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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국, 새로운 나라 조선이 세워지다

<건원릉(경기 구리시)>   
문화재청

“내가 죽으면 무덤을 고향의 억새풀로 덮어주시오.”

“예. 뜻을 받들겠습니다.”

1408년(태종 8)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죽음을 맞이했어요. 그의 무덤은 건원릉이라고 부르는데요. 조선 시대 다른 왕의 봉분처럼 잔디가 아니라 동북지역의 억새풀로 덮여 있어요. 그는 고려의 변방인 동북지역(오늘날 함경도 일대)출신이었습니다. 변방의 장수 이성계는 어떻게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을까요?

이성계, 고려말 장수로 이름을 떨치다

이성계는 원래 개경에 살던 귀족이 아니었어요. 그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조상들이 전라도 전주에서 동북지역의 의주(현재의 함경도 지방)로 터전을 옮겼다고 해요. 이성계의 집안이 개경에 와서 살기 시작한 것은 공민왕 때에요. 공민왕은 원이 차지했던 쌍성총관부를 되찾으려 했어요. 이때 쌍성총관부 지역의 실력자였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원의 세력을 쫓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어요.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벼슬을 내리고 개경에 와서 살 수 있도록 집을 주었다고 해요.

이성계는 장수로 활약하며 점점 이름을 떨쳤어요. 1361년(고려 공민왕 10)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해 수도인 개경을 빼앗기는 일이 생겼어요. 당시 공민왕은 급하게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지요. 이때 이성계는 개경을 되찾는 데 힘을 보탰어요. 또 원의 기황후가 자기 오빠 기철이 죽임을 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고려에 군대를 보내자 이를 물리치기도 했어요.

이성계의 활약은 우왕 때도 계속되었어요. 우왕 때는 왜구가 고려를 자주 침략하며 괴롭혔어요. 이성계는 고려를 침략한 왜구를 여러 차례 물리쳤어요. 황산대첩은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싸움이었어요. 이성계는 우왕 때 최영과 함께 고려를 지키는 든든한 장수였어요.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신진 사대부가 성장하다

이성계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던 무렵 고려의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권문세족이었어요. 권문세족은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기 시작하면서 성장했어요. 그들 중에는 고려 전기부터 권력을 갖고 있던 가문의 사람도 있지만, 몽골어를 잘해서 관리가 되거나 원과 관련된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권문세족은 시험을 보지 않고 음서*를 통해 높은 벼슬을 차지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권력으로 다른 사람의 땅과 노비를 마음대로 빼앗아 농장을 만들기도 했어요. 이 과정에서 나라에 들어가야 할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게 되었어요.
* 음서 : 고려 시대에 5품 이상의 관직 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운 인물의 후예, 혹은 왕족의 후예가 과거(科擧)를 거치지 않고 관리로 임용하는 제도

공민왕 때는 권문세족을 비판하는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신진 사대부라고 불리는 이들이었어요. 대체로 성리학을 공부했고, 음서보다는 과거 시험에 합격한 뒤에 관리가 된 이들이 많았답니다.

고려말 대표적인 신진 사대부로는 정몽주와 정도전이 있어요. 두 사람은 모두 권문세족이 권력을 잡고 있던 고려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입장이 크게 달랐어요.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유지한 채 개혁하려 했고,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지요.

<이성계를 만나러 간 정도전>   

명, 고려에 땅을 내놓으라 하다

공민왕 시기 중국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어요. 한족 출신의 주원장이 남경에서 새로운 나라 명을 세웠던 거예요. 그렇다면 몽골이 세운 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북쪽으로 쫓겨 가 명과 대립하고 있었어요.

고려는 명이 세워지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어요. 그런데 명은 고려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했어요. 원의 땅은 모두 자기 것이라는 이유로, 공민왕 때 고려가 원으로부터 되찾은 철령 이북의 땅을 자신들이 관리하겠다는 것이었죠.

  

당시 고려는 우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때였어요. 그때 신하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최영이었어요. 명이 철령 이북 땅을 관리한다는 소식을 들은 최영은 다른 신하들과 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어떻게 할지 의논했어요.

