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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다

<호패>   
국립중앙박물관

“군역을 비롯한 각종 부역을 부과하려면 남자의 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백성들에게 호패를 차게 하고, 군인이 될 사람들을 기록한 문서를 만들면 어떨지요?”

“그게 좋겠소. 인구수를 정확히 파악해야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좋을 것이오.”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다

호패법을 실시한 사람은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이에요.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죠. 그는 2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았어요. 그런데 왕자의 난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방원은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할 때 이를 반대한 정몽주를 제거했지요. 정몽주가 제거되면서 이성계는 좀 더 수월하게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이방원은 조선이 세워진 뒤 공신(공을 세운 신하)으로 선정되지 못하고 푸대접을 받았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도전은 이방원의 배다른 어린 동생인 방석을 세자로 추천했어요.

그는 국왕의 권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방원과 달리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지요. 이방원은 결국 난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 형제를 죽이고, 정도전도 제거했어요. 이것이 바로 1차 ‘왕자의 난’이에요.

형제들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다툼을 지켜본 태조 이성계는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버렸어요. 그리고 둘째인 방과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줬지요. 그가 바로 조선 제2대 왕인 정종이지요.

힘이 있었음에도 이방원이 곧바로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왕이 되려는 욕심으로 형제들과 정도전을 죽인 것으로 비추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왕은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니 말이죠.

정종은 허수아비 왕과 같았어요. 아니 일부러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나랏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격구를 하며 하루를 보내는 일이 많았대요. 나라의 중요한 일은 이방원에게 맡겼지요.

그런데 이즈음 또 한 번 피바람이 불었어요.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과 손잡았던 넷째 형인 방간이 왕의 자리에 욕심을 냈거든요. 그런데다 박포라는 신하는 이방원이 앞으로 방간을 죽일 거라고 부추겼어요. 방간은 자신의 군대를 동원해 이방원의 군대와 맞붙어 싸웠어요. 이를 ‘2차 왕자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 불러요.

이방원의 군사들은 방간의 군사들을 제압했고, 이방원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어요. 정종은 이방원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지요. 드디어 1400년 이방원이 조선의 제3대 왕이 되었어요.

<1, 2차 왕자의 난으로 왕이 된 태종>   

사병을 없애고, 창덕궁을 새로 짓다

태종은 왕의 힘이 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는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왕족이나 공신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린 군대인 사병(私兵)을 없앴어요. 사실 가장 많은 사병을 거느렸던 사람은 이방원이었어요. 그 덕분에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병은 국왕의 권력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모든 군사를 국가의 군대로 만들었어요. 왕이 중심이 되어 국가를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을 마련했던 거예요. 그 때문에 왕족이나 권력 있는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줄었지요.

한편, 이방원은 개경에서 왕위에 올랐어요. 정종이 1차 왕자의 난이 끝난 이후 수도를 개경으로 옮겼기 때문이죠. 그러나 태종은 왕이 된 지 5년째 되던 해인 1405년에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겼어요.

하지만 왕자의 난이 벌어졌던 경복궁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새로운 궁궐인 창덕궁을 지었어요. 창덕궁은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지은 아름다운 궁궐이에요. 이후 조선의 왕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머물렀답니다.

<창덕궁 전경>   
문화재청

왕비 집안인 민씨 세력을 제거하다

강력한 국왕 권력을 목표로 삼았던 태종은 외척들도 제거했어요. 외척은 외가나 처가 쪽의 친척을 뜻해요. 태종의 외척 가운데 부인 원경왕후의 여흥 민씨 가문이 대표적이죠.

태종이 왕이 되자 사람들이 원경왕후의 친정으로 몰려들었어요. 게다가 세자인 양녕대군은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외삼촌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매우 특별한 사이였지요. 태종은 그들이 탐탁지 않았어요. 나중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민씨 집안이 더욱 강해져서 정치를 어지럽게 할지도 모른다고 여겼거든요. 태종은 민씨 형제들의 속내를 떠볼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하루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어요.

