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朝鮮語學會사건으로 수감되었던 안재홍은 1943년 7월 석방 이후 일본의 패망에 대비하기 위하여 정치지도자들과 접촉하던 중 8·15를 맞이 하였다.371)오영섭,<해방후 민세 안재홍의 민공협동운동 연구>(≪태동고전연구≫5, 1998), 191∼195쪽. 안재홍은 여운형과 접촉하여 건국준비위원회에 부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 안재홍은 건준에 김병로·백관수·이인 등 우익계열의 민족주의 인사들을 참여시켜 건준을 명실상부한 민족운동세력의 조직으로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공이 건준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안재홍과 같은 중도우파세력들은 건준 내에서 별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안재홍은 건준에서 이탈하여 1945년 9월 1일 朝鮮國民黨을 조직하였다. 조선국민당은 기독교에 기반을 둔 朴容羲 중심의 社會民主黨, 항일운동을 했던 明濟世를 중심으로 조직된 民衆共和黨, 自由黨, 協贊同志會, 槿友同盟 등 6개 정당·사회단체가 합동하여 1945년 9월 24일 國民黨으로 확대, 발족하였다. 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장에는 안재홍, 부집행위원장에는 명제세와 박용희가 선임되었다.
국민당은 ‘선언’을 통해 ‘다사리’의 정치를 선언하였다. ‘다사리’의 정치는 “전 인민 각 계층의 너와 나와를 다사리(다-살리)게 하여 遺漏와 차등이 없이” 하는 정치로 ‘新民族主義’의 깃발 아래 전 민족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72)송남헌, 앞의 책, 132∼134쪽.
안재홍의 이념이었던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한영우,<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사학>(≪한국독립운동사연구≫1, 1987).
유병용,<신민족주의론 연구>(≪강원사학≫10, 1994).
김인식,≪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사상과 운동≫(중앙대 박사학위논문, 1997). 이러한 정치노선은 온건한 좌익세력이었던 조선인민당·조선신민당이 주장한 좌우합작, 또는 협동전선노선에 대비되는 것으로 좌우익 정치노선에 상관없이 모든 세력들이 연합해야 한다는 중도우파 입장에서의 좌우합작 노선이었다.
국민당의 좌우합작 노선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중도좌파와는 달리 특별한 원칙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친일파에 대해 특별한 규정이 없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즉, 선언에서는 “모든 진보적 反響 침략제국주의적인 지주·자본가 및 농민·노동자 등 皆勞層의 인민을 통합”한다고 하였지만, 강령과 정책에서는 일본인 소유의 토지분배에 대한 규정만이 있을 뿐 친일파 문제에 대해 특별한 정책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특징은 토지제도에 대한 규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국민당은 토지개혁의 궁극 목표로서 현재의 지주와 자작농은 현상을 유지하면서 새로이 일본의 토지를 분배하여 새로이 자작농을 만들어 내는 데 두었다. 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이었던 안재홍은 당시 한국사회에는 대지주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의 세력도 선진 외국자본주의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하다고 파악하였다. 이것은 곧 대지주와 농민 사이의 대립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파악한 것으로 토지문제에 대한 혁명적인 과정이 필요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토지분배의 방식에 있어서도 유상분배의 방식을 주장하였다. 무상분배가 농민들에게 잠시나마 좋을 수 있지만, 농업생산력이 저하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373)김인식,<안재홍의 신민족주의 국가건설론>(≪중앙사론≫9, 1997), 146∼158쪽. 토지개혁은 실제로 농업생산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국민당과 안재홍의 정치노선은 온건한 좌파세력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조선인민당을 중심으로 한 온건 좌파세력들은 친일파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해야 하며,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국민당은 이와는 다른 입장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하였다. 계급이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정치적 통합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 점이나, 사회경제적인 현실에 대한 분석에서 공통적인 인식이 나타난다. 특히 후자의 경우 조선인민당의 경제정책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산업자본의 확충을 통한 민족경제의 건설을 우선적 과제의 하나로 제시했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토지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유상몰수를 통해 민족자본의 형성을 공통적으로 주장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국민당은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의 이념하에서 정치세력의 통합을 목표로 한 정치활동을 추진하였다. 국민당이 건준에서 탈퇴하면서 내세운 정치적 목표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추대하는 것이었지만,374)김인식,<해방후 안재홍의 중경림정영립보강 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 1998), 281∼304쪽. 우익 정치세력이 추진하고 있었던 정치세력 통합을 위한 모든 움직임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이 정치세력 통합을 위해 추진한 독촉중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귀국하자 한민당과 보조를 같이하면서 임시정부 추대운동을 추진하였다.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었을 때 안재홍은 임시정부와 조공의 수뇌부를 방문하여 반탁운동을 위한 공동전선의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하였다.
3상회의 결정서 발표 이후 반탁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안재홍은 임시정부에서 주도하였던 반탁투쟁위원회에 부위원장으로 참여하여, 임시정부와 보조를 같이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의 반탁노선은 임시정부의 노선과는 다른 것이었다. 국민당은 반탁운동이 진행 중인 시점에서도 정치세력 합작을 위해 진행되었던 4당회합·5당회합에 참여하여 정치세력 통합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비록 정치세력 통합을 위한 움직임이 성공하지 못했고, 반탁진영에 계속 잔류하였지만, 국민당의 반탁운동에 대한 입장은 임시정부와는 다른 것이었다.
안재홍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탁치안이 아직 실시가 아니된 대신 철폐도 아니 되었으니, 장래를 위하여 무용한 반탁시위는 필요할 때까지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이었으며,375)오영섭, 앞의 글, 21쪽. 미·소공동위원회에서 5호성명을 발표한 직후에는 民共協同으로 좌우합작을 성사시킨 다음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76)안재홍,<자력건설과 자주건국>(≪민세안재홍 선집≫2, 지식산업사, 1983), 436∼437쪽. 이러한 차이는 국민당의 정치노선이 한민당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한독당에 비해서는 미군정에 보다 협조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다. 한독당과 합당한 이후 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계열의 인사들이 과도입법의원이나 南朝鮮過渡政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안재홍은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의 민정장관에 취임하였다.
국민당의 노선이 중도좌파와의 합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반탁운동으로 인해 조성된 좌우익간의 대립 속에서 국민당은 합작보다는 우익 정치세력과 보조를 같이 하였다. 국민당은 3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된 이후 임시정부가 조직한 비상국민회의, 미군정과 이승만이 주도한 민주의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국민당은 결국 한독당·신한민족당과 함께 삼당합당을 추진하여 한독당에 통합되었다. 안재홍은 한독당의 중앙상무위원 겸 훈련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의 노선은 한독당의 노선과 동일하지 않았다. 좌우합작 및 과도입법의원에 대하여 안재홍 및 국민당 계열은 임시정부세력에 비하여 적극적이었으며, 38선 이남에서의 총선거가 결정된 다음에도 임시정부 계열이 남북협상 참여를 결정한 데 반하여 국민당 계열은 총선거 참여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377)≪동아일보≫, 1948년 2월 8일. 한독당 내의 국민당 계열이 38선 이남에서의 총선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임시정부 계열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안재홍은 1948년 말 이후 국민당을 모체로 하여 새로운 정치적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50년의 제2대 총선거에 입후보(경기도 평택)하여 당선되었지만, 6·25 전쟁시 안재홍은 납북되었고, 국민당은 더 이상 한국 정치무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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