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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주장하다

<대화궁터(국사편찬위원회)>   

“서경(평양)은 최고의 명당자리입니다. 이곳에 궁궐을 세우고 도읍을 옮기시면 세상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묘청의 말에 고려 인종은 고개를 끄덕였지요.

묘청은 누구일까요? 그는 왜 고려의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자고 했을까요? 인종은 왜 묘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까요?

금의 압박에 시달리고, 개경 궁궐이 불타다

묘청은 서경(평양) 출신의 승려에요. 그가 살았던 시기 고려는 안팎으로 몹시 혼란스러웠어요. 안으로 권력을 장악한 문벌 귀족들이 왕권을 위협했지요. 밖으로는 요를 멸망시키고 송을 남으로 밀어낸 금이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고요.

강력해진 금은 자신들을 황제로 섬기고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압력을 가했어요. 이 문제를 놓고 신하들 간에 의견이 나뉘었지요.

“폐하,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오랑캐인 여진이 세운 금나라를 어찌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사옵니다. 이전에 금은 작은 나라여서 고려와 요를 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요를 멸망시키고, 세력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최고의 권력자였던 이자겸은 금나라를 섬기자고 했어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면 금과 어긋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지요.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에요. 그는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딸들을 두 대에 걸쳐 왕들과 혼인시켰어요. 인종도 이모와 혼인했지요.

인종은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이자겸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 제거하려 했어요. 그러자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어요(1126년). 궁궐을 불태우고 왕을 가두기도 했어요. 왕은 이자겸 세력의 내분을 이용해 가까스로 난을 진압했지요.

묘청,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건의하다

이자겸을 제거한 인종은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어요.

“고려의 자존심도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의 마음도 모을 수 없고, 새롭게 변화할 계기가 필요한데……”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그는 서경으로 갔어요. 서경은 옛 고구려의 도읍으로 ,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중요시하며 북진 정책 기지로 삼았던 곳이지요. 이후 왕들은 서경을 중시하라는 태조의 가르침에 따라 정례적으로 방문하였지요. 당시 서경 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술법을 펼친 묘청 등이 널리 알려졌어요. 그를 인종에게 추천한 사람은 서경 출신인 정지상이에요.

묘청 일파는 인종에게 도읍을 옮기고, 새로운 정치를 펼칠 것을 주장했어요.

“개경(개성)은 이미 기운이 땅에 떨어지고 궁궐도 불타 남은 것이 없습니다. 서경은 왕의 기운이 드높으니 마땅히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셔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금이 공물을 바치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주변의 서른여섯 나라가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입니다.”

묘청 일파는 자신들과 뜻을 함께 할 신하들을 모았어요.

“우리가 왕에게 도읍을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합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공신이 되어 떵떵거리며 살 수 있고, 우리의 자손들도 복되게 살 수 있을 것이오.”

묘청을 지지하는 신하들은 왕에게 글을 올렸어요.

“묘청은 성인입니다. 그가 한 말은 무엇이든 받아들여 나랏일을 해야 나라가 잘 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은 이 의견에 동의했고, 왕의 마음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왕은 풍수지리와 불교, 도교를 공부한 묘청의 뜻을 받아들이려고 했어요. 서경 세력과 손잡고 새로운 정치를 펼칠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묘청 등 서경 세력에 맞서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김부식이에요. 유학을 공부해 관리가 된 사람이었지요.

<해동지도 평양부 지도(1750년대 초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묘청, 반란을 일으키다

인종은 묘청의 말대로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도읍을 옮길 준비를 해나갔어요. 묘청은 왕을 황제라 부르고,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주장도 했지요.

그런데 서경은 정말 기운이 좋은 곳이었을까요? 서경의 중흥사 탑이 불타는가 하면, 1132년에는 인종이 서경으로 가던 중에는 비바람이 치고 온 세상이 깜깜해지기도 했어요. 진눈깨비가 내리고 갑자기 추워져 사람들이 얼어 죽는 일도 벌어졌고요. 그러자 사람들은 묘청의 탓으로 돌렸어요.

이를 모면하기 위해 묘청은 꾀를 냈어요. 이후 대동강 물이 오색 빛으로 반짝거리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아니 저기 보시오. 용이 침을 토해 강물이 오색으로 빛나니 이는 분명 복되고 좋은 일이 생길 징조입니다.”

이 일은 서경이 기운이 좋은 곳임을 알리기 위해 묘청이 꾸민 일이었어요. 떡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기름을 넣은 뒤 대동강 바닥에 담가두어 기름이 둥둥 떠올라 오색으로 반짝이게 한 거에요.

