국제통운회사와 국제운수회사는 1월 18일 450여 명의 노동자 전원을 해고했다. 회사측은 중국인 노동자들로 대체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인 노동자들은 “조선노동자들의 불행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할 수 없다”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을 발휘하여 취업을 거절하고 조선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했다. 1월 21일에는 원산운송노동조합에 소속된 45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당한 노동자들을 위한 동정파업을 단행했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원산지역 자본가 단체인 ‘원산상공회의소’는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들 전부를 앞으로 고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등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를 폈다.477) 윤여덕, 위의 책, 150쪽.
원산노련은 1월 22일 비상집행위원회를 열어 자본가들의 횡포에 대항하여 총파업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하고 산하 노동단체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준수할 것을 호소했다. ① 우리는 결속력으로 대항할 것이요, 결코 완력으로써 맹동하지 말 것, ② 방금 우리는 금주기에 在함을 불구하고 쟁의를 핑계하고 음주하지 말 것, ③ 우리는 항상 규율을 정연하게 하야 진용을 문란하게 하지 말 것, ④ 식료 및 기타 생활비를 가급적 절약하여 지구전에 당케 할 것, ⑤ 일시 맹동으로 인하여 무의미한 희생을 당치 않도록 할 것.
1월 23일 아침부터 원산노련에 망라된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 투쟁에 궐기했다. 이는 그들의 가족까지 합하면 당시 원산시 총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제 파업은 원산지역에서 원산노련으로 대표되는 총노동과 원산상공회의소로 대표되는 총자본 간의 대립·투쟁으로 격화되었다.
자본가측은 원산총파업을 깨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왔다. 일본인 자본가들과 예속자본가들의 대변기관인 ‘원산상업회의소’는 원산노련과 그 가맹단체들을 파괴하는 데 주력하는 동시에 부랑자들과 건달꾼들을 규합하여 친일자본가와 일제관료출신들을 우두머리로 한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동단체를 조작하여 파업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고 했다. 원산상업회의소는 함남노동회에 가입하는 노동자들에게 ‘식량의 염가공급’, ‘병상자들에 대한 실비치료’ 등의 특전을 주겠다는 등 노동단체 파괴책동을 벌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원산상업회의소는 파시스트단체인 ‘國粹會’와 재향군인회·소방대·일본인청년당 등을 동원하여 威力團이란 폭력단을 만들어 일제경찰과 협조하여 노동자들에게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그들의 주구단체인 일제통치기관의 구관리들·친일자본가들·민족개량주의자들로 구성된 ‘원산시민협회’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파괴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책동했다. ‘원산시민협회’는 다음과 같은 파렴치한 타협조건을 내놓았다. ① 원산노련은 노자협조주의를 실행할 것, ② 원산노련의 최고간부를 개선할 것, ③ 노임문제에 대하여는 간담으로 해결하되 해결되지 못할 시에는 원산상업회의소, 또는 시민협회의 중재에 의할 것, ④ 원산노련의 규약 중 비합법적인 문구가 있을 시에는 이를 개정할 것 등이다. 자본가들은 파업파괴를 위해 기업활동을 중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기업주들이 오히려 더 큰 타격을 받았다. 파업기간에 파산을 당한 기업주들도 생겼다. 일제는 원산총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원산경찰을 비롯해 함경남도 각지 경찰들의 주력을 동원했다. 일본 19사단 함흥 74연대는 출동준비를 완료하고 대기상태에 있었다. 파업투쟁이 확대되자 ‘조선총독’을 비롯한 경무국·내무국 관리들과 함경남도 ‘지사’까지 동원되어 총파업을 진압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일제경찰은 2월 10일 원산노련회관과 그 소비조합을 습격 수색하고, 노련의 붉은 旗와 마르크스·레닌의 초상화까지 압수하고 파업기금을 강탈했다. 전 조선 각지와 국외로부터 오는 파업원조금을 금지시켜 파업노동자들을 고립시키려고 했다. 함경남도 경찰부는 원산경찰서에 많은 무기와 탄약을 밀송하고 무장경관과 기마헌병을 증파했다. 원산시와 그 외곽에 정사복 경관들이 동원되어 비상경계망을 폈다. 당시 신문들은 원산시에는 ‘전시상태’가 조성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간고한 환경 속에서 파업 노동자들은 ① 동일 지역 및 동일 부문 노동자들의 연대투쟁, ② 규찰대의 조직, ③ 지구전을 위한 물질적 준비 등의 투쟁전술을 구사하여 자본가들의 각종의 탄압에 투쟁으로 대응했다. 한편 일제의 폭압을 반대하며 원산총파업을 지지하기 위한 전국의 각 지역 노동자들·농민대중·청년학생들·중국과 일본 등 해외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지지·성원, 그리고 일본·소련·중국·불란서의 노동자들도 국제적 연대성을 표시해 왔다.478) 김인걸·강현욱, 앞의 책, 94∼105쪽.
