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명 | 기획 | 자료해설 자문 | 연출 | 시나리오 구성 | 기획 제작 | 구축연도 |
---|---|---|---|---|---|---|
석탑 | 김소남 박남수 |
박경식 | 김형우 이혁로 이연식 |
안현진 | (주)아리랑TV미디어 | 2016 |
무덤 | 김재홍 | |||||
토우와 토용 | 김현희 | |||||
토기 | 권오영 | |||||
기와 | 이병호 | |||||
조선시대 회화 | 조규희 | |||||
한국의 성 | 서정석 | |||||
불사 | 이기선 | |||||
음악 | 송지원 | |||||
도성과 왕궁 | 박순발 | |||||
고려청자 | 전미희 김소남 |
조은정 | 윤종원 | 김미현 | (주)투와이드 컴퍼니 | 2017 |
분청사기 | 박경자 | |||||
백자 | 박정민 | |||||
복식 | 이은주 | |||||
사찰건축 | 이종수 | 최광석 | 배수영 | |||
고려불화 | 김정희 | |||||
서예 | 손환일 | |||||
지도 | 양보경 | |||||
동종 | 김소남 임천환 |
원보현 | 윤종원 | 배수영 | (주)투와이드 컴퍼니 | 2018 |
서원 | 조재모 | |||||
세종대 천문기기와 역법 | 정성희 | |||||
제지술과 인쇄술 | 이재정 | |||||
통신사행렬도 | 정은주 | 최광석 | 김미현 | |||
한글소설 | 유춘동 | |||||
화폐 | 정수환 | |||||
석빙고 | 임천환 서일수 |
김지영 | 김기원 | 김자경 | 스토리라인 | 2019 |
활 | 최형국 | |||||
화약무기 | 김해인 | 문현성 | 한정옥 | |||
배 | 김병륜 | |||||
김치 | 김혜숙 | 윤종원 | 나누리 | |||
인삼 | 김성수 | |||||
담배 | 임성수 | 신정화 | 윤옥희 | |||
구황작물 | 구열회 | |||||
온돌 | 임천환 이홍구 |
경석현 | 윤종원 | 김자경 | 스토리라인 | 2020 |
농기구 | 염정섭 | |||||
바둑 | 남치형 | 김기원 | 김자경 | |||
문방사우 | 김지나 | |||||
화장 | 이민주 | 신정화 | 한정옥 | |||
관례 | 김지영 | |||||
목간 | 이경섭 | 문현성 | 이나경 | |||
봉수 | 김경태 | |||||
판소리 | 신재호 이홍구 |
최혜진 | 문현성 | 곽기연 | 스토리라인 | 2021 |
궁중음식 | 박은혜 | |||||
의궤 | 신병주 | 김기원 | 나누리 | |||
갓과 모자 | 장경희 | 김기원, 윤종원 | ||||
종묘 | 조재모 | 윤종원 | 정은주 | |||
종묘제례악 | 송지원 | |||||
감염병과 방역 | 김호 | 신정화 | 한정옥 | |||
풍속화 | 유재빈 | |||||
궁궐 | 신재호 이홍구 |
조재모 | 김기원 | 한정옥 | 스토리라인 | 2022 |
전통정원 | 소현수 | |||||
조선왕조실록 | 강문식 | |||||
칠공예 | 최영숙 | 신정화 | 김자경 | |||
염직 | 백영미 | |||||
탈놀이 | 허용호 | 윤종원, 유환수 | 임승연 | |||
궁중무용 | 손선숙 | 문현성 | ||||
민화 | 유미나 | 문현성 | 나누리 | |||
어보 | 성인근 | |||||
읍성 | 신재호 이주호 |
이일갑 | 지해 김성진 |
하원기 | 스튜디오바카 | 2023 |
혼례 | 김연수 | |||||
질그릇 | 한혜선 | 지해 손희창 |
홍종화 | |||
탱화 | 유경희 | |||||
농악 | 양옥경 | |||||
해녀 | 오상학 | 지해 김정동 |
||||
한옥 | 신재호 이주호 |
송인호 | 김기원 | 임승연 | 스토리라인 | 2024 |
한글타자기 | 김태호 | |||||
도시한옥 | 송인호 | |||||
달항아리 | 박정민 | |||||
상감청자 | ||||||
수원화성 | 조재모 | 신정화 | 곽기연 | |||
도산서원과병산서원 | ||||||
소쇄원 | 소현수 | |||||
기산 풍속화 | 유재빈 | 윤종원 | 이나경 | |||
책거리(책가도) |
18세기 말 조선 시대에도 철저한 계획하에 건설된 획기적 신도시가 있었으니, 바로 ‘수원화성’입니다.
상업과 군사적 기능에 독창적인 건축미까지 갖춘 곳
정조가 이룬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을 만나봅니다.
전투요새로서의 기능
수원화성의 역사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옛 수원읍으로 옮기기 위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한양 남쪽, 교통의 요지인 팔달산 아래로 이주시키면서 시작됩니다.
