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초등역사
  • 고대
  • 성왕
  • 성왕, 백제의 부활을 꿈꾸다

성왕, 백제의 부활을 꿈꾸다

<백제문화단지(충남 부여군)>   

“아니 우리 대왕께서 도읍을 또 옮기신다고 하는군!”

“이번 천도는 한성에서 여기 웅진으로 온 것과는 다르지.”

“그럼, 예전은 도망쳐 온 것이지만 이번 천도는 우리 백제가 더욱 강성해져서 옮기는 것이지 않은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첫 도읍인 한성을 잃은 지 50여 년이 지나 성왕은 백제의 왕이 되었어요. 성왕이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려고 하자 일부 귀족들이 반대를 했어요.

또 새로 도읍을 만드는 일은 막대한 돈과 노동력이 들어가는 무척 힘든 일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왕은 왜 도읍을 옮기려고 했을까요?

무령왕, 백제 부활의 토대를 쌓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위례성)을 빼앗기고 도읍마저 웅진(공주)으로 급히 옮겨야 했어요. 한성백제가 멸망할 때 무령왕은 열네 살이었어요. 무령왕은 백제가 전쟁에 패하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경험을 하였어요. 웅진에서 왕권 강화에 힘쓰던 동성왕이 반대 귀족 세력에 의해 살해되자 40세의 무령왕이 새로운 백제의 왕이 되었어요.

왕이 된 무령왕은 ‘강한 백제를 만들어 고구려에게 꼭 복수를 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무령왕은 귀족의 힘이 너무 커진 반면 왕권은 약해졌다고 생각해 귀족들의 힘을 누르는 정책을 취했어요. 그리고 지방에도 귀족들 대신 왕족을 파견해 왕권을 강화했어요.

무령왕은 고구려와의 전쟁과 자연재해로 집을 잃고 거리를 떠돌던 많은 백성들에게 나라의 곳간을 열어 도움을 주었어요. 그리고 백성들이 정착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썼지요. 황무지를 개간하고 제방과 저수지도 늘려 쌓았죠. 많은 백성들이 정착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농업 생산량도 많이 늘어났어요.

국가의 경제력이 회복되자 무령왕은 이를 바탕으로 강한 군대를 만들어 고구려와 맞서 싸웠어요. 잘 준비된 백제군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였지요. 잃어버렸던 백제의 영토도 많이 되찾을 수 있었어요.

무령왕은 중국과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이전 시기의 강한 백제를 만들기 위한 토대를 닦았어요.

<무령왕릉
왕릉에 사용한 무덤 양식과 벽돌은 중국의 기술을 도입해 만들었고, 관은 일본에서 가져온 금송으로 만들었다. >   

성왕, 사비를 건설하다

백제 부활을 위해 애쓰던 무령왕이 백제를 다스린 지 22년 만에 생을 마감하자, 그의 아들인 성왕이 백제의 왕이 되었어요. 성왕은 지혜가 많고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성왕이 왕이 되었을 무렵 백제는 아버지 무령왕의 노력으로 이전 수준에 이를 정도로 나라의 힘이 커진 상태였어요. 무령왕 때에도 이미 스스로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중국에 내세울 정도였지요. 성왕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서 싸웠어요. 또한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안정시키고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을 다했어요.

성왕이 왕이 되고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요. 성왕이 신하들에게 물었어요.

“고구려의 침략으로 백제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 같았는데, 이제야 옛 명성을 되찾은 것 같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폐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백제의 힘은 커졌는데 도읍이 좁아 나라가 더욱 강성해지는 것을 막고 있소. 이 기회에 도읍을 옮기면 어떻겠소?”

백제의 성장으로 자신감에 찬 성왕은 사비천도를 추진하였어요.

고구려에게 한성(위례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도읍을 급하게 옮겼지만 웅진은 도읍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다른 곳과 교통하기에 불편했어요. 강의 깊이도 낮아 큰 배가 드나들기도 어려웠지요. 좁은 도읍은 늘어나는 인구와 물자를 감당하기에도 벅찼어요.