이렇게 원산총파업에 대한 전국적·국제적 연대가 형성되어 가자 일제는 원산노련의 김경식 위원장 등 지도자들을 다수 검거했다. 그리하여 신임위원장 김태영 등의 개량주의적 기회주의자들이 노련의 지도부를 장악하도록 했다. 이들은 일제의 주구단체인 ‘원산시민협회’와 일제관리들을 찾아다니면서 기업주들과 타협을 통해, 후에는 함경남도 ‘지사’와 경찰부장, 일제의 ‘총독부’에 청원의 방법을 통해 노동자들 파업을 해결하려고 책동했다.479) 윤여덕, 앞의 책, 151∼152쪽. 이들은 함경남도 ‘지사’의 요구를 접수하고 당시 노동자 대중의 혁명적인 지향을 반영하여 선진적이었던 노련의<강령>480) 이철악,<원산총파업의 경험>(배성찬 편,≪식민지시대 사회운동론 연구≫, 돌베게, 1987), 352쪽.(① 노동운동의 통일과 무산자의 세계적 제휴를 도모하고 무산계급의 해방을 기한다, ② 교양에 노력하여 노동자의 지식을 계발하고 당면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며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노동자의 생활을 향상시킨다)을 개량주의적이고 노사협조주의적인 것481) 김경일,<1929년 원산총파업에 대하여>(≪창작과 비평≫, 1989년 봄호), 313쪽.(생활향상을 위한 노동자의 수양을 본위로 함)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파업노동자들은 이러한 지도부의 배신적 행동과 일제 경찰의 야만적 폭압하에서 파업기금의 결핍과 생활의 고통 속에서 결사적인 항쟁을 계속했다. 1929년 4월 1일 파업노동자들은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오후 6시 일제가 조작한 반동적 어용단체인 ‘함남노동회’를 습격했다. 파업노동자들은 ‘함남노동회’ 부근 일대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돌멩이와 곤봉들을 휴대하고 이 반동단체의 두목들과 주구들을 습격하여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4월 3일에 파업노동자들은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와 경계를 박차고 ‘함남노동회’의 산하 조직들을 습격하여 일제 주구들을 응징했다. 그러자 일제 경찰은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탄압을 가했다.
이에 원산노련의 개량주의적 지도부는 4월 6일 노동자들의 自由復業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2,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하여 80여 일이나 지속되었던 원산총파업은 패배로 끝났다. 파업투쟁의 전개과정에서 첫째 장기간에 걸친 투쟁으로 말미암은 파업기금의 결핍과 생활조건의 악화, 둘째 일제의 혹심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파업단의 핵심적 노동자들과 지도자들의 상실, 셋째 원산노련의 지도부에 잠입한 개량주의적 기회주의자들의 배신적 행위로 투쟁조직의 파괴 등의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상태하에서 개량주의적 기회주의자들은 파업노동자들의 눈을 피하여 비밀리에 집행위원회를 열고 자본가들의 요구조건을 접수한 다음 총파업의 종결을 선언해 버렸다.482) 김인걸·강현욱, 앞의 책, 107∼108쪽.
그러나 원산의 노동자들은 총파업 후에 파업 실패의 조직 내부적 원인이 되었던 개량주의적 기회주의자들을 노련의 지도부에서 쫓아내는 투쟁을 전개했다. 즉 1929년 10월 인쇄직공조합에서 소집한 원산노련대회나 1930년 1월 노련 청년부 주최로 열린 원산총파업 1주년 기념일에서 ‘일체 타락 간부의 배제’, ‘조합 데모크라시 획득’, ‘봉건적 청부 노동계약을 즉시 철폐하자’483) 김경일, 앞의 글(1989), 331쪽.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노동자들은 원산총파업을 통해 요구조건을 획득하지 못했으나, 이 투쟁을 통해 그들 자신이 자본가들을 위해 영원히 노동만 하는 온순하고 말없는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과시했으며,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근로대중의 계급적 민족적 의식을 고양함에 큰 역할을 했다. 원산총파업은 그의 규모와 조직성, 지구적인 강고성, 노동자들간의 연대성, 농민들과의 연계, 투쟁의 적극적 형태로의 이행 등 조선 노동자 운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원산총파업은 일제와 그 자본가들에게 상당한 물질적 손실을 안겨 주었다. 총파업 기간 동안 원산항의 수출총액은 1928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보면 32만 5,500여 원이나 감소되었고 자본가들의 파산이 속출되었다.
원산총파업을 계기로 1929년 4월 대전 군시제사공장 노동자들, 7월 부산의 5개 고무공장 노동자들, 평남 순천의 토목공장 노동자들, 9월 경기도 안성 등지의 토목공장 노동자 대중 등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은 대중적인 동맹파업과 전투적인 시위·공장 습격 투쟁들을 계속 일으켰다.484) 김인걸·강현욱, 앞의 책, 108∼109쪽.
1920년대 말 원산총파업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남긴 새로운 과제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해서 쟁취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첫째 노동자 운동을 내부에서 파괴하기 위하여 잠입하여 활동하고 있는 개량주의자들에 반대하여 투쟁해야 했다는 점, 둘째 파업투쟁의 전국적 확대를 위한 조직적 지도부를 건설해야 했다는 점, 셋째 자본가계급과 싸워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편에 선 정치권력을 확보해야 했다는 점, 넷째 노동자계급이 이상의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反노동자계급적 일본제국주의 권력과 자본에 대항해서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크고 작은 투쟁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했다는 점 등이었다.
<安泰貞>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