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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후, 세계 최강 몽골군을 두 번이나 물리치다

<처인성(경기 용인시)>   

“비록 승려이지만 온 나라가 적들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으니, 어찌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발 벗고 나섭시다.”

“우리 모두 무기를 들고 온 힘을 다해 싸웁시다.”

승려 김윤후는 처인성 백성들과 승려들을 모아 놓고 소리 높여 외쳤어요. 도대체 왜 절에 있어야 할 승려들이 전쟁터로 나온 것일까요?

최씨 무신 정권,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다

그것은 바로 몽골 침입 때문이었지요. 13세기 몽골은 중국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어요. 동서로 세력을 넓히며 대제국을 건설했지요. 고려와 몽골은 몽골에 쫓겨 고려에 침입한 거란 때문에 처음 만났어요. 고려는 몽골과 힘을 합쳐 거란을 몰아낸 후 형제 관계를 맺었지요. 이때 몽골은 마치 은혜라도 베푼 듯 이것저것 무리한 요구를 해댔어요.

1225년 고려에 온 몽골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원인 모를 죽임을 당했어요. 이참에 고려를 제압하려했던 몽골은 기회다 싶어 1231년 그 책임을 묻는다며 고려에 쳐들어왔어요. 이로써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40여 년에 걸친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었지요.

  

몽골군은 단숨에 밀고 내려왔어요. 고려는 온힘을 다해 맞서 싸웠지만 세계 최강의 몽골군을 막기에는 힘이 모자랐어요. 그만 그들이 지나간 곳은 모두 쑥대밭이 되었지요. 고려는 개경이 포위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어요. 그러자 몽골은 고려에 72명의 감독관을 남겨두고 철수했지요.

<몽골군의 모습>   

얼마 후 몽골이 다시 쳐들어 왔어요. 권력을 잡고 있는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일단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어요. 몽골군은 초원에서 말을 타며 생활하던 사람들로 걷는 보병과 말 타는 기병이 대부분이라 바다를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거지요.

<강화도에 있는 고려 궁터(인천 강화군)>   

“그 이야기 들었나? 임금님이랑 높으신 분들은 모두 강화도로 옮겨갔다면서?”

“아니 그럼, 우리 같은 백성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라고 했다는데, 소식 못 들었나?”

“처음 듣는 이야기라네.”

임금과 높은 관리들은 이미 강화도로 들어갔지만, 일반 백성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육지에 남아 두려움에 떨어야 했어요.

김윤후, 처인성에서 몽골군 총사령관을 쓰러트리다

고려가 도읍을 옮기자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다시 고려에 쳐들어왔어요. 몽골은 순식간에 서경(평양)을 거쳐 개경(개성)을 지나 경기도까지 내려왔어요. 광주성을 공격하려다 실패한 몽골군은 용인으로 말머리를 돌려 처인성까지 내려왔어요. 하지만 몽골은 여기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었어요. 그들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거든요. 바로 김윤후에요.

처인성은 교통이 발달해 역사 속에서 전쟁이 자주 있었던 곳이지요. 몽골군은 보잘 것 없는 처인성을 단숨에 차지하고, 남쪽 지방으로 내려갈 생각이었지요.

몽골군이 용인 지역으로 접근해 온다는 소식에 인근 주민들이 처인성으로 피란을 왔어요. 김윤후를 비롯한 승려들과 관군들도 있었고요. 당시 처인성에는 처인부곡 사람들이 많았어요. 부곡은 차별대우를 받던 백성들이 살던 특수 행정구역을 말해요.

<처인성 터(경기 용인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몽골군을 막아냅시다. 우리가 사는 땅이 저들의 말발굽에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들을 막아냅시다.”

처인성에 모인 승려들과 일반 백성들은 활과 창을 들었어요. 김윤후를 중심으로 성을 지켜내기 위해 끈질기게 맞서 싸웠어요.

“저기 몽골 장수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다!”