“폐하! 폐하의 뜻은 맞으나 도읍을 옮기는 것은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일과 같습니다.”

“맞습니다. 도읍을 옮길 때 생길 백성들의 고통을 어찌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폐하! 생각을 물려주시기를 간청 드리옵니다.”

웅진을 기반으로 한 일부 귀족 세력은 도읍을 옮긴다는 성왕의 생각에 반대를 하고 나섰어요. 그러나 웅진을 벗어나야만 백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성왕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요. 성왕은 오랜 기간 신하들을 설득하며 천도를 준비했어요.

<사비성 복원 모습(백제문화단지)>   

성왕이 생각한 도읍지는 사비(부여)였어요.

사비는 백강이 휘감아 흐르는 곳으로 방어에 유리하고,
강물이 깊어 배가 드나들기에도 적당한 곳이다.

사비는 옆으로 흐르는 백강과 강 옆으로 펼쳐진 넓은 벌판이 있어 도읍으로 삼기에 알맞은 곳이었어요. 그러나 땅의 대부분이 황무지와 습지였고, 또 산이 낮아 적을 막기에 불리했어요.

성왕은 도읍 주변으로 긴 성을 쌓아 이 문제를 해결하였어요. 도읍을 방어하기 위한 이 성은 옛 풍납토성을 쌓을 때와 마찬가지로 흙 위에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깔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다지는 방식으로 쌓았어요. 흙을 이용해 성을 쌓아 건축 시간도 크게 단축할 수 있었지요.

<사비 수도시설(국립부여박물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 나무 수조로 보내기 위해 기와로 조립해서 만든 수도관 >   

성왕은 성 안쪽을 바둑판처럼 나누고, 도로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상수도와 도로 양쪽으로는 배수시설까지 만들었어요.

백제의 미래를 위해 천도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당장 천도를 시행하라!

오랜 준비와 공사 끝에 538년 성왕은 드디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었어요. 이것은 백제가 부여를 계승한 나라임을 널리 알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에요.

성왕, 백제의 옛 영토를 회복하다

사비성은 백강에 의지해 만들었어요. 백강은 외적을 막는 역할도 했지만,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어요. 성왕은 이런 백강의 특징을 이용해 사비성 강가에 항구를 만들었어요. 이 항구는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서역의 먼 나라들과도 교류하는 국제항구가 되었어요.

성왕은 이 국제항구를 중심으로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에는 불교를 비롯한 백제의 발전된 학문과 문화를 전해주었어요. 성왕의 노력으로 백제와 일본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어요.

사비천도와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백제 제2의 전성기를 연 성왕은 백제의 오랜 소원인 한강 유역을 되찾는 일을 시작했어요. 이를 위해 동맹을 맺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지요. 백제군은 고구려와 싸우며 북으로 나아갔어요. 그리고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의 땅을 대부분 되찾을 수 있었어요. 백제는 한성(위례성)을 포함한 한강 하류를 차지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각각 차지하게 되었지요.

성왕의 아쉬운 죽음

한강 유역을 되찾고 백제의 부활을 세상에 널리 알린 성왕의 운명은 여기까지였어요. 고구려와 함께 맞서던 신라 진흥왕이 중국과의 뱃길을 열기 위해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성왕은 신라 진흥왕의 배신에 분노하며 군대를 일으켜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했어요.

그런데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어처구니없이 신라군에게 붙잡혀 죽고 말았어요. 성왕이 죽자 기가 꺾인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지요.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 제2의 전성기를 연 성왕이 허무하게 죽지 않았다면 백제는 어떤 나라가 되었을까요? 신라 진흥왕과의 경쟁을 이겨내고 더욱 번성한 백제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백제의 배(백제문화단지)>   

[집필자] 신범식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