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청의 방침에 따라 1927년 초반부터 진행되던 단일한 군·부청년동맹의 건설은 8월 청총의 ‘신운동방침’이 확정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청년운동의 방향전환에 발맞춰 지방 청년단체들은 기존의 강령과 조직내용을 변경하였다. 청년동맹은 청총의 강령에 기초해서 “청년대중의 정치적·경제적·민족적 이익의 획득”과 “청년대중의 의식적인 교양과 훈련 철저”, “청년대중의 공고한 단결” 등을 자신의 강령으로 하였다. 즉 청년동맹은 청년운동의 정치투쟁 진출과 함께 청년단체 본연의 임무인 ‘교양과 훈련’에 집중하였다.
단일한 군·부청년동맹-지부-반의 결성과정은 과거 분열되었던 청년운동을 지방차원에서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동시에 민족주의 청년은 물론 종교 청년까지 청년동맹에 포괄할 수 있는 민족적이고 대중적인 청년운동, 즉 청년운동이 민족통일전선의 주요 기반의 하나로 자리하는 훈련과정이기도 하였다.708) 이애숙, 앞의 글(1995b), 261쪽. 또한 이는 청년운동을 ‘대중운동의 선구됨’에서 ‘전체운동 가운데 하나의 支隊’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었다. 군·부청년동맹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청년운동과 다른 부문운동의 계선을 명확히 해주었다. 일부의 직업별 청년단체와 농촌 청년단체들은 노동조합 또는 농민단체로 전환되었다.709) 1927년 9월 대구재봉직공청년회는 대구재봉직공조합으로 변경되었다(≪동아일보≫, 1927년 9월 28일).
청총 가맹단체들은 ‘조선청년총동맹 ○○도연맹 ○○군·부동맹’의 형태를 취하여 (민주주의) 중앙집권화된 모습을 보였다. 군·부청년동맹의 부서로는 서무재정부·조직연락부·정치문화부(문화선전부)·조사연구부·교양부·체육부·소년부·여자부 등이 설치되었다. 조직연락부는 청년동맹의 중앙집권제 강화 및 대중단체와 연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정치문화부(문화선전부)는 청년운동이 정치투쟁에 진출하는 것에 대한 조직적인 반영이었다. 성별을 구별하지 않기로 한 청년운동의 조직방침에 따라 여성부가 설치되었으며, 지방의 여자청년단체는 해체되어 청년동맹의 청년부와 근우회로 편입되었다.
청년단체의 구성이 계급적으로 혼합된 상태에서 청년에 대한 교양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청년단체에서는 사회주의 서적을 구비하여 회원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독서회 등을 조직하여 그에 대한 연구발표와 토론 및 강좌를 개최하였다.710) 대구청년동맹은 한 달에 두 차례씩≪통속 사회주의≫·≪경제학≫에 대한 독서회를 가졌다(≪중외일보≫, 1928년 6월 7일). 함북청년연맹은 청년의 교양을 위해 청년동맹에게≪무산자신문≫·≪대중신문≫·≪마르크스주의≫등을 구독하도록 지시했다.711)≪중외일보≫, 1928년 2월 3일. 뿐만 아니라 회원에 대한 ‘의무교양제’를 실시하는가 하면 전위분자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강좌를 설치했다. 이 시기 청년운동의 방향전환은 곧 ‘마르크스주의적 중앙집권조직 아래 전민족 청년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었다.712)≪동아일보≫, 1927년 8월 12일.
청년단체들은 1926년 후반부터 청년대중의 교양을 위해 기관지·회보는 물론 벽신문·산신문을 발행했다. 벽신문은 정치·경제·사회 등 다양한 문제들을 회원 및 일반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고성청년회의≪先驅≫, 하동청년회의≪뭇소리≫, 청주청년회의≪湖聲≫, 공주청년회의≪慧星≫, 개포프로청년동맹의≪新靑年≫, 진주청년회의≪뭇소리≫, 노량진청년회의≪鷺聲≫, 경주청년회의≪活路≫, 통영청년동맹의≪炬火≫등은 대표적인 벽신문들이다.
이 시기 청년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이다. 특히 경북청년연맹과 대구청년동맹은 자체 내에 학생부를 설치하여 학생들에게 사회주의를 전파하고 학생들을 전위활동가로 양성하고자 했다.713)≪중외일보≫, 1928년 8월 11일.
