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에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미술 교육기관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946년 서울대학교에 예술대학 미술학부가 창설되었고 이듬해 이화여대에 역시 미술과가 문을 열었다. 2년 뒤인 48년에는 홍익대학에 미술학부가 생겨 세 개의 미술대학이 문을 열게 된 것이다. 해방 이전에는 이 땅에 정식 미술대학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미술지망생들이 일본으로 유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일부 동양화가들에 의한 도제 교육시스템인 화숙이 존재했지만 정식 커리큘럼을 완비한 교육제도는 불행히도 없었다.
해방 후 미술대학의 출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리들에 의해 우리의 미술가가 길러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 그 하나요, 새나라가 되면서 걸맞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명분의 실현이 두 번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교육 커리큘럼은 일본의 제도적인 것을 그대로 추종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교수진이 일본에 유학했던 작가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교육내용이 자연 그들 자신들의 수업 내용에 준할 수밖에 없었다는 모순이 지적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신민족미술이라는 관념이 전반적으로 지배했던 인상이 강하다. 왜색의 탈피는 구체적인 제작의 방법을 통해 구현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울대 미술학부의 회화과는 특히 채색풍의 일본화적인 잔재를 극복하기 위해 선묘 위주의 문인화풍이 적극 진작될 뿐 아니라 현실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현실모티브의 취재가 적극 장려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서울대학에는 장발을 중심으로 회화에 金瑢俊, 장우성(동양화)·김환기(서양화), 조각에 尹承旭이 교수로서 영입되었다. 이화여대는 김인승·심형구·김영기·金景承 등이 교수로, 홍익대는 尹孝重(조각)·裵雲成(서양화)·陳瓛(서양화)·이상범(동양화)·이응로(동양화) 등이 교수로 초빙되었다.
<吳光洙>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