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국조사』는 원영의가 1909년부터 1910년 사이에 저술한 한국사 책이다. 조선시대를 편년체로 서술하였으며, A5판 크기로 전체가 201면으로 구성된 국한문혼용본이다. 조선왕조의 태조조부터 대황제조(순종)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역대왕별로 장⋅절의 구분없이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2. 저자
원영의(元泳義, 1852년~1928년)는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과거에 응시했으나 누차 낙방하였다. 이후 당시의 거유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는데, 유중교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과 함께 위정척사설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원영의는 유중교의 문하에서 평생의 학문적 기초를 닦아 한학에 상당한 소양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공부가 후일 국사⋅한문 등 다양한 교과서를 집필할 수 있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국가에서 근대교육제도를 도입하자 원영의는 ‘도덕을 근간으로 하되 신학문을 지엽(枝葉)으로 삼은 후에 열강과 경쟁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1895년 5월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속성과에 입학하였다. 과정을 이수하고 그해에 관립소학교 교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한성사범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원영의는 청국, 일본, 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세력다툼을 하는 것을 직시할 것과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국력을 충실하게 증진시켜야 한다는 것을 교육의 지표로 삼았다. 관립학교의 교원으로 재직하던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직전 사임하였다.
원영의는 을사조약 체결 이후 상실되어 가는 국력을 만회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사립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교육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장지연(張志淵), 유근(柳根), 안종화(安鍾和), 현채(玄采) 등과 함께 사립학교를 건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한문⋅국문 및 역사교과서 등 다양한 종류의 교과서를 출간하여 민족교육의 교재로 제공하였다. 1908년 9월부터 1909년 3월까지 제5대 휘문의숙 숙장을 역임하였고, 휘문의숙 이외에도 보성, 기호 등의 사립학교에서도 가르쳤다. 그 밖에 서북학회, 기호학회, 교남학회, 보성교우회, 대한흥학회 등 교육 관련 계몽운동단체와 대한자강회, 대한협회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황성신문, 대한민보, 소년한반도 등 언론에 나라의 독립과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글을 투고하는 등 언론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고향인 경기도 연천(漣川)으로 귀향하여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928년 77세로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소학한문독본(小學漢文讀本)』, 『신정동국역사(新定東國歷史)』, 『몽학한문초급(蒙學漢文初級)』, 『초등작문법(初等作文法)』, 『국문과본(國文科本)』, 『상밀조선산수도경(詳密朝鮮山水圖經)』, 『중등동국역사(中等東國歷史)』, 『중등동국지지(中等東國地志)』, 『동사보편(東史補編)』, 『근고문선(近古文選)』, 『공자실기(孔子實記)』, 『독본(讀本)』 등이 있다. 그밖에 교열한 책은 『초등윤리학교과서(初等倫理學敎科書)』, 『초등생리학교과서(初等生理學敎科書)』, 『동몽수신서(童蒙修身書)』, 『초등대한지지(初等大韓地誌)』, 『초등만국지리대요(初等萬國地理大要)』 등이 있다.
3. 발행의도
『국조사』는 원영의가 1910년에 조선시대를 편년체로 저술한 한국사 책이다.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한 의도를 밝히지 않아 정확한 발행 목적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906년에 원영의가 유근(柳瑾)과 공동으로 저술해 출판한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가 단군 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 만을 대상으로 한 탓에 조선시대의 역사가 포함되지 않아 한국통사(通史)로 완결되지 못한 점을 한계로 여겨, 추가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저술하여 이 두 책을 묶어 하나의 완전한 한국통사를 펴내려한 의도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아울러 『신정동국역사』의 서문에 밝힌 대로 역사책을 발행할 때 ‘어린 학생들이 쉽게 공부하는 데 편하도록 하기 위해 국한문 혼용체로 하였으며 국사를 공부하는 것이 보통학교(소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한 사실에서 저자가 국사교육이 교육의 종지(宗旨)이며 근본이란 인식을 갖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교육의 근본을 국민계도에 두고 역사교육을 통해 조국정신의 환기, 동족의 관념고취, 애국의 혈성 등을 배워 힘을 키워야 함이라고 주장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국조사』의 발행 역시 이러한 저자의 역사교육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저자가 여러 종류의 초등용 교과서를 집필하고 교열하였는데, 그 교과서들 중에는 역사교육과 애국정신고취를 중시한 내용이 많아서 원영의가 이러한 교재를 편찬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국조사』는 인쇄본이 아니고 등사한 필사본으로 남아있다. 이런 『국조사』의 발행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해 볼 수 있다. 우선 책의 내용 중에는 일제가 금지한 민족의식의 고취나 일제의 침략상을 저술한 부분이 적지 않았으므로, 인쇄본으로 간행할 수 없어 필사본으로 만들어 은밀히 읽혔을 가능성이다. 후일 원영의는 일제시대 보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항상 품안에 어떤 책을 숨겨 가지고 교실에서 일경의 눈을 피하여 펼쳐 놓고 가르쳤다는 일화를 남겼다. 혹시 그때 그가 품안에 숨기고 있던 책이 바로 『국조사』가 아닐까? 즉 그는 학생들의 교재로 『국조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고려시대까지를 서술한 『신정동국역사』의 속편으로 『국조사』를 필사 원고본까지는 준비하였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4. 체제와 서술 방식
『국조사』는 조선시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국한문혼용본의 한국사 책이다. A5판 크기로 전체가 201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표지에는 ‘국조사(國朝史)’ 라고 책명을 명기했으며, 다음 속표지에 융희 3년 12월 27일의 날짜가 기재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저술 연도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위의 속표지에 기록된 날짜로 보아 1910년 12월 27일이 저술을 마무리한 시기, 즉 발행시기라고 볼 수 있다.
