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등교과 동국사략(中等敎科 東國史略)』 은 현채가 학부 재직 시절인 1906년 발행한 『동국사략』을 1907년에 2판을 발행하면서 책 제목을 『중등교과 동국사략』으로 바꾸고 편찬한 중등용 한국사교과서이다. 총 4권 2책으로 구성되었으며 국한문으로 쓰여 있다. 1909년 통감부에 의해 발간이 금지되었다.
2. 저자
현채(玄采: 1856~1925)는 조선말기~일제시기에 활동한 관료⋅역사가⋅교육가이다. 자(字)는 백수(白受), 호(號)는 백당(白堂)이다. 대대로 역관(譯官)을 배출한 천녕(川寧) 현씨 집안에서 태어나 1873년 역과(譯科) 한학(漢學)에 급제한 후, 1892년 부산항 감리서 역학(譯學)과 번역관을 거쳐 1894년 7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에 재직하였다. 점차 외국어 및 신학문 습득의 필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1895년에는 관립외국어학교 부교관과 한성사범학교 부교관을 역임했다. 1899년 학부(學部) 편집국 의원으로 임명되어 1907년까지 학부 주사 및 보좌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업무는 주로 외국 서적을 번역하고 학교용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이었으리라 추측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다양한 외국 서적과 신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학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채는 많은 저ㆍ역술서를 간행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중등교과 동국사략(中等敎科東國史略)』, 『보통교과 동국역사(普通敎科東國歷史)』, 『만국사기(萬國史記)』,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로마사(羅馬史)』, 『유년필독(幼年必讀)』, 『동국사략(東國史略)』, 『동서양역사(東西洋歷史)』, 『대한지지(大韓地誌)』, 『최신고등소학이과서(最新高等小學理科書)』 등이 있다.
1900년에는 고전출판사업을 벌여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최남선, 김윤식, 김택영, 안종화 등 당시 지식인들과 폭 넓게 교류하였고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대한중앙학회(大韓中央學會)에서 활동하며 계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인 1915년 7월에는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임나일본부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설 등을 인정하는 글을 실어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 했다.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925년 2월 5일 사망했다.
3. 발행의도
이 책은 현채가 단독 저술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 역사가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조선사(朝鮮史)』(1892)와 『조선근세사(朝鮮近世史)』(1901)를 역술한 것이다. 그는 왜 일본인 역사가의 책을 역술했으며, 어떤 부분을 참고하고자 하였는가? 『중등교과 동국사략』 「자서(自序)」에 드러난 현채의 역술 의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사의 체제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서 이 책을 편술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우리의 많은 역사서는 일정한 체제가 없어 역사 인식에 혼란을 주었는데, 하야시가 쓴 『조선사』 7책을 보니 확실한 증거와 각 분야로 분류되어 너무나 훌륭하므로 비록 외국인의 책이지만 본보기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새로운 역사의식을 통해 오늘날 국권을 상실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이 책을 쓰는 것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는 오늘날 국권을 상실하게 된 원인을 민족의 의타심과 고루한 습성, 정치와 기강의 문란에서 찾았다.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깊은 자성이 필요하며 동시에 본국사를 익혀 새로운 역사의식을 육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때 ‘새로운’ 역사의식은 기존의 역사 서술로는 이루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해 이 책을 쓴다고 하여, 『중등교과 동국사략』이 교과용 도서를 목적으로 편찬되었음을 밝혔다. 현채는 역사의 중요성이란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예견하는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확한 역사의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역사라고 해서 과거에만 집착하지 말고 현재와 미래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의 본국사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제야말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추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교육을 제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한국사 읽고 세계사를 읽으면 견문을 넓힐 수 있고 정세를 인지하게 되어 이후 독립국의 면모를 갖출 것이다.’라고 한 구절은 그가 어린 학생들의 역사교육을 중시하고 그것이 역사의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음을 잘 보여준다.
4. 체제와 서술 방식
우선 살필 것은 이 책의 판본별 제목 변화이다. 현채는 학부 재직 시절인 1906년 『동국사략』 이름으로 초판본을 발행했는데 1907년에 2판을 발행하면서 책 제목을 『중등교과 동국사략』으로 바뀌었다. 현채는 ‘중등교과’라는 네 글자를 덧붙임으로써 교육용으로 사용하려던 애초의 의도를 더욱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초판 『동국사략』이 『중등교과 동국사략』으로 바뀐 시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1907년 2판부터라고 보는 시각이 유력해 보인다.
