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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조선의 유학을 크게 발전시키다

<도산 서당(경북 안동시)>   
문화재청

“전하, 판중추부사가 『성학십도』를 지어 올렸습니다.”

“대유학자가 나를 위해 유학의 핵심 원리를 10개의 그림으로 그려 설명한 글을 올렸구나.”

1568년 선조가 17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한 신하가 임금이 좋은 정치를 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성학십도』를 올렸어요. 『성학십도』를 올린 신하는 누구일까요? 그는 어떤 일을 했을까요?

어릴 때부터 유학 공부에 힘쓰다

이황은 1501년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러나 이황이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도 알지 못한 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요. 그때 이황의 어머니 박씨 부인은 32세의 젊은 나이였어요.

박씨 부인은 남편이 없어도 아들을 훌륭하게 기르고 싶었지요. 농사일, 누에치기 등을 하며 집안 살림을 챙기면서도 자식들 교육에 온 정성을 다했어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바른 성품을 가졌으면 했지요. 이런 가르침 덕분에 막내 이황도 똑똑하고 예의 바른 아이로 자랐어요.

이황은 여섯 살이 될 무렵 이웃집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며 글을 읽기 시작했어요. 어린 나이에도 늘 옷차림을 단정히 하였고 배운 내용은 공부하고 또 공부해서 사람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았어요.

열두 살부터는 형 이해와 함께 작은아버지 이우에게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작은아버지 이우는 한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안동 부사로서 어진 정치를 한 인물이었어요. 그는 어린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아꼈으나, 글을 가르칠 때는 엄격하게 했어요.

이황은 유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도연명의 시를 자주 읽었어요. 중국의 시인으로 유명한 도연명은 짧은 관직 생활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을 즐긴 인물이었는데, 이는 훗날 이황이 벼슬길을 사양하고 시골에 내려와 자연 속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는 데 영향을 끼쳤어요.

이황이 열일곱 살에 작은아버지 이우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 후 이황은 거의 독학으로 공부를 했어요. 밤낮없이 공부만 해 건강에 무리가 와서 병이 생기기도 했지요.

과거 시험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

스물한 살에 결혼한 이황은 홀로 고생하시는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과거 시험에 응시했어요. 유학 공부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 이황이었지만 과거 시험은 쉽지 않았던지 세 번 연속으로 떨어졌어요. 그러다가 스물일곱 살에 드디어 소과에 합격했어요.

당시 조선의 과거 제도는 크게 소과와 대과로 나뉘어 있었어요. 소과는 초시·복시의 2단계, 대과는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를 거쳐야 했어요. 소과의 초시·복시에서 합격해야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소과의 초시·복시에서 합격하면 대과 준비를 위해 성균관이라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에 입학해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요.

  

이황이 소과 복시에 합격한 직후 이황의 아내 허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이황은 큰 슬픔에 잠겼지만 아주 어린 아이들을 생각해서 권씨 집안의 여인을 새 아내로 맞아들였어요. 집안은 안정을 되찾았고 이황은 다시 학문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어요.

드디어 서른네 살이 되던 1534년(중종 29) 봄, 이황은 34세의 나이로 대과에 합격해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어요. 승문원은 외교 문서를 다루던 관청이에요.

이황은 비록 늦은 나이에 대과에 합격했지만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했어요. 1536년에는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 무렵 이황에게는 또다시 슬픈 소식이 전해졌어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어요.

이황은 서둘러 안동 고향 마을로 내려갔어요. 어머님 장례를 치른 그는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2년 동안 무덤을 지키며 돌봤어요. 원래 몸이 약했던 그의 건강은 이때 더욱 나빠졌어요.