“수원 부사 조심태(趙心泰)가 봉표(封標)한 혈전(穴前) 근처에 살던 민호(民戶)에게 이주하는 대가로 값을 지급한 것으로 아뢰었다.” - 『일성록』 정조 13년 (1789년) 7월 20일
정조는 신도시 수원을 경제력을 갖춘 도시로 만들기로 계획하고, 관청과 향교, 또 왕이 행차할 때 머무는 행궁도 세우며 도시를 이뤄가죠. 또 이주비를 지원하며 이사시킨 주민들에게 상업 활동을 권장하며 금전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은 결과, 신수원으로 이주를 시작한 지 약 5년 만에 1,000호에 가까운 집들이 시가지를 이루는 도시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둘러 ‘수원화성’을 완성합니다. 수원화성은 생활 공간이자 방어와 공격의 기능을 겸한 성곽 시설을 갖춘 ‘전투 요새’로서 계획 건설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의 성곽에는 총 48개소의 공격과 방어시설이 약 100m마다 설치되어 있는데요.
동서남북으로 놓인 성문은 벽돌로 쌓은 옹성을 설치한 이중구조로 설계하였고, 북문과 남문 좌우에는 적을 감시, 공격할 수 있는 적대를 두었습니다. 여기에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는 포루와 기계식활을 쏠 수 있는 노대, 또 내부에서 밖을 살피며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3층 구조의 독특한 벽돌 건축물인 공심돈도 존재합니다.
또 적을 잘 감시하기 위해 각루와 포사도 만들고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한 장대도 두었고, 성곽 시설 곳곳 벽돌을 적극 활용하여 아름다운 조형미까지 갖췄습니다.
상업도시로서의 기능
한편 수원화성은 조선 전기 이래, 읍성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상업 도시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성내 공간도 더 효율적으로 구성했는데요. 도시의 기반시설 정비를 위해 성곽을 관통하는 하천을 준설하고 ‘십자로’를 넓게 조성해 물류가 원활하게 소통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더불어 상업 시설을 중심대로 좌우로 배치하여 백성들이 다양한 상업활동에 종사할 수 있도록 계획했습니다.
[에필로그]
조선 후기 상업 발전이라는 흐름에 발맞춘 새로운 경제 도시에, 당대 최신 기술을 적용하여 방어와 공격 기능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수원화성
‘조선의 신도시’를 향한 정조의 꿈은 그 가치를 지속시키기 위한 후손들의 다양한 노력 속에서 계속해서 빛나고 있습니다.
-------------------------------------
자문 : 조재모
시나리오·구성 : 곽기연
검수 : 정정남, 명재림, 서명원
성우 : 박기욱
촬영 : 윤수원
종합편집 : 박인준, 이승신
녹음·음악 : 조동효
로고 : 민승욱
촬영, 자료 협조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진흥원, 국가유산채널,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수원시화성사업소, 수원화성박물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Interactive Digital Heritage Lab
PM : 윤종원.김기원
행정 : 김상희
연출 : 신정화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에 의해 조성된 신도시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옛 수원도호부 지역, 지금의 융릉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주민들을 이주시키고자 하였다. 수원화성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여러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드러난 기존의 읍성들이 가진 방어 전략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상업도시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에서 조선후기의 가장 특별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입지의 관점에서 보면 방어보다는 교통망을 우선으로 고려하였고 굳이 남향을 택하지 않고 도시 전체가 동쪽을 향하면서 서쪽의 팔달산에 기대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기존의 방어시스템, 즉 평상지의 성과 전란시의 산성으로 양분된 방식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반성을 통해 성곽 자체의 방어 성능을 끌어올리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작용하였다.
그래서 화성은 이전의 성곽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많은 요소들을 갖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심돈이다. 물론 이것이 완전히 새로운 발명품은 아니었다. 화성의 계획가들은 이미 한반도에 존재했었던 성곽 축조기술과 건축전통에 중국, 일본 및 멀리 유럽의 성곽 제도까지 살펴보면서 성곽의 방어성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공심돈뿐만 아니라 봉수대를 개선한 봉돈, 치성의 방어 성능을 복합화한 포루(砲樓), 포루(鋪樓)와 노대, 장대, 포사, 각루 등 각종 시설을 설치하였다.
성곽의 문들도 마찬가지다. 성곽의 방어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이 바로 문이다. 특히 상업적 측면을 강조한 도시라면 일상적인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방어의 문제를 풀어야 했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도시의 북쪽과 남쪽을 관통하는 가장 큰 문인데 홍예 석축 위에 중층의 누각을 올리고 활과 총으로 주위를 제압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성문을 공격하려는 적들을 막기 위해 앞쪽으로 옹성을 두르고 좌우에는 적대를 두었다. 옹성과 적대에는 오성지, 현안 등을 배치하여 최대한의 방어 성능을 갖추었다. 창룡문과 화서문은 이보다 작은 동서의 문이다. 옹성과 목조건물의 규모가 장안문, 팔달문보다 작은 점이 비교된다. 암문은 4대문 사이사이에 배치된 작은 문으로서, 언뜻 눈에 잘 띄지 않게 만들었기에 암문이라 불렀다. 암문은 평소에 시민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면서도 유사시에는 방어시설로 쓸 수 있도록 오성지, 총안 등이 잘 구성되어 있다.