해제 대상은 1908년도 3판 『중등교과 동국사략』으로, 이를 중심으로 구성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국⋅한문 혼용체로 서술된 신사체(新史體) 통사(通史)이며 전통적 편년체(編年體)에서 탈피하였다는 점이다. 시대구분을 살펴보면 태고사⋅상고사⋅중고사⋅근세사로 구분하고 근세사를 다시 조선기(朝鮮記) 상⋅하로 나누었다. 이러한 시대구분 방식은 역사적으로 같은 계열을 갖는 내용을 하나로 묶어 한 시대의 특징으로 분류하여 서술함으로써, 역사를 인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특징을 갖는다. 역사를 단순히 시간적 연속성으로 인식하는 전통 사서와는 다른 서술 방식이다.
다음으로 역사의 폭을 왕조 중심에서 민족의 다양한 활동으로 확대하였다. 이에 따라 역사 분야를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산업, 풍속 등으로 보다 다양하게 서술하였다. 이러한 분류 방식 또한 전통사서가 중시하는 유교⋅왕조⋅인물 중심의 서술 범위와는 다른 서술을 시도한 것이다. 해당 각 권 가장 뒤에는 지역별 특산물이나 역대 왕도표, 역대 일람표 등을 정리하여 수록했다. 교과용이라는 취지를 살려 학생들의 편의를 위하고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 대중성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구성상 큰 특징은 당대사를 적극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채는 조선기(하) 후반부에서 조⋅일수호조규, 임오군란, 갑신정변, 거문도사건, 동학농민전쟁 등 당시 주요한 사건을 망라하며 청일전쟁으로 끝맺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부록의 형식으로 ‘갑오 후 십 년 기사’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청일전쟁 이후부터, 을미사변, 아관파천, 독립협회, 영⋅일동맹, 러일전쟁 발발까지를 부기하였다. 당시로서는 최신 현대사인 셈인데, 하야시는 ‘갑오 이후’를 다루지 않았고 전통적 역사서들은 당대 이전의 왕조만을 다루는 것을 원칙으로 여겨 주로 고려 시대까지 서술하였음을 감안하면 주목할 부분이다.
이처럼 당대사를 적극적으로 서술한 것은 현채가 하야시의 책을 단순히 번역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역사관을 첨가하였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이자 전통적 역사서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역사의식을 육성하려는 나름의 의지를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현채는 하야시의 책을 통해 당대사가 근대 역사학에서 통사 체계를 갖추는데 핵심 요소라고 믿게 되었고, 그 결과 『중등교과 동국사략』도 당대사를 적극 서술하고자 한 것이다.
5. 내용과 서술의 특징
이하에서 하야시의 서술 및 전통 사서와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내용과 서술상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야시가 단군신화를 부정하고 위만조선과 한사군을 강조한 것에 비해, 현채는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면서 위만을 의도적으로 간략하게 처리했다. 이 때 단군의 위치는 기자조선 보다 우위에 설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전통적 역사서들이 기자조선을 중시했던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둘째, 기존의 전통 역사서들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서술된 것에 비해 『중등교과 동국사략』은 중국과의 관계를 축소하고 일본과의 관계사를 보다 비중 있게 서술하였다. 이것은 하야시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지만,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역사적 주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급무라고 생각했던 현채가 의도적으로 서술한 결과일 수 있다. 하야시가 고대 삼국(三國)을 일본의 속국으로 묘사한 데 비하여, 현채는 일본 고대 문화를 삼국이 전래해 준 결과로 서술한 차이는 하야시의 서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측면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셋째, 기존의 사서들이 담아 내지 못했던 내용을 발굴하여 풍부하게 담아냈다는 점이다. 풍화⋅자연⋅생활⋅기질⋅교법⋅문학⋅기예⋅산업⋅풍속 등 다양한 분류를 통해 다른 역사서에서는 도외시한 서민들의 생활상을 다양하게 서술했다. 중국적 특성과 유교⋅왕도 분야를 중시했던 전통 역사서와 다른 지점으로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려던 현채의 노력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넷째, 외침을 당했을 때 우리의 투쟁 정신을 강조하였다. 강감찬, 서희, 이순신 등의 전투 과정에 대하여 자세히 상술한 점은 민족의 주체성과 무력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임진왜란기 의병의 활동을 강조한 서술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하야시가 임진왜란을 거의 일본의 승리처럼 묘사한 것과는 차이가 난다.