김일수, 앞의 글, 307∼308쪽. 학생운동 지도는 당시 고려공청에서 학생부를 설치하고 각 학교 안팎에 독서회를 조직하여 학생맹휴를 조직적으로 이끌어 갔던 것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고려공청은 학생부를 설치하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해 1927∼1928년의 서울지역 학생맹휴를 지도하였며, 전남 광주에서도 醒進會를 통해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군·부청년동맹의 활동은 이전과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청년동맹은 주로 순회강연 및 순회문고 설치, 군내 민중생활 정황 조사, 투쟁 통계표 작성, 신간신문 발행 촉진, 삼총(청총·노총·농총)해금, 무산아동 교육, 지부 및 반 조직문제, 다른 지역의 사회단체와 연대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직접적인 대중활동은 지부와 반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경남 하동군청년동맹은 신간회 및 노동자 농민단체와 연합하여 一面一校制 시행을 번복한 경남도지사의 방침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경남도지사탄핵연설회를 열고 일반 민중에게 ‘조선인교육 무시정책’의 진상을 폭로하기로 했다. 나아가 경남 각 지역의 사회단체와 연합하여 경남도민대회를 열고 경남 도당국에 적극적으로 항쟁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서울의 조선교육협회에 알리고 전국적으로 여론을 불러일으킬 것을 결의했다.714)≪중외일보≫, 1929년 3월 24일.
지방의 기독교청년회들은 농촌부를 설치하고 농촌사업을 벌였다. 조선기독교청년회 전남연맹과 광주기독교청년회는 연합하여 농촌지도자양성강습회를 열기도 했다.715)≪중외일보≫, 1928년 7월 29일. 강습회는 1928년 7월 24일 무등산 澄心寺에서 열렸다. 강습회에 참가한 회원들은 가슴에 “협동하여 나가자”란 표어를 달았다. 강습회 환영회에서 崔元淳은 “농촌문제는 조선에 제한된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중대한 문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에서 농촌사업에 전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평양기독교청년회에서는 남녀청년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글을 보급하고 조선사의 관념을 인식시키기 위해 ‘한글과 조선사’ 강좌를 6일간 열기도 했다.716)≪중외일보≫, 1929년 3월 8일.
기독교와 천도교 및 시천교 청년단체들도 조선청년총동맹의 조직방침을 모방하여 중앙-도-군·부 단위형태의 조직형태를 취했다. 천도교의 청년단체는 천도교청년당의 신파와 천도교청년동맹의 구파로 나뉘어 전국적으로 조직화 되었으며, 시천교의 청년단체는 시천교중앙청년회를 중심으로 중앙청년회 지회를 설치하였다.717) 시천교중앙청년회는 1929년 4월 7일 서울에서 시천교청년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의안을 보면 다음과 같다.<의안>① 시천교중앙청년회 지지에 관한 건, ② 시천교중앙청년회 지회 조직에 관한 건, ③ 교회 기관지 지지의 건, ④ 布德방침의 건, ⑤ 미신타파 철저 실행에 관한 건, ⑥ 白衣 폐지에 관한 건, ⑦ 자체교양과 사회적 훈련에 관한 건, ⑧ 저축조합 실시에 관한 건, ⑨ 敎綱 준수에 관한 건, ⑩ 소년소녀 교양 보호에 관한 건, ⑪ 조혼폐지에 관한 건. 종교청년단체는 농촌을 중심으로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 청년운동의 대표적인 대립은 청년운동에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관철시키기 위한 조직방침을 둘러싼 논쟁과 무정부주의 청년단체의 동지단체 폭력을 들 수 있다.
신간회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 전취문제가 제기되자 지방의 청년단체들은 이를 둘러싸고 논전이 벌어졌다. 지방의 청년단체들 가운데는 그러한 주장을 후쿠모토주의(福本主義)에 기초한 “좌경소아병적 속학적 번역주의 이론”이라고 비판하면서 그들을 가리켜 신파벌을 조성하는 ‘신중간파’로 규정하였다.718) 김일수, 앞의 글, 303쪽. 서울의 경성청년회에서 군·부청년동맹론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뒤 경기도 안성, 경상북도 상주, 함경남도 영흥 등지의 청년단체들은 군·부청년동맹론자와 군·부위원회론자로 대립하여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했으나 결국 군·부동맹론으로 매듭지어졌다. 1927년에 들어와 평양과 원산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화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원산에서는 원산청년회를 둘러싸고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사이에 폭력이 행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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