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 9일 서울에 들어온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면서 교육 관련 행정은 학무국에서 맡았다. 학무국장 로카드(E. L. Lockard) 대위는 교육 자문을 위한 한국인으로 오천석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초청했고, 자문기관으로 한국교육위원회를 구성했다. 한국의 교육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였던 미군정에서는 한국인 엘리트 집단에 의존하여 교육 재편 작업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오천석, 현상윤, 유억겸, 백낙준, 김활란, 김성수, 정인보 등이 참가한 교육위원회는 미군정기 한국 교육행정의 모체로서, 일제 식민지 교육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고유의 교육을 시작하기 위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위원회의 공식 성격은 자문기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교육의 모든 부문에 걸쳐 중요한 문제를 심의·결정하였으며, 주요 인사 문제까지도 다루었다. 이 교육위원회는 1946년 5월 해산되었다.
미군정은 한국 교육의 기본 방침을 반공체제의 구축과 자유민주주의 제도화에 두었다. 1945년 9월 17일 미군정청 일반명령 제4호는 ‘신조선의 조선인을 위한 교육’인데, 일제의 교육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교육의 길을 여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미국식 민주 교육의 시작을 의미하는 공민 과목이 생겼으며, 역사 과목이 부활했다. 9월 24일부터 모든 공립 초등학교가 개학하고, 중등학교 이상은 10월 1일 일제히 개학하였다. 10월 21일에는 학무 통첩 352호를 통해 초․중학교의 과목당 수업시간을 결정했다.
미군정은 일제의 식민지배체제에 따른 전체주의적 교육을 탈피하고 민주주의 시대를 맞이한 한민족을 위한 새로운 교육을 계획했으나, 아무런 준비나 계획 없이 단지 일본어로 된 교과서를 사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미군정의 조치는 교육에 대한 아무런 정책이나 방향, 준비 없이 취해진 것이었다. 일본식 교육의 청산과 미국식 민주주의 이념의 도입만이 교육 방향으로 제시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미군정은 일본어로 된 교재를 번역하고, 일본사 위주로 되어 있던 역사 내용을 한국사 중심으로 바꾸는 등 최소한의 수정에 그쳤으며, 일제 말의 교육제도 또한 그대로 유지되었다. 미군정청 학무국은 1945년 10월 15일 초등학교 5~6학년용 국사 교과서를, 12월 11일 중등학교용 국사 교과서를 각각 발간하였다.
1946년 12월 미군정청 학무국의 편수 담당관들에 의해 초등학교 교수요목이 발표되고, 약 1년 뒤 중등학교 교수요목이 발표되었다. 교수요목은 군정 실시 후 완전한 교육과정을 만들 시간이 없으므로, 각급 학교에서 교수할 각 교과목의 주요 내용을 항목별로 제시한 것이었다. 교수요목은 교수와 학습 활동이 이루어지는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칠 내용을 교과 편제에 따라 교수할 목적으로 작성한 일련의 수업 요목을 말한다. 교수요목은 일제 때부터 쓰던 것으로 ‘교육과정’과 같은 뜻을 가진다.
미군정청의 교수요목은 정부가 수립되고 교육법이 제정되면 새로 정비할 계획이었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1954년 4월 새 교육과정이 공포될 때까지 계속 적용되었다. 미군정청의 초등학교 교수요목은 국어․수학․사회 생활․이과 등 4개 과목만 발간되었는데, 그 가운데 사회생활이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
미군정청 교수요목은 기초 능력의 배양, 교과의 분과주의와 체계적인 지도 및 지력의 배양, 홍익인간의 이념에 입각한 애국애족 교육의 강조와 일본 식민지 지배의 잔재를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사회 생활과는 “사람과 자연 환경 및 사회 환경과의 관계를 바로 인식시켜 사회 생활에 성실 유능한 국민이 되게 함”을 그 교수 목적으로 하고 있다.
광복 후 일제의 교육을 탈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랐지만, 국사나 국어 교과서는 새롭게 편찬하여야 했다. 이에 진단학회가 1945년 9월 17일 미군정청으로부터 학교에서 사용할 국사 교과서의 편찬을 위촉받고, 불과 4일 만에 원고를 미군정청에 제출하여 초등용『국사교본』이라는 국사 교과서를 편찬하게 되었다. 이 초등용 『국사교본』은 1946년 1월 전국의 학무과에 1, 2권씩 배부되었다.
광복 후 초등학교에서 정식으로 국사 교육이 실시된 것은 1946년 2월 23일이었다. 국사는 국어와 더불어 광복된 한국의 교육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으며, 각급 학교의 수업에서도 기본적인 독립 교과목이었다. 그러나 1946년 12월의 미군정청 교수요목에서 역사는 공민․지리와 함께 사회 생활과에 통합되었다. 이로써 역사는 독립적인 과목에서 벗어나 초등학교의 사회 생활과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되었다.
중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1945년 12월 미군정청이 진단학회에 집필을 위촉하여 1946년 5월에 중등용 『국사교본』이 발행되었다. 그리고 교수요목기에 초등 국사 교과서로 발행한 ‘우리나라의 발달’ 1권이 1947년 2월 경에 발행되고, 2권이 1949년 12월 경에 발행되었다.
1947년에 중등학교 교수요목이 발표되면서 중등학교 역사도 초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사회 생활과에 포함되었다. 중등학교 역사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동양 및 서양의 전체에 긍하여 문화 생활을 이해시켜 우리 민족의 발전적 자립정신 앙양에 기여케 하며, 나아가 국제 친화를 위해 노력하는 태도를 기르도록 한다.”는 데에 교육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는 민족사를 중심으로 세계사를 이해하고 민족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며, 나아가 국제 사회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새로운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교육법이 1949년 말에 공포되면서 교과서 개편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49년부터 새로운 검정 교과서가 사용되었는데, 이때의 교과서는 고대사 분야가 강조되고, 근대 이후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였다. 전체적으로 역사의 흐름이 왕조사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일본인이 주도하던 연구 내용에 의존해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이 그대로 반영되기도 하였다. 국사 교과서의 내용 또한 진단학회의 『국사교본』과 거의 동일하여 광복 직후 국사 교육은 진단학회의 영향이 컸음을 보여준다.
중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식민지 시기에 축적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주로 정치사 위주로 서술되었다. 『국사교본』 이외에 권덕규의 『조선사』(정음사, 1945), 문석준의 『조선역사』(함경남도교육문화부, 1945), 최남선의 『조선국사』(동명사, 1945), 이창환의 『조선역사』(세창서관, 1945), 정벽해의 『조선역사』(삼중당, 1946), 황의돈의 『중등 조선역사』(삼중당, 1946), 최남선의 『국민 조선역사』(동명사, 1947), 김성칠의 『조선역사』(정음사, 1947), 장도빈의 『중등국사』(고려도서원, 1947), 손진태의 『중등국사』(을유문화사, 194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