“철령 이북 땅은 원래 고려 땅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원에 빼앗긴 걸 다시 찾아왔는데 명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회의에서 신하들이 이 땅을 명에게 줄 수 없다고 하자 우왕과 최영은 명에 사신을 보내 그들의 요구를 철회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리고 이 기회에 요동 지방을 공격해서 우리의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자 했지요. 하지만 반대한 사람도 있었어요. 바로 이성계였어요. 이성계는 다음의 4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 정벌에 반대했어요.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슬러 공격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둘째, 농사가 바쁜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셋째,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바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넷째,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 놓은 아교가 녹고 군인이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있습니다.”

이성계가 강력히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요동 공격을 단행했어요. 우왕은 최영을 요동 정벌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성계와 조민수를 그다음 지휘관으로 임명했어요. 왕의 명령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4월 이성계와 조민수는 군대를 이끌고 요동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한편, 총사령관 최영은 요동으로 가지 않고 우왕의 곁에 남게 되었어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리다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은 평양을 거쳐 요동으로 진격했어요. 마지막 국경인 압록강을 건너던 중 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라는 섬에 이르렀어요. 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려고 했지만, 장마에 강물이 불어나 쉽게 건너가지 못했어요. 위화도에 머물면서 군사들은 점점 지쳐갔어요.

이성계는 여러 차례 고려 조정에 사람을 보내 비가 많이 와 압록강을 건널 수 없으니 군대를 철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의견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고민 끝에 이성계는 군대를 돌리기로 했어요.

우리는 1388년에 발생한 이 사건을 우리는 위화도 회군이라 불러요. 그때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나오자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위화도가 잠겼다고 해요. 그만큼 군대가 위험한 상황이었던 거지요. 이성계는 최영이 무리하게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고 주장했지요. 개경에 도착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을 귀양보내고 우왕도 폐위시켰어요.

다음 왕위는 우왕의 아들이었던 창왕이 이어받았어요. 하지만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신진 사대부는 우왕이 공민왕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했지요. 결국 창왕은 폐위되었고, 우왕과 함께 귀양을 떠났어요. 왕위는 왕실의 먼 친척이 잇게 되었는데,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에요.

<위화도 회군>   

창왕과 공양왕 시기에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는 고려의 토지 제도를 바꾸었어요. 당시 권문세족들이 불법적으로 많은 땅을 소유해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권문세족의 땅을 뺏어서 그들의 힘을 줄일 필요도 있었어요. 그리하여 관리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땅문서를 거두어들여 불태워 버리고 토지 제도를 바꾸었어요. 이 제도를 과전법이라 해요.

1391년(고려 공양왕 2) 과전법이 시행되면서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는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을 관리들에게 다시 나누어주었지요. 그런데 고려 시대 전시과와 달리 전국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주지 않고, 경기 지역의 수조권만 나누어 주었어요. 나머지 토지의 세금은 국가에서 직접 걷으니 국가 재정이 늘어나게 되었고요. 세금의 양이 1/10로 줄어 농민의 생활도 안정되었지요. 그리고 관리들은 정부가 직접 거둔 세금을 봉급으로 받게 되었어요.

새로운 나라 조선이 세워지다

1392년 이성계는 신진 사대부의 지지를 받으면서 왕위에 올랐어요. 그 과정에서 고려 왕조를 지키려는 정몽주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했어요. 왕이 된 후 이성계는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어요.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어요.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는 정책을 추진했으며, 관리의 집안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더 중요시하였어요.

그런데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나라를 다스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아요. 1398년 이성계는 왕의 자리를 둘째 아들인 이방과에게 물려주었어요. 왕자의 난 때문이지요. 아들들이 서로 왕위를 이어받으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거예요.

이성계는 이방원이 조선의 제3대 왕으로 즉위한지 8년 후에 죽음을 맞이했어요. 그러면서 자기의 무덤을 함경도 지방의 억새풀로 덮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거예요. 고려말 혼란기 나라 안팎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새롭게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이렇게 고향의 억새풀 아래서 잠들게 되었어요. 그리고 조선은 아들 태종과 손자 세종이 세운 기틀 위에서 이후 약 500년 동안 이어지게 되었어요.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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