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초등역사
  • 조선
  • 장영실
  • 장영실, 조선의 시간을 찾다

장영실, 조선의 시간을 찾다

<국립고궁박물관(서울 종로구)>   

“임금께서 노비 출신 기술자를 중국에 보내려 하신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도대체 장영실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그러신 답니까?”

천한 신분이었던 장영실이 세종의 눈에 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종은 왜 장영실을 중국에 유학 보내려고 했을까요?

노비 출신 장영실, 궁궐에 들어가다

장영실은 세종 시기 과학 기술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에요. 원래는 부산 동래현의 관노비였어요. 아버지는 원나라 사람이라고 전하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고 해요. 천한 기생의 아들이었기에 관청의 노비가 되었던 거예요. 어머니를 따라 동래현 관노비로 지냈던 장영실은 손재주가 남달랐어요.

“영실아, 또 무엇을 고치고 있느냐?”

“농기구가 고장 나 고치는 중입니다.”

“우리 영실이 손재주가 보통이 아닌걸.”

“저건 하늘이 내린 재주일세.”

장영실은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이것저것 뚝딱 만들어내고, 고치곤 했지요. 농기구며 무기며 못 고치는 게 없었지요. 사람들은 그의 재주에 감탄했어요. 장영실의 재주를 알아보고 그의 운명을 바꿀 기회를 마련해 준 사람이 있어요. 바로 동래현 수령이지요.

“재주가 그렇게 훌륭하다니 장영실을 임금님께 추천해야겠군.”

당시 전국의 훌륭한 인재를 추천에 의해 뽑는 제도가 있었어요. 동래 수령의 추천 덕분에 장영실은 태종 때 궁에 들어가 기술자로 일할 수 있게 되었지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다

궁에 들어간 장영실은 상의원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상의원은 왕의 옷을 관리하던 기관이었지요. 손재주가 남달랐던 영실은 그곳에서도 눈에 띄었지요. 훗날 그의 뛰어난 재주에 대한 소식은 세종대왕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백성들이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려면 하늘을 잘 읽어야 하는 법이다.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 기구들을 만들어야 하느니라.”

조선은 왕의 큰 임무 중 하나가 하늘을 잘 살피는 것이었지요. 농경 사회에서는 씨 뿌리고 수확하는 시기와 날씨의 변화를 아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성문을 열고 닫으려면 정확한 시간을 알아야 했고요. 그래서 시간을 정확히 예측하려면 중국의 것이 아닌 조선에 맞는 역법이 필요했지요. 역법은 날짜를 헤아리는 방법을 말하는데, 당시 역법은 중국의 것을 따랐어요.

세종은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어요. 하루는 세종이 장영실을 불러 명령을 내렸어요.

“명나라에 가거라. 그곳에 가서 천문관측 기구들을 살펴보고 물시계의 원리도 알아오도록 하라”

노비 출신인 장영실은 사신단에 끼어 명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요.

“명 황제의 허락 없이는 천문학 공부를 할 수도 없다던데, 혼천의와 물시계를 어찌 살펴본다?”

명에 도착한 장영실은 고민에 빠졌어요. 하늘을 관측하는 관상대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궁궐 깊은 곳에 있는 물시계는 구경도 할 수 없었거든요.

하지만 간절하면 길이 생기는 법. 실망 속에 장영실이 찾은 곳은 북경에 있는 유리창 거리였어요. 세계 여러 나라 사람과 책들이 모이는 곳이었지요. 그곳에는 장영실의 눈을 사로잡은 것들이 있었어요. 유럽과 아라비아의 발달한 과학 기술 내용이 소개된 여러 가지 책들 말이에요.

“물시계와 천문 관측기구에 대한 내용이 담긴 이 책을 사가야겠군.”

1년 동안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장영실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어요.

<유리창 거리에서 외국 서적을 보는 장영실>   

조선의 시간을 찾다

“아니, 기생의 자식에게 그런 벼슬을 내리다니 안 될 일이오.”

“기생의 자식이니 그 정도 벼슬이 딱 적당하지 않겠소?”

세종은 신하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명령을 내렸어요.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로 임명하노라!”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장영실은 이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관리가 되었어요. 벼슬까지 얻은 그는 더욱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어요. 세종의 명을 받아 혼천의를 만들었어요. 당시 만들어진 혼천의는 하늘의 움직임을 읽는 기구인 동시에 천문시계였어요.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고, 훗날 이를 기준으로 조선의 달력도 만들 수 있었지요.

<혼천의를 보고 있는 세종과 장영실>   

해시계인 앙부일구도 만들었어요. 하늘을 향해 있는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라 ‘앙부일구’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앙부일구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 시계에요.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교에 설치해 일반 백성들이 시각을 알 수 있도록 했어요.
뾰족한 바늘 모양의 막대를 설치해 그림자가 생겨 시각을 알려주지요. 한자를 못 읽는 백성들을 위해 열두 띠 동물(12지신)을 새겨 놓았어요. 또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절기도 알 수 있도록 해 생활에 도움을 주었어요.

“밤이나 구름 끼고 비가 오는 날에도 시각을 알 수 있으면 좋을텐데...”

장영실은 중국에서 가져온 여러 가지 책들을 참고해 새로운 시계를 만들었어요. 바로 물시계인 자격루 말이에요.

“기특하다. 내 명을 잘 받들어 이렇게 훌륭한 기구를 만들어 내다니. 명의 것보다도 뛰어나니 후대에 전할 만 하구나.”

세종은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를 보고 그 공을 높이 칭찬했어요. 항아리에서 일정한 양의 물을 원통으로 흘려보내면 원통 안의 막대가 올라가 구슬을 건드리고, 굴러간 구슬이 인형들을 건드려 종과 징, 북을 치게 해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였지요. 해시계에 이어 물시계까지 만들어 조선의 시간을 찾으니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어 농사에 도움을 줄 수 있었어요. 또 백성들이 시간에 맞추어 하루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 뿐만이 아니었어요. 장영실은 세종의 아들인 문종의 생각을 받들어 측우기를 만들고, 청계천의 물 높이를 재는 수표도 만들었어요. 금속활자를 만드는 데도 참여했고요.

<세종 시기 과학 기구>   

궁궐에서 쫒겨나다

높은 벼슬을 하며 세종의 사랑을 받던 장영실이 궁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어요. 바로 가마사건 때문이었지요.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던 세종은 온천에 자주 다녔어요. 온천에 갈 때 탈 가마 제작을 감독한 사람이 바로 장영실이었어요. 그런데 그 가마가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거든요.

“장영실이 왕의 가마를 감독해 제작했는데, 튼튼하지 못해 부서지게 했으니 곤장 일백 대를 쳐야합니다”

신하들은 왕이 다치진 않았지만 왕의 존엄을 해치는 불경죄를 지었다며 곤장을 치고, 장영실을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세종은 벌을 감해주어 곤장 80대를 치게 했고, 장영실의 벼슬을 빼앗고 궁궐 밖으로 내쳤지요. 이후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요.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지요.

신분이 낮았음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세종의 사랑과 믿음을 얻고 승승장구하던 장영실이 갑자기 벌을 받고 쫓겨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남아있어요. 그가 벌을 받은 것이 가마사건에 대한 책임 때문이 아닌, 혹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에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의문을 풀 수는 없어요. 무엇보다 장영실이 더 이상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고요. 하지만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장영실 덕분에 조선의 과학기술이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었고, 그가 만든 여러 가지 기구들이 백성들의 생활에 큰 도움을 준 것만은 분명하답니다.

[집필자] 황은희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