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Ⅲ. 국학 연구
  • 1. 국어학
  • 3) 조선어학회사건

3) 조선어학회사건

 일제 강점하에 있어서 국어운동은 민족의 말과 글을 수호하고자 하는 민족운동이었다. 일제는 문화적으로 內鮮一體를 내세운 동화정책을 펴나가면서, 사실상 민족말살을 추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을 수호하고자 한 국어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예상된 일이기도 하였다.

 이미 일제는 정책적으로 교육기관에서의 한국어 교수를 축소시키다가, 1938년부터는 아예 한국어 과목을 폐지하였다. 학교와 재판소 등 공공기관에서의 한국어의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1940년부터는 創氏改名을 강요하기 시작하였고, 1940년 8월에는≪동아일보≫와≪조선일보≫와 같은 국문신문을 폐간시키기에 이르렀다. 또한 1936년 12월에는<朝鮮思想犯保護觀察令>을 제정하여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등 반일세력을 ‘要視察人’으로 감시하고, 1937년에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의 회원들을 검거하는 등 민족주의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1940년에는<사상범예비구금령>을 발령하여, 언제든지 반일세력을 구금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탄압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가 한국에 있어서의 군국주의적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국내에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닌 단체를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일으킨 것이었다. 조선어학회가 맞춤법과 표준어·외래어 표기법 등을 정리하고 사전의 발간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42년 8월에 발단된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말기의 대표적 민족운동 탄압사건이었다. 즉 간접적인 민족운동으로 간주되고 있던 국어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사건은 1942년 여름방학을 맞은 함흥 永生女子高等普通學校 여학생들이 기차로 귀향하는 도중에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이 문초를 하다가, 홍원이 고향인 박영희라는 여학생의 집을 수색하여 일기장을 압수한 일에서 발단되었다. 일본어를 사용하였다고 꾸지람을 들었다는 한 구절을 일제는 대형사건으로 만들어서, 먼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사전 편찬에 참여한 鄭泰鎭을 9월 5일 체포하였다.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단정하고 10월 1일 이윤재·한 징·이극로·정인승·이중화·김윤경·李錫麟·최현배·權承昱·이희승·장지영 등 조선어학회의 주도 회원 11명을 체포하고, 사전원고와 회계장부·회의록·후원자 명부 등을 압수하여 홍원경찰서로 압송하였다. 이어 李祐植·金法麟·鄭烈模·이병기·李萬珪·이강래·김선기가 검거되었으며, 12월에는 徐承孝·安在鴻·李 仁·金良洙·張鉉植·정인섭·尹炳浩·李殷相이, 1943년 3월에는 金度演·徐珉濠가 검거되었다. 권덕규와 安浩相은 신병으로 체포를 면하였다. 이처럼 구속이 29명이었고, 불구속이 申允局과 金鍾哲, 그리고 권덕규·안호상으로 조선어학회사건의 관련자는 모두 33명이었다. 또 증인으로 불리어 취조를 받은 인물도 48명에 이르렀다.

 구속자의 대부분은 홍원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는데, 경찰은 이들에게 갖은 고문을 가하여 억지 자백을 강요하였다. 이윤재와 한 징은 고문 끝에 옥사하고 말았다. 경찰은 조선어학회의 모든 사업, 즉 사전 편찬사업·철자법 통일안·외래어 표기법·순회강습회·훈민정음 반포기념식·고전 출판 등이 범죄행위가 된다고 보았고, 검사는 1943년 9월에 관련자 중 12인을 기소유예로 석방하고, 이극로·이윤재·최현배·이희승·정인승·정태진·김양수·김도연·이우식·이중화·김법린·이 인·한 징·정열모·장지영·장현식의 16명을<치안유지법>위반으로 기소하여 예심에 회부되었다. 그 가운데 이윤재와 한 징은 옥사하였고, 장지영과 정열모는 1944년 9월에 공소 소멸로 석방되었으며, 나머지 12명에 대하여 1944년 12월 2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9회의 공판이 함흥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이들에 대한 판결은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이었고, 나머지 7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 가운데 정태진은 상고를 포기하고 복역하여 1945년 7월 1일에 출옥하였다. 나머지 4명은 1945년 1월 18일 상고하였으나,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이들은 8월 17일 함흥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132)조선어학회사건에 관해서는 사건 당사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어 참고가 된다.
金允經,<朝鮮語學會受難記>(≪한글≫11-1, 1946).
―――,<조선어학회 수난사건>(앞의 책), 670∼673쪽.
李熙昇,<朝鮮語學會事件>(≪一石李熙昇全集≫2, 서울대 출판부, 2000).
정인승,<조선어학회사건>(≪건재 정인승전집≫6, 박이정, 1997).

 이들이 공판에 회부된 이유서를 보면, 일제가 조선어학회와 국어운동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 본 건 조선어학회는 1919년 萬歲騷擾事件의 실례에 비추어, 조선의 독립을 장래에 기약하는 데는 문화운동에 의하여 민족정신의 환기와 실력양성을 급무로 삼아서 … 1931년 이래로 피고인 이극로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운동 중 그 기초적 중심이 되는 위에서 말한 바 어문운동의 방법을 취하여, 그 이념으로써 지도이념을 삼아, 겉으로 문화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독립을 목적한 실력배양단체로서 본 건이 검거되기까지 10여 년이나 오랜 동안, 조선 민족에 대하여 조선어문운동을 전개하여 온 것이니 … 조선어학회는 이같이 민족주의 진영에 단연 不拔의 지위를 차지하여, 조선 사상계를 풍미한 공산주의운동 앞에 다 慴伏하여, 아무 한 바 없이 혹은 자연 소멸하고 혹은 사교 단체로 타락하여 겨우 그 餘喘을 보존하여 오던 민족주의 단체의 사이에 있어서 홀로 민족주의의 아성을 사수한 자로서 중시됨에 이르러, 후단 기재의 사업 같은 것은 어느 것이든지 언문신문들의 열의 있는 지지 밑에 조선인 사회에 이상의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 중 조선어사전의 편찬사업 같은 것은 曠古의 민족적 대사업으로 촉망되었던 것이다(한글학회,≪한글학회 50년사≫, 17∼18쪽).

 바로 일제가 국어운동을 독립을 위한 실력배양운동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어학회가 그 중심에서 민족주의의 아성을 사수한 것으로 인식하였음이 확인된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실질적으로 해산되었고, 준비중이던 사전 편찬 원고는 증거물로 홍원과 함흥으로 옮겨다니다가 해방 직후 서울역 운송부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조선어학회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에 광분하던 일제의 민족문화운동에 대한 야만적인 탄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민족의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崔起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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