“이제 나는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노라. 대신 세자 양녕대군을 왕의 자리에 앉히도록 하라!”

갑작스러운 태종의 말에 신하들이 어리둥절했어요. 신하들은 눈물을 흘리며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지요. 그제서야 태종은 못 이기는 척하고 명령을 거두었어요. 신하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요. 그러나 이때 실망하는 표정을 지은 이들이 있었어요. 바로 민씨 형제들이었지요. 이를 알게 된 신하들은 민씨 형제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어요. 태종은 그들을 유배 보냈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명령했어요.

태종은 왜 세자의 외삼촌까지 죽였을까요? 국왕 권력을 위협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던 거예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관찰사를 보내다

한양으로 도읍을 다시 옮긴 후 태종은 전국을 8도로 나누었어요. 8도는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말해요. 지금의 행정 구역과 비슷해요. 8도 아래에는 부·목·군·현이라는 작은 단위의 행정 구역을 두었어요. 각도에 왕이 임명한 관찰사를 보내 다스리도록 했지요.

고려 시대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어요. 때문에 왕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중앙에서 지방을 제대로 다스리기 어려웠지요. 태종은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려고 했어요. 모든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해 왕의 명령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전달되도록 했어요.

관찰사는 왕을 대신해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예요. 세금을 거두고, 군사를 훈련하며, 사건과 소송을 재판하고, 교육을 장려하는 등 많은 일을 했어요. 각 고을의 수령들이 제 역할을 하는지도 관리하고 단속했어요.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관찰사는 깨끗하고 올곧은 사람이어야 했어요. 그래서 나라에서는 사람 됨됨이를 가려서 신중하게 뽑았어요.

<조선의 8도>   

왕이 직접 6조의 보고를 받다

조선의 의정부는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기관이에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비롯한 재상들이 모여 나랏일을 합의하던 최고 의결 기관이었죠. 행정을 나누어 맡아보던 6조에서 의정부에 나랏일을 보고하면 영의정 등의 재상들이 논의해서 결론을 냈어요. 마지막에 그 내용을 국왕에게 보고하면, 국왕이 최종 결정을 했지요.

이후 결정된 내용은 각기 6조에서 집행했어요. 6조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을 말하는데, 각기 다른 행정 업무를 맡아봤어요. 각 부서의 우두머리는 판서라고 불렀지요. 지금의 행정 각 부 장관들과 비슷해요.

그런데 태종은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보고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었어요. 직접 6조의 장관들에게 보고를 받게 되면서 국왕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졌죠. 대신 6조의 권한도 조금 높여주었어요.

하지만 이후 조선의 왕들은 태종처럼 6조에서 보고받아서 업무를 직접 처리하는 것보다 재상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방식을 선호했어요. 국왕과 재상이 서로 논의하면서 정치를 하는 것이 더 좋은 방식이라고 여겼던 거지요.

<6조 직계제>   

태종은 이외에도 청계천의 물이 잘 흐르도록 바닥을 파서 비 피해를 막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신문고를 울려 억울함을 풀 수 있도록 했어요. 또 교육 제도를 정비해 성균관에 인재들이 모여 교육을 받도록 했어요.

호패법을 실시한 것도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정책이었어요. 세금을 내야 하는 사람, 군대에 가야 하는 사람들을 정확히 알기 위해 호패법을 시행한 거죠. 호패는 16세 이상의 남자들이 차고 다녔는데, 사는 곳, 신분, 이름 등이 적혀 있었어요.

태종은 조선의 기틀을 튼튼하게 다졌어요. 그는 셋째 아들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정치에 관여했어요. 세종의 외척까지 제거하며 왕이 나랏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요. 효자 세종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훌륭한 정치를 해나갔어요. 세종의 시대에 국가는 문화적 발전을 이루며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답니다.

태종 이방원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을 죽인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조선의 기틀을 탄탄하게 다진 능력 있는 왕으로 평가받기도 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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