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Ⅳ. 종교
  • 3. 불교
  • 1) 식민지 불교의 성립
  • (1)<사찰령>체제

(1)<사찰령>체제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경술국치로 인하여 불교계는 일제가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제정·시행한<寺刹令>의 억압과 구속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이<사찰령>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그날까지 불교계의 모든 활동을 감시·감독하였다. 요컨대 일제하 한국불교는 이<사찰령>체제의 구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일제가<사찰령>을 통하여 불교계를 장악한 것은 불교계를 행정 편의주의적인 구도를 통하여 관리하고, 한국인의 정신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불교계가 독립운동에 나설 수 없는 기반을 구축함에 있었다.305)<사찰령>의 개요 및 성격은 아래의 논고가 참고된다.
정광호,<日帝의 宗敎政策과 植民地佛敎>(≪韓國史學≫3, 1980).
徐景洙,<日帝의 佛敎政策-寺刹令을 中心으로->(≪佛敎學報≫25, 1982).
崔炳憲,<日帝佛敎의 浸透와 植民地佛敎의 性格>(≪韓國思想史學≫7, 1995).

 <사찰령>은 1911년 6월 3일 제정·반포되었으며, 그 시행규칙은 동년 7월 8일 발표되었고, 9월 1일의 총독부령 제83호로 시행에 들어갔다. 이<사찰령>의 개요와 내용은 바로 일제하 불교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먼저<사찰령>의 전문(7조)을 살펴보자.

제1조. 사찰을 병합 이전하거나 폐지하고자 할 때는 총독의 허가를 받음이 可함. 그 基址나 명칭을 변경코자 할 때도 위와 같음.

제2조. 사찰의 기지와 가람은 지방장관의 허가없이 전법·포교·법요 집행과 僧尼 止住의 목적 이외에 이를 사용하거나 사용케 하지 못함.

제3조. 사찰의 본말관계, 승규 법식, 기타 필요한 寺法을 각 본사에서 정하고 조선총독의 허가를 얻어야 함.

제4조. 사찰에는 주지를 둠. 주지는 그 사찰에 속하는 일체의 재산을 관리하고, 寺務·법요 집행 등의 책임을 지며 대표함.

제5조. 사찰에 속하는 토지·삼림·건물·불상·석물·고문서·고서화·기타의 귀중품은 총독의 허가를 얻지 않고서는 이를 처분할 수 없음.

제6조. 전조의 규정을 위반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함.

제7조. 본령에 규정된 것 이외에 사찰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조선총독이 이를 정함(≪朝鮮總督府官報≫, 1911년 6월 3일).

 이 전문의 내용에서 파악되는 것은 사찰 및 승려로 요약되는 불교계 전체의 활동이 일제에게 완전 장악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계의 인사권·재산권·운영권이라 하겠다. 특히<사찰령>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각 본사는 寺法을 정하여 조선 총독에게 인가를 받았거니와, 그 사법도 일제가 사전 검토하고 준비한 틀에 일률적으로 맞추는 형식이었다. 더욱이 사법의 도입부에는 일본의 축제일과 역대 천황제일을 법식에 포함시키는 등 승려 및 불교신도를 황국신민화하려는 의도를 노골화시켰다.

 이같은<사찰령>의 등장은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그 중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불교 내부의 민주적인 전통이 사라지고, 점차 일제가 만든 행정구도에 편입되면서 내부의 갈등이 조장되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인 이른바 山中公議制度의 퇴진과 동시에 주지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막강해진 측면이다. 사찰행정의 주체가 일제당국이 되면서 주지들은 그 관권을 배경으로 일을 추진함에서 파생된 실권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변동을 주지전횡시대의 등장으로 표현하였다. 다음으로는 각 본사와 그 예하 사찰간의 사격 및 위상 즉 本末寺制度가 운영상에 있어서 또 하나의 구도로 작용하였다. 이는 각 본산 내부에 있어서 본사를 행정의 중심으로 설정한 것이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본산의 위상이 증대되면서 그를 빌미로 여타 말사를 억압하는 성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성향을 내포한<사찰령>에 대하여 당시 불교계 내부에서는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표출하였다. 일부 승려들이<사찰령>은 조선사찰의 권리를 박탈하고 조선승려를 박멸한다고 지적하였지만 대부분은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이는<사찰령>반포 이전인 개화기 공간에서 지방토호 및 기독교측으로부터의 피해에 대한 반발이 개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인식에는 사회진화론에 영향받은 일본불교에 대한 우호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불교계 내부에서<사찰령>에 대한 구체적인 그리고 확연한 비판은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일제는 한국불교의 명칭도 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는 자의적인 종명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자주적인 종단의 설립과 운영 자체도 인정치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불교계의 자율적인 운용 자체를 절대 허용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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