수문은 수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하천이 성곽과 만나는 지점에 배치되었다. 물길 또한 방어에 취약할 수 있는 곳이다. 북수문은 하부에 7개의 홍예를 짜서 물을 통과시키되, 적들은 들어올 수 없도록 철망으로 문을 달았으며, 상부에는 목조누각을 두어 방어하는 군사들을 배치하였고 화홍문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남수문은 9개의 홍예를 두어 늘어난 유량을 감당하도록 하였으며 역시 군사가 숨을 수 있는 여장을 충분히 만들었다. 북수문과 달리 목조누각을 두지는 않았다.
굽은 형태로 설치한 성벽에는 밖으로 견고한 석재로 성벽을 쌓고 안으로는 흙으로 경사지게 처리하는 내탁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성곽의 오랜 전통이다. 여장과 총안 등으로 방어 성능을 향상시켰고, 평지부분과 산지부분을 적절히 선택하였다. 말하자면 수원 화성은 한반도의 성곽전통을 기반으로 외국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탄생시킨 시대의 수작이라 할만하다.
화성의 시대적 가치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신도시로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수원 화성 주변에는 여러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용수를 확보하였으며, 성 내에는 십자가로, 신작로 등 혁신적인 가로망 체계를 바탕으로 시장을 활성화시켰다. 즉 방어시설로서의 기능만이 아니라 본격적인 상업도시이자 지속가능한 경제기반을 갖춘 거주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갖추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방화수류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방화수류정은 장안문 옆 용연을 바라보는 위치에 건립된 각루이다. 화성에는 동북, 서북, 동남, 서남 등 4곳의 각루가 배치되었다.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를 점하여 주변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한 군사시설이다. 방화수류정은 동북각루의 다른 이름인데 용연 등 주변 경관이 뛰어난 점을 활용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정자건축의 백미이다. 화성의 방어 시설들은 전란뿐만 아니라 일상의 영역에서도 다각도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큰 화성의 가치는 바로 공사의 방식이다. 수원 화성은 정조와 정약용의 학문적 수준과 건축적 아이디어를 구현한 것이었으며, 이는『성화주략(城華籌略)』(1793)에 상세하다. 채제공의 총괄,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초에 착공하여 2년여 만에 완공된 수원화성은 성곽 전체 길이는 5.74Km이며, 높이 4~6m의 성벽이 130㏊의 면적을 에워싸고 있다. 이러한 규모의 성을 짧은 기간 내에 완공해낸 것은 공사방식의 혁신 덕이었다. 노동력의 수급에 있어서는 노임을 주는 방식을 택하였고, 건설자재도 자재상으로부터의 매입 등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 또한 잘 알려진 대로 거중기, 녹로, 유형거 등 각종 기계를 고안, 도입한 점도 공사 진행을 원활히 하였다. 대대적으로 활용된 벽돌은 이 시기 실학자들의 건축적 이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석재와 벽돌을 필요에 맞게 혼용하여 건설함으로써 건축물의 정밀도와 공간 활용성을 높였으며, 유지보수에 있어서도 훨씬 효율적인 건물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는 수원화성의 모든 가치를 소상하게 담고 있다. 계획, 법식, 인력, 자재, 용도, 예산, 임금, 기계, 일지 등 모든 항목을 망라하였으며 상세한 도판 자료를 통해 현재 조선시대 건축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수원화성은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아 이미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팔달문, 화서문 등 개별 건물들도 다수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또한 1997년에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증명하였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화성은 18세기 군사 관련 건축의 백미로서 실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유럽과 동아시아의 과학적 지식을 통합하였다. 동서양 사이의 과학 기술성과의 교환을 반영하는 건축, 재료사용의 발전상을 보여준다. 이 성곽은 한국의 건축, 도시계획, 조경 및 관련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등재기준 ii)으며, “화성은 전통적인 성곽 건설의 방법과 혁신적인 입지 선택을 결합하여 방어, 행정, 상업 기능을 제공할 수 있었다. 화성은 18세기 한국의 급격한 사회적, 기술적 발전을 증명한다”(등재기준 iii)이라고 수원화성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도시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힌다. 모여 살아가기 위한 집락으로 시작되어, 점차 중심지로서의 권위, 전란시의 방어, 일상적 시장교환 등 몇 개의 목적점이 혼재되어 발전하였다. 성곽은 권위와 방어라는 측면에 초점이 두는 요소이다. 시장교환을 측면으로 보면 폐쇄적인 성곽도시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이 유리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도시 성곽들은 근대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도시근대화의 명분으로, 혹은 식민지침탈의 방편으로 철거된 성곽의 자리는 이후 도로나 일반 필지로 전용되면서 지금은 지도 정보에 희미하게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수원화성을 없애지 않고 대도시로 발전해간 수원은 단연 돋보이는 도시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