서문은 물론 목차도 없고 글의 소제목도 없고 두주도 없다. 본문을 시작하는 첫 장에 원영의 구술(元泳義口述)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어느 누가 대필한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사항을 확인할 수 없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교과서용으로 쓰여진 역사서로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 책의 내용이나 그 구성에서는 교재용으로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요인을 찾아볼 수 없다.
국조사란 조선시대의 역사를 뜻하므로 대상 시기는 조선왕조의 태조조부터 대황제조(순종)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역대왕별로 서술하였다. 『국조사』는 『신정동국역사』와 같이 편년체의 서술방식을 취한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예컨대 왕을 표시함에 있어 휘(諱)와 계통(系統)을 적고 각 왕의 재위 기간과 그의 수명[壽]을 나타냈으며, 한 왕의 시대를 기록함에 있어서 문장이 도중에 그치지 않고 끝까지 이어지는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고종과 순종조의 시기는 태황제조와 대황제조란 항목으로 표기하여 대한제국의 선포와 황제칭호를 사용한 황제국임을 한국사 책에 명기하여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전체구성 중 고종시대의 기사부분이 158~201쪽까지를 차지하고 있어 책 전체의 1/5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즉 1876년 개항이후의 근대화의 격동기인 이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어 저자의 당대사인식을 가늠할 수 있다.
각 왕의 통치시기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을 편년체로 간략하게 서술하되 평가하는 내용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권선징악이나 교훈적인 기사 내용을 특별히 기록하지 않아,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사 교재라 할 만한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5. 내용과 서술의 특징
『국조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하여 대황제(大皇帝), 즉 순종 황제의 재위 중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이 이완용(李完用)에게 자상(刺傷)을 입히는 데까지로 되어 있다.
서술 내용의 특징은 첫째, 조선 왕조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임진왜란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여 수군(水軍)의 승리와 의병 활동을 많이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이후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지성들이 자결하는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였으며, 또한 각지 의병의 거사를 서술하여 민족적인 저항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원로 조병세(趙秉世), 시종 무관장 민영환(閔泳煥), 홍만식(洪萬植), 이상철(李相哲) 등 자결한 지사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 점과 관련해 저자 역시 이 조약에 대해 비분강개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의병관련기사는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최익현(崔益鉉)의 죽음을 건 항거에 대해 기록하였다. 또한 군대해산이후 대대장 박성환(朴星煥)의 자결과 해산한 군인들의 의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전명운(田明雲), 장인환(張仁煥)의 스티븐슨저격거사와 안중근(安重根)의 거사를 기사로 기록해 두었다. 이렇게 동시대의 다른 한국사교과서와 달리 의병이나 계몽주의 단체의 기사도 소개하고 있어, 1908년 이후에 발행된 한국사 책 중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책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셋째, 독립협회를 거론하고 있지만 계몽활동이나 의미에 대한 설명은 없고 1898년 기사 중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로 형식을 바꾸어 종로에서 정치득실을 연설하였다.’란 기사와 ‘정부에서 보부상을 시켜 때려서 해산시키고 포박령을 행사하였다.’라고 서술하는 것으로 대신하여 저자의 독립협회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확인할 수는 없다.
넷째, 계몽운동단체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그 단체의 활동이나 성격 등에 관한 언급은 없이,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흥사단만을 언급하면서 거의 ‘조직되었다.’ 혹은 ‘해산되었다.’라고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다섯째,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기록 중 동학농민군을 ‘적’으로 명시하였던 점이나 당시의 정권에 저항하는 여타의 투쟁을 조선정부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어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던 것으로 추측된다.
여섯째, 활빈당을 언급하였지만 ‘경상도와 전라도 연해의 각 군에서 활빈당이 부민을 토색하였다.’는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활빈당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인 평가를 엿볼 수 있다.
일곱째,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은 아무런 언급이 없이 ‘왕후 민씨가 곤녕합에서 승하하셨다.’란 단 한 줄로 마무리하여 저자의 대일인식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여덟째, 고종시대 개항이후 열강과 조약을 체결한 내용,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빼앗아가는 과정을 편년체로 기사를 통해 서술하고 있지만 저자의 평가는 거의 담아내지 않고 있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사건의 전말과 내용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기사 속에서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독자에게 은밀하게 전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엿 볼 수 있다.
6. 의의와 평가
『국조사』는 그 내용으로 보아 당시의 상황에서 공공연하게 간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사본을 등사하여 비밀리에 교재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국한문으로 되어 있어 당시 일반적인 경향으로 초등 정도의 학교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08년 이후 발행된 한국사관련 책으로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의미있는 역사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교과서용으로서보다는 일반 국민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입장에서 조선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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