다섯째, 당대사를 적극 서술하여 당시 현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청일전쟁의 결과 한국의 독립이 확립되었으나 오히려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었다고 하거나, 을미사변은 일본이 스스로 일대 오욕을 취한 것이며 한국의 원한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 점, 러⋅일간 알력관계를 자세히 서술한 점 등은 현채의 역사관을 재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여섯째, 동시에 이 책은 전통적 유교 사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남성들은 모두 예외 없이 ‘왕(王)’이라고 지칭하면서도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주(主)’로 표현한 것이 대표적이다. 왕조시대에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한학을 공부한 많은 지식인들이 전통적 유교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근대적 가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표출된 과도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곱째, 하야시의 책을 역술하는 과정에서 식민사관에 동조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한계이다. 하야시는 임나일본부설을 매우 강조했다. 이에 비해 현채는 임나를 대가야의 별칭이었다는 정도의 서술만 하였으나 ‘국력이 미약하여 신라⋅백제⋅일본의 견제를 받았다.’고 애매하게 끝을 맺었고, 신공왕후의 신라 침공설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탐라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거나 신라와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는 서술 또한 하야시의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여덟째, 식민사관이라는 관점에서 살펴야 할 또 하나의 문제점은 역사 변동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사상에 있다 하겠다. 현채는 고구려⋅신라의 멸망이나 몽고의 고려침입, 임진왜란 등 국가 쇠퇴의 원인을 외적 요인이 아니라 국내 정치의 문란과 내분, 방비의 소홀 등 내적 요인에서 찾았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결국 외적의 침입도 근원적으로는 내재적인 요인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실제로 현채는 국권 상실의 원인을 일본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의타적이고 무지한 우리 민족 스스로의 문제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외적 요인을 배제한 이러한 서술은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시키는 논거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사회진화론적 역사관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6. 의의와 평가
『중등교과 동국사략』은 발행 당시 이미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현채의 「자서」를 이틀간 연속으로 소개했고, 식자층과 청소년 사이에 광범위하게 읽히면서 책의 보급소는 초판 발행 당시에는 한 곳뿐이었다가, 3판 발행 때에는 13곳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과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비록 현채의 이름과 서명을 적시하지 않았지만 ‘각 학교 교과용의 역사’, ‘최근 신사체로 역사를 만들었다는 1, 2종의 책’ 등으로 언급하며 현채가 고대사를 종속적으로 서술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신채호의 평가는 분명 부정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현채의 책이 그만큼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큰 파장을 던졌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중등교과 동국사략』의 파급력은 통감부에게도 미쳤다. 일본인 하야시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통감부는 이 책이 하야시의 책과는 분명 다른 부분이 있고, 그 다른 부분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며 인기 또한 높다는 점에 주목했다. 결국 통감부는 ‘치안방해’를 이유로 1909년 5월 5일 「內部告示27号」에 근거해 현채의 『중등교과 동국사략』에 대하여 발매 및 반포를 금지시켰다. 이로써 이 책은 금서가 되었으나, 1924년 『동사제강(東史提綱)』과 1928년 『반만년조선역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간되기도 했다.
오늘날 『중등교과 동국사략』은 편년체를 벗어나 ‘신사체’를 시도한 최초의 한국사 교과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학사적⋅교육사적 자료이다.
그러나 『동국사략』은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본 사학자 하야시의 역사서를 역술하는 과정에서 식민사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서술상의 많은 오류도 발견된다. 객관적 사실 설명이 잘못된 부분도 있고, 특히 연도 표기에서 상당수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당시 교과서가 근대적 체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미숙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이 책은 오랜 시간 상반된 평가를 받아왔다. 긍정적 입장은 이 교과서가 근대 역사 서술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렇지만 부정적 입장에서는 이 교과서를 식민사관의 시초로 보고 있다. 한편 체제 면에서는 근대적 방법을 도입했고 고대사 부분에서 일부 민족적 시각을 반영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식민사학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는 중도적 입장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구한말 사회진화론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근대 교육과 교과서 실태를 가늠하기에 매우 유효할 뿐만 아니라, 근대 역사학과 식민사학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살펴야 할 책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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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信澈, 「대한제국기 역사교과서 편찬과 근대역사학-『동국사략』(현채)의 당대사 서술을 통한 ‘국민 만들기’를 중심으로-」, 『歷史敎育』126, 2013
주진오, 「제3장 김택영⋅현채」, 조동걸⋅한영우⋅박찬승 엮음,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하), 창작과 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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