하지만 어떤 사람이 기름이 물에 뜨면 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고 귀띔해 주었어요. 그러자 조사관은 수영 잘 하는 사람을 보내 대동강을 살피게 했어요. 그가 헤엄쳐 강바닥에 들어가 보니 큰 떡이 있었고, 묘청이 꾸민 일임이 들통 났지요.

묘청을 반대하던 신하들은 왕에게 묘청의 말을 따르면 안 된다고 아우성이었어요. 간사한 꾀를 부려 왕의 귀를 어지럽히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백성들을 속이고 있다고 반발했지요. 장차 두려운 일이 닥칠 수도 있으니 묘청 등을 저잣거리에서 처형해 재앙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국왕은 답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김부식은 인종의 서경 행차를 강하게 막았어요.

“서경 궁궐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그곳으로 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납니다. 가을 곡식도 거두지 않았는데 행차를 하면 벼를 짓밟게 되어 농사를 방해하는 일이며,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옵니다.”

결국 왕은 신하들이 강력하게 반대하자 서경 행차를 중단했고, 점차 도읍을 옮기는 일도 흐지부지 되었지요. 그러자 묘청 세력은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어요. 반란을 일으켰지요(1135년). 임금의 명령을 위조해 서경 관리들을 잡아 가두고, 서경에 있던 개경 사람들도 모두 잡아 가두었어요. 군대를 보내 개경과 서경을 오가는 길목도 막아버렸지요.

묘청과 조광 등은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대위국, 연호를 천개라고 했어요. 군대를 모으고 관리도 새로 뽑았고요.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진격하려 했지요.

<대위국을 세운 묘청>   

묘청 세력, 김부식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토벌되다

묘청이 서경에서 난을 일으키고 서북 지방 일대를 장악하며 세력을 떨쳤어요. 이 소식은 인종에게 전해졌지요. 인종과 주요 관리들이 모여 의논 한 뒤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어요. 관리들을 묘청에게 보내 설득하려고도 했지요.

“임금께서는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셔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큰 재앙이 일어날 것입니다.”

묘청은 마음을 바꾸지 않고, 이런 편지만을 왕에게 전했어요. 그리고 왕이 서경으로 온다면 전쟁을 중지하겠다고 했어요. 신하들은 감히 왕을 부른다며 분노했어요. 결국 왕은 군대를 출병시키기로 했어요. 김부식이 묘청 세력을 토벌하러 떠나려 하자 인종은 당부했어요.

“서경 사람들도 모두 내 백성이요. 우두머리만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너무 많이 죽이지는 마시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김부식은 인종에게 약속하고 길을 떠났어요. 서경에 도착해 묘청 세력을 토벌하기 시작했지만, 쉽사리 제압할 수 없었어요. 맞서는 세력들이 만만치 않았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바뀌었지요. 서경 지역 백성들이 묘청의 군대가 자신들을 못살게 굴자 등을 돌렸어요. 묘청 일파 안에서도 갈등이 생겨 조광이 묘청을 배신했지요. 조광은 이 싸움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거죠.

조광은 윤첨을 시켜 묘청의 목을 베 고려 조정에 바쳤어요. 묘청과 몇몇 우두머리의 잘린 목들이 저잣거리에 내걸렸어요. 그런데 머리를 바치러 간 사람마저 감옥에 가두어버리자 조광도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알아차리고 다시 저항했어요.

1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도 항복하지 않자, 김부식은 결국 총공격을 결정했어요. 때를 기다리다 성보다 높은 흙산을 쌓은 뒤 그 위에서 성을 공격하였지요. 결국 조광 세력은 김부식의 공격에 무릎을 꿇었고, 조광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이로써 1년이 넘게 지속된 묘청의 난은 끝이 났어요.

그런데 김부식은 임금의 당부대로 우두머리만 죽이고 나머지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았을까요? 그럴 수는 없었지요. 그들은 반역에 참여한 사람들이었으니 말이에요. 또 그들을 살려두었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죽고, 묘청을 따르던 무리들은 귀양을 가거나 천민이 되었다고 해요.

<묘청 세력 범위와 관군 토벌 진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성공했다면?

묘청의 난이 실패로 끝난 뒤 서경 세력은 힘을 잃었어요. 서경 지역도 이전만큼 중요시 되지 않았고요. 금을 정벌하자는 주장은 쏙 들어갔어요.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은 고려의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지요. 이후 문벌 귀족들은 권력을 독차지하고 점점 자신들의 배를 불리며 그들의 세상을 만들려고 했어요.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에 대해서는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평가하기도 해요. 고려를 지키기 위해 세력을 떨치던 금과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죠. 하지만 묘청의 난이 성공했다면 고려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정말 묘청의 난이 성공했다면 고려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었을까요? 금나라를 받들지 않는 자주적인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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