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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백성이 근본인 나라를 꿈꾸다

<경복궁(서울 종로구)>   

“어찌 이러시오?”

“어린 동생을 세자로 세운 뒤 우리 형제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나라를 어지럽힌 죄, 죽어 마땅하오.”

정도전을 체포하도록 명령한 이방원이 소리쳤어요. 정도전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표정을 지었지요.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었던 정도전은 왜 한때 뜻을 같이 했던 이방원의 칼에 죽어야만 했을까요?

백성들을 위해 토지 제도를 고치다

이성계와 손잡고 조선 건국(1392년)에 앞장선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 조선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했어요.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는 백성들을 위해 토지 제도를 고치려고 했어요.
고려 말 백성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을 정도로 자기 땅이 없었어요. 대신 지배층인 권문세족들은 산이나 하천을 경계로 할 정도의 넓은 땅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살았지요. 높은 이자를 갚지 못해 노비가 되는 농민들도 수두룩했어요.

“백성의 수를 헤아려 토지를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정도전은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토지 개혁을 강력히 주장했어요. 그에 비해 정몽주와 조준의 입장은 달랐어요. 과전법을 주장했지요. 전국의 토지를 국가가 세금을 걷을 수 있는 땅으로 만들고, 권한의 일부를 관료에게 나눠주도록 한 제도였어요.

정도전과 정몽주, 조준은 토지 제도 개혁을 놓고 서로 맞섰지요. 그러다 결국 정몽주와 조준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어요. 정도전의 토지 개혁이 너무도 앞선 것이라, 땅을 가진 지주들과 권문세족들의 반발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거든요.

“모든 땅 문서들을 모아놓고 불살라 버리거라!”

모든 토지대장을 불태우고, 1391년에 과전법이 실시되었어요. 경기 지역의 땅에서만 관리들이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게 했고, 나머지 땅에서는 모두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들였어요.

<토지대장을 불태우는 모습>   

정도전의 뜻대로 백성들의 수를 헤아려 땅을 나누어 주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자기 땅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이 늘고, 농사지을 수 있는 권한이 보장되었지요. 백성들의 세금 부담도 줄어들었기에 그들은 환영했어요. 세금도 제대로 거쳐 나라 살림도 넉넉해졌어요. 권문세족들의 농장을 빼앗아 신진 사대부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의 경제적 기반도 마련해 주었지요.

궁궐과 도성을 세우고, 법을 만들다

건국 이후 조선은 새 도읍을 건설했어요. 고려의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개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였지요. 새로운 도읍지로 계룡산, 무악, 한양이 이야기 되다 최종적으로 한양으로 정해졌어요. 한양은 한반도 중심에 있고, 한강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도읍지로는 안성맞춤이었지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적을 방어하기에도 좋은 곳이었고요.

<정도전이 설계한 한양 도성>   

태조는 정도전에게 종묘, 사직, 궁궐 등의 터를 정하게 했어요. 이후 궁궐이 지어지고 도성도 건설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1394년 조선은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어요.

도읍은 유교 정신에 따라 건설되었어요. 남산을 바라보도록 경복궁을 짓고, 경복궁 왼쪽에 종묘를 세웠어요.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제사는 유교에서 중요시한 효를 드러내는 예절이지요.

오른쪽에는 곡식신과 토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을 세웠고요. 토지와 농사를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지요.

한양을 둘러싼 산을 따라 성벽을 쌓고, 사이사이에 4개씩 큰 문과 작은 문을 만들었어요.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숙청문(숙정문)을 두었지요.

새로운 궁궐이 지어지자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다음 명령을 내렸어요.

“궁궐의 이름을 지어 우리 왕조가 오래도록 빛나게 해주시오.”

“전하, 오래도록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담아 경복궁이라 하면 어떻겠습니까?”

정도전은 궁궐의 이름을 지어 올렸어요. 이후 궁궐 건물의 이름도 하나하나 지었어요. 왕의 즉위식 등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루는 중심 건물은 근정전이라고 했어요. ‘근정’은 부지런히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지요. 왕이 평상시 생활하며, 나랏일을 돌보는 곳은 사정전이라 했고요. ‘사정’이란 깊이 생각하여 나랏일을 하라는 뜻이지요.

<경복궁>   
국사편찬위원회

정도전은 조선을 다스리는데 기본이 되는 법전인 『조선경국전』도 만들었어요. 조선 왕조를 다스리는 기준을 두루 담은 법전이었어요. 법전에는 ‘임금의 지위는 높다면 높고 귀하다면 귀합니다. 백성들은 무척 많은데, 한 번이라도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크게 염려할 만한 일이 생길 것입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요.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강조한 내용이에요.

정도전은 이후 다양한 정책들을 마련하며 나라를 다스릴 기반을 다져나갔어요.

정도전이 이방원과 함께 할 수 없었던 이유

이성계는 왕이 되고 나서 누굴 세자로 삼을지 고민이었어요. 고민 끝에 두 번째 부인인 강씨가 낳은 아들 중에서 세자를 삼으려고 했어요. 정도전도 막내인 방석을 추천했지요.
왜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은 공신에서도 제외되고 세자도 되지 못한 것일까요?

정도전과 이방원이 바라는 세상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정도전은 왕의 힘이 지나치게 강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어요. 왕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기보다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나랏일을 이끌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정도전은 왕권이 강한 나라를 만들려는 야심가였던 이방원과는 함께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정도전은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손발을 묶어 놓으려고 했어요. 먼저 왕족들이 거느린 군사도 모두 없애도록 했어요. 왕자들을 지방으로 보내 나라를 지키도록 하자고 건의 했고요.정도전에 대한 이방원의 불만은 가득 차올랐어요. 결국 그는 세자 방석과 정도전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이방원의 손에 최후를 맞다

이방원은 정도전 등이 모의를 해 이성계가 위독하다며 왕자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죽이려 한다고 했어요. 이를 구실로 그들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면서 군대를 동원했어요. 그리고 정도전 등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지요. 이방원은 그들이 모여 있는 집의 옆집에 불을 질렀어요. 사람들은 깜짝 놀라 허둥대기 시작했어요. 때를 놓칠 새라 이방원의 종이 정도전을 잡아왔어요.조선 건국 최고의 공신이었던 정도전, 결국 그는 이방원의 칼에 쓰러지고 말았어요. 이후 중전 강씨의 두 아들 방번과 방석도 목숨을 잃게 되었지요(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의 죄명은 세자 방석에게 붙어 나라를 어지럽게 했다는 것이었지요. 이후 그는 오랫동안 조선 왕조에서 간신 취급 받았어요. 오히려 정몽주는 충신으로 떠받들어졌는데 말이죠.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조선의 왕들이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의 후손들이기 때문이지요. 또 조선 왕조의 기틀이 잡힌 뒤에는 충성을 다할 신하가 필요하니, 정몽주를 내세워 충성스런 신하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고요.

세월이 흘러 고종 때 경복궁을 다시 지으며 흥선 대원군은 정도전의 명예를 조금 회복시켜 주었어요. 오늘날에도 정도전을 새롭게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런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경복궁을 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정도전을 떠올리곤 해요. 그가 만들려고 했던 조선의 모습과 함께 말이에요.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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