김윤후는 성위에서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았어요.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몽골군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때다. 공격을 퍼부어라.”

“와, 한 놈도 남기지 말자!”

사기가 꺾인 몽골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돌아갔어요.

몽골 장수를 죽이고 막강한 몽골군을 막아내자, 조정에서는 김윤후에게 상장군이라는 높은 벼슬과 큰 상을 내렸지요. 김윤후는 끝까지 큰 상을 받지 않겠다고 했어요.

“나는 몽골과 전투할 당시 활과 화살을 갖고 있지 않았소. 그런데 어찌 큰 상을 받을 수 있단 말이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장 살리타이까지 죽이신 분이지 않습니까?”

<몽골군과의 처인성 전투>   

김윤후는 끝까지 자신이 살리타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겸손하게 말했어요. 고려 조정은 어쩔 수 없이 상장군보다 낮은 벼슬을 내렸어요.

충주성에서 또 한 번 몽골군을 물리치다

처인성 전투 이후에도 몽골군은 그 기세가 꺾이지 않았어요. 더욱 막강한 군사를 이끌고 고려에 수차례 쳐들어 왔어요. 그때마다 몽골군이 지나간 자리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어요.

수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어린 아이들마저 포로로 끌려갔어요. 그러는 사이 국토는 엉망이 되었고, 황룡사 9층 목탑 등 많은 문화재들도 불탔어요.

그런데도 임금과 귀족들은 강화도에서 바다를 통해 들어온 갖가지 진귀한 음식을 먹으며 풍요롭게 살았지요. 때마다 잔치를 벌이기도 했고요. 이런 점을 보면 도읍을 옮긴 것이 몽골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는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어요.

<몽골군의 5차 침입로>   

1253년, 몽골은 다섯 번째로 고려에 쳐들어 왔어요. 처인성 전투를 치룬지 21년이 지난 때였지요. 그동안 몽골군은 다양한 신무기로 무장해 더욱 강해졌어요. 서경을 지나 철원, 춘천을 거쳐 단숨에 충주까지 밀고 내려왔어요. 만약 충주가 무너지면 경상도 지역이 위험한 상황이었지요.

충주성에 모인 군사들과 백성들은 70여 일 동안 전투를 치루며 지칠 대로 지쳐있었어요. 식량도 먹을 물도 다 떨어져 가고 있었지요. 이때 지친 마음을 일으켜 세운 사람이 있어요. 바로 김윤후이지요.

“마음을 다해 힘써 싸워 이깁시다. 그리하면 신분이 귀하던 천하던 가리지 않고 공에 따라 벼슬을 내리도록 할 것입니다!”

“장군님, 정말이십니까?”

“당연하오. 저기 모아 놓은 노비 문서를 당장 불사르시오.”

“와, 장군님 만세! 몽골군을 몰아내고 충주성을 지킵시다.”

<노비문서를 불태우는 김윤후>   

충주성에 모인 사람들은 김윤후의 지휘 아래 있는 힘을 다해 싸웠어요. 전투 중에 얻은 가축이나 물건들도 골고루 나누어 주니 사기가 더욱 높아졌지요. 충주성 군사들과 백성들의 저항에 깜짝 놀란 몽골은 더 이상 공격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다 지휘관인 예쿠가 병에 걸려 물러갈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몽골의 침입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어요. 고려 조정은 점점 고민이 깊어졌어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거든요. 결국 고려는 몽골에 무릎 꿇고, 1270년 개경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어요.

고려는 비록 항복했지만, 40여 년 간 몽골에 맞서 싸운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은 역사 속에서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지요. 무엇보다 정식 군대도 아닌 처인성과 충주성 주민들의 힘으로 일궈낸 값진 승리이기에 더 큰 의미가 있어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고려가 두 번이나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나라를 지키려는 백성들의 하나 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백성들의 마음을 잘 읽어 낸 김윤후의 지도력도 빼놓을 수 없겠죠?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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