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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 통일 신라의 기틀을 닦다

<감은사지(경북 경주시)>   

“문무대왕께서 완성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드디어 다 지어졌구나. 아버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에서 ‘감은사’라 하리라.”

“기백이 넘치는 두 탑이 훌륭해 보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신라의 발전을 위해 더욱 힘쓸 것이오.”

감은사는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이 짓기 시작했어요.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부처의 힘에 의지해 막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그는 감은사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된 후에야 다 지어졌어요.

감은사를 완성한 신라의 왕은 누구일까요? 그는 신라의 발전을 위해 어떤 일을 했을까요?

진골 귀족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다

감은사를 완성한 왕은 신문왕이에요.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첫째 아들이지요. 그는 681년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신라를 더욱 튼튼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했어요.

하지만 왕이 된 첫해 큰 어려움이 닥쳤지요. 그의 장인인 진골 귀족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켰거든요.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신문왕의 왕비가 김흠돌의 딸이었는데, 왕의 후계를 이을 아들을 못 낳았대요.

게다가 왕은 가장 높은 관직인 상대등 자리에 김흠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앉혔지요. 이런 상황에서 김흠돌이 권력에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지 추측해 볼 수 있어요.

반란은 곧바로 진압되었어요. 반란에 관련된 많은 진골 귀족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어요. 조금이라도 죄를 지었거나 국왕에게 도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면 가차 없이 벌을 내렸어요. 신문왕은 반란이 진압된 후 김흠돌의 딸이자 자신의 부인인 왕비를 궁에서 쫓아내기까지 했어요.

신문왕이 이렇듯 진골 귀족 세력을 과감하게 처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통일을 이룬 신라가 권력 다툼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어요.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하여 국가를 다스리려고 했지요.

만파식적 이야기에 담긴 바람

문무왕은 통일을 이룬 후 걱정이 많았어요. 특히 동해로 왜구가 쳐들어올까 늘 고민이었지요. 그래서 죽으면서 유언까지 남겼어요. 자신을 동해 앞바다에 묻어주면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요. 그 유언에 따라 경주에서 가까운 감포 앞바다 큰 바위 부근에 그의 유골을 뿌렸다고 해요. 그 무덤이 바로 대왕암이지요. 대왕암 가까운 곳에는 감은사라는 절을 세웠어요. 그리고 만파식적이라는 신비한 대나무 피리를 얻었죠.

<대왕암>   
문화재청

『삼국유사』에는 이런 만파식적 이야기가 전해요. 어느 날 동해에 있는 작은 산이 감은사 쪽으로 다가왔대요. 작은 산은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지요.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신문왕은 기이하게 생각해서 점을 치도록 했어요. 신하는 점을 치고 나서 아뢰었어요.

“문무왕과 신이 된 김유신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려주신다고 하십니다. 해변으로 나가면 큰 보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신하의 이야기에 신문왕은 배를 타고 작은 산으로 갔어요. 산에 다가가니 용 한 마리가 나타났어요. 용은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더니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바쳤어요. 그리고 신문왕은 작은 산에 있는 대나무가 합쳐졌다 다시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서 용에게 물었어요. 용은 왕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이 대나무는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물건입니다. 이는 왕이 소리로 나라를 다스릴 좋은 징조이니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온 세상이 평화로울 것입니다.”

신문왕은 궁으로 돌아와 피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피리를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날이 개었죠. 이후 왕은 이 피리의 이름을 ‘만파식적’이라고 하고 나라의 보물로 삼았어요. 만파식적이란 ‘세상의 온갖 파란(시련)을 그치게 하는 피리’라는 뜻이랍니다.

산이 움직이고 피리를 불면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를 오롯이 믿을 수는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신문왕 때 신라 왕실이 정치적인 불안을 떨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은 소원이 얼마나 컸는지 추정해 볼 수 있는 기록으로 봐야겠지요?

  

전국을 9주로 나누고, 5소경을 설치하다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가려면 훌륭한 인재들이 필요해요. 인재를 길러내려면 교육기관을 잘 갖추어져야 하고요. 신문왕은 유학의 질서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치했어요. 국학에서는 유학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했지요.

정부 기구와 지방제도도 잘 갖추어져야 하지요. 특히 삼국 통일 이후 넓어진 땅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중요했어요. 신라, 옛 고구려, 옛 백제 지역을 3개 주씩 나누었지요. 그러면 전국에는 모두 9개 주가 되는 거예요. 주 밑에는 군과 현을 두었고, 일부 중요한 지역에는 지방관을 보내 다스렸어요.

도읍인 금성(지금의 경주)이 한반도의 중심이 아닌 구석에 치우친 것도 걱정이었어요. 그래서 도읍을 달구벌(지금의 대구)로 옮기려고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어요. 대신 주요 지역에 작은 도읍을 설치했지요. 금관경(지금의 김해), 서원경(지금의 청주) 남원경(지금의 남원), 중원경(지금의 충주)을 두어 5소경 체제를 만들고 지방 통치를 강화했어요.

지방 통치 체제를 정비한 후에는 군대 조직을 새롭게 편성하고 군사권을 틀어쥐었어요. 군사 조직이 튼튼해야 진골 귀족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나라도 지킬 수 있었지요. 그래서 중앙군인 9서당과 지방군인 10정을 조직했어요. 중앙군인 9서당에는 신라인뿐만 아니라 옛 고구려인, 옛 백제인들과 말갈인들도 포함했어요. 지방군은 9개 주에 각각 1정을 두고, 국경 지역인 한주에는 2정을 두어 10정으로 편성했어요.

<9주 5소경>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다

신라의 진골 귀족들은 녹읍을 소유하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지요. 녹읍은 귀족 관리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토지에요. 그 땅에 사는 주민들로부터 토지에 대한 세금을 걷어가고 노동력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지요. 실제 그 땅은 진골 귀족이 직접 다스린다고 봐도 될 정도였어요.

신문왕은 진골 귀족들의 힘이 강력해지는 점을 경계했어요. 귀족들은 녹읍을 기반으로 엄청나게 부유해졌어요. 게다가 녹읍으로 받은 땅의 백성들을 군사로 양성할 수도 있으니, 왕은 무척 신경이 쓰였어요. 그래서 신문왕은 토지 제도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어요.

“문무 관료들에게 토지를 차등 있게 주도록 하라.”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조를 차등 있게 주고 이를 법으로 삼아라.”

신문왕은 두 차례에 걸쳐 토지 제도를 개혁했어요. 먼저 신하들에게 녹읍 대신 관료전을 주었어요. 그리고 2년 뒤에는 녹읍을 폐지하고, 관리들에게 토지 세금만 거둘 수 있는 권리(조)만 주었지요(689년). 더는 노동력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없게 되었어요. 진골 귀족들의 권력은 점차 약해지고 왕권이 더욱 강해졌어요.

  

삼국 통일 이후 신문왕은 국가를 잘 운영하려고 많은 일을 했어요. 왕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10여 년밖에 안 되지만, 정치적인 혼란을 바로 잡고 통일 신라의 기틀을 닦기 위해 토지제도, 지방제도, 교육제도를 모두 손봤으니 말이에요. 덕분에 이후 왕들은 그가 다진 기반 위에 통일 신라의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답니다. 신문왕이 왜 통일 신라의 기틀을 닦은 왕으로 불리는지 잘 알게 되었지요?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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