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공업화를 추동한 일본자본의 조선산업에 대한 지배력은 절대적이었다. 1929∼1937년간에 조선인회사의 수는 3.7배, 자본금은 2.3배 증가했지만 90% 이상이 자본금 10만엔 이하의 소회사였다. 공업화 붐 속에서 조선인:일본인 회사의 납입자본금 비중은 1931년(10.3:83.3%)보다 1937년(12.2:83.0%)에 합작회사의 비중이 줄고 조선인 회사의 비중이 다소 확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병참기지화’ 정책에 의한 통제경제가 한창 진행중이던 1942년(8.3:88.8%)에는 조선인 회사의 비중이 크게 축소되었다.030)허수열,<식민지적 공업화의 특징>(≪공업화의 제유형≫Ⅱ, 경문사, 1996), 195쪽. 특히 자본금 100만엔 이상인 대자본회사의 격차는 더 커서 1940년의 경우 조선인 자본은 6%에 불과했다. 1942년 추계에 의하면 광공업회사의 설비자본 29억여 엔 가운데 일본질소(주)와 같이 일본에 본점을 둔 회사의 투자비율이 74%나 된 반면에, 조선내 회사의 투자비율은 18%에 불과했고 그 가운데 조선인 회사의 비율은 6%에 그쳤다.031)河合和男·尹明憲, 앞의 책, 135쪽.
조선인 공장의 대부분은 50인 미만의 직공을 둔 영세한 규모였다. 업종별로는 화학·식료품·요업·방직공업 등에서 두드러졌는데, 화학공업의 경우 정어리에서 魚油를 추출하여 일본질소(주)와 같은 일본회사에 공급하는 하청업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금속정련업, 도금업, 원동기·전기·토건용기기제조업, 법랑철기 제조업 등에도 조선인이 진출하였으나, 증기관·전지·철도차량·시멘트·펄프·맥주제조업, 제당업, 가스업 등 기술력을 요하는 업종에서는 조선인 공장이 전무하였다. 또 방직공업 부문을 제외하면 대자본이 필요한 영역에는 거의 진출하지 못하였고 대부분 생필품이나 일본인 군수회사의 하청 생산을 담당하는 영세공장이었다. 즉 식민지공업화로 조선인 자본가들은 영세한 기술력과 자본으로도 경쟁이 가능한 제한적인 틈새 영역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성장했지만 기술력과 대자본을 요하는 부문으로 거의 진입하지 못한 상태다. 그만큼 공업화에 따른 기술이전의 수준도 제한적이었다.
<표 1>에서 공장수는 1936∼1943년간(5,927∼13,293개, 2.24배)에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1940년대 이후에는 각종 통제로 사실상 (반)휴업 상태에 있던 공장이 다수 포함 된데다가 가동률이 대단히 떨어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다른 한편 이처럼 공장수가 많이 늘어난 것은 공장통폐합을 통한 군수산업 집중도가 컸던 일본에 비해, 조선에서는 전쟁수행의 간접적 지원을 위해 중소공업을 활용하여 소비재 필수품 생산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정책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중되는 물자난과 1942년 이후에는 영세업체를 주요 대상으로 한<기업정비령>이 시행되어 조선인 업체를 중심으로 한 중소공장은 가동률이 떨어지거나 폐업하는 수밖에 없었다. 즉 중소업체들은 전쟁경기의 틈새시장을 노리면서 명맥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본독점자본의 군수 하청공장으로 재편성되지 못하면 대부분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조선인자본이 집중된 대표적 업종인 메리야스 제조업의 경우 1단계 기업정비가 종료된 1944년 3월, 이전의 722개에서 174개로 격감했다.
이 시기 조선인 자본가의 존재 양태는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드문 경우였지만 조선비행기공업(주)의 朴興植, 경성방직(주)의 金佾洙처럼 군수산업에 관련을 갖고 ‘일본권’ 내의 분업구조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일제의 정책적 보호 아래 자본축적과 성장을 꾀했던 자본가군을 들 수 있다. 예속자본가 범주에 속하는 이들은 일제가 도발한 침략전쟁과 흥망을 같이 했다고 할 수 있다. 한 외국 연구자는 물자부족과 전시하 공급자 위주 시장을 기반으로 1933∼1945년 사이에 고정자산을 50배 이상 늘인 경성방직에게 품질과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평화시대는 오히려 장애물이었고 식민통치가 준 경제적 기회를 이용하여 1945년 이전에 처음으로 재벌을 형성했다고 평가했다.032)Carter J. Eckert, Offspring of Empire-The Koch'ang Kims and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1876∼1945,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1.
둘째, 식민지공업화의 붐을 타고 일정한 성장을 보였지만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성장의 기회가 차단되어 타협적으로 투자의 전환을 꾀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중반에 텅스텐 광산을 소유했던 원윤수는 만주침략 이후 군수광물인 텅스텐 수요의 급증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1937년 이후 광물채굴에 점차 일본자본이 집중되면서 광산을 판 매각대금으로 지주·요식업자·고리대금업자·고무공업 등으로 다양한 투자처 변신을 꾀했다. 그러나 결국 광업자본가로서의 성장이 차단되어 퇴보의 길을 걸었다.033)정병욱,≪일제하 조선식산은행의 산업금융에 관한 연구≫(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8), 226쪽.
셋째, 대다수 조선인 자본가들의 경우로서 전시통제 속에서 물자난과 자금난이 겹쳐 점차 도태되는 부류를 들 수 있는데 특히 1942년의<기업정비령>은 이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 주었다. 물자난의 틈새를 타고 소극적 저항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는 암거래로 자본축적을 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기업정비 과정에서 자기 자산을 사실상 빼앗기는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鄭周永이 20대 시절인 1940년에 설립한 자동차 정비공장인 아도서비스의 경우,<기업정비령>으로 1943년 초 일진공작소에 합병당했다. 그는 이를 두고 “말만 합병이지 합병 아닌 흡수였다. 동업자였던 李乙學·김명현씨가 먼저 빠져나가고, 강제 합병된 회사에 아무 의욕도 정열도 없었던 나 역시 곧 손을 떼었다”고 회고했다.034)정주영,≪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솔, 1998), 42∼43쪽.
1930년대 이후 식민농정의 전환으로 유산층의 자본투자처가 다양화되고, 일제 침략의 부산물로서 ‘만주붐’이 조성되는 환경 속에서 조선인 자본가들이 경영하는 공장이나 회사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시체제로 접어들고 전황이 악화되면서 일본 독점자본이 장악한 시장의 틈새에서 성장과 자본가로서의 생존을 모색했던 이들에게 운신의 폭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일제의 정책 운용에 개입할 여지도 능력도 없이 일본 또는 조선총독부가 전쟁 동원의 필요에 따라 결정하는 정책에 일방적으로 순응하는 존재였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군수업에 관련을 가지면서 기업을 유지하거나 부를 축적한 극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결국 기업정비 단계에 들어와 대부분 도태되거나 현상유지에 급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근대사에서 자본가 그룹은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역사의 전면에서 사회를 이끌어가기보다 민족해방운동을 적대시하면서 일제에 예속되어 부의 축적을 꾀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사회구성원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리더십은 더더욱 가질 수 없었다. 오늘날까지 불식되지 못한 한국 자본가그룹의 천민성·부패성·대외의존성은 이러한 역사적 연원에서 배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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