이황은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관직 생활을 이어나갔어요. 당시 조선의 임금은 명종이었는데, 신하들끼리 다투는 일이 잦아서 정치가 매우 혼란했어요. 결국 이황은 나빠진 건강을 핑계 삼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이때 이황은 그의 고향에서 가까운 토계에 양진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이를 계기로 해서 동네 이름은 토계에서 퇴계로 바뀌었고, 자신의 호(號) 역시 그것으로 정했대요. ‘토계(兎溪)’라는 말은 ‘토끼가 뛰어노는 골짜기’라는 뜻이고, ‘퇴계(退溪)’는 ‘물러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에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사액 서원이 되도록 하다

명종 임금은 뛰어난 유학자인 이황에게 서울에 와서 관직을 맡으라고 했어요. 결국 이황은 관직 생활을 다시 이어나갔지요. 그는 명종 임금에게 서울보다 지방에서 일하기를 청하였어요. 이황은 1548년에 충청도 단양 군수가 되었다가 넷째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갔어요. 그는 지방 관리로서 백성을 잘 다스렸지요. 마을 백성들은 이황이 훌륭하다고 칭송했어요.

한편 풍기 지역에는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이 있었어요. 서원은 뛰어난 유학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 양반을 교육하는 공간이었어요. 풍기 군수 이황은 경상도를 다스리는 경상도 관찰사에게 서원에 내걸 현판과 사람들을 가르칠 유학 서적을 내려주도록 요청했어요. 그래서 경상도 관찰사는 중앙 정부에 보고했고, 명종 임금은 직접 쓴 ‘소수서원’이라는 현판, 연구와 교육에 쓰일 각종 서적과 서원의 경제에 보탬이 될 토지까지 내려줬어요.

이처럼 임금이 서원 이름을 지어서 현판과 서적 등을 보내주는 것을 ‘사액’이라고 해요. 서원이 사액을 받게 되면 대단한 영광이었지요. 사액 서원에는 많은 선비가 모였고, 그 지역의 유학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이처럼 백운동 서원이 소수 서원이라는 사액 서원이 된 후 전국 각지에서는 수많은 서원이 세워졌어요. 사액 서원도 점차 늘게 되었지요. 그리고 각지의 서원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로 진출하면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어요.

<소수 서원>   
유네스코와 서원

<소수 서원 현판>   
소수박물관

도산 서당에서 제자를 길러내다

이황은 관직 생활보다는 고향에서 학문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길러내기로 마음먹었어요. 풍기 군수로 부임한 지 1년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을 다시 시작했어요.

그러나 임금이 사람을 보내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줄 것을 청하자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어요. 그리고 이후 더 높은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여러 차례 사양했어요. 1545년부터 1560년까지 관직에서 사퇴하거나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이 20여 차례나 되었답니다.

1560년 이황은 고향 마을에 도산 서당을 짓고 7년 동안 살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어요. 명종 임금은 여러 차례 이황에게 다시 관직에 돌아올 것을 요청했으나 이황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그러자 명종 임금은 몰래 화가를 보내 이황이 사는 마을의 경치를 그려 오게 했어요. 그리고 그 그림을 궁궐 벽에 붙여 놓고 종종 보았지요. 또 여러 신하에게 ‘어진 선비는 불러도 오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기도 했어요.

이황은 제자들을 기르는 데 모든 힘을 다했어요. 제자들은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자들이 모두 양반이었던 것은 아니에요. 대장간에서 쇠붙이로 농기구를 만들어 팔던 대장장이 배순이라는 사람도 있었지요.

배순은 양반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공부할 처지가 아니었어요. 그러나 배움에 뜻이 있던 그는 소수서원 뜰에서 무릎을 꿇고 몰래 수업을 들었어요. 어느 날 이황은 배순을 불러 자신이 강의한 내용을 물었는데, 그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어요.

그러자 이황은 배순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였대요. 조선 시대에는 양반이 아닌 대장장이를 제자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황은 대장장이에게도 배움의 길을 열었던 참된 스승님이었지요.

  

나이 어린 임금을 위해 『성학십도』를 지어 올리다

1567년 중국의 사신들이 오자 명종은 사람을 보내 이황에게 서울로 올라오라고 요청했어요. 이황은 임금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서울로 다시 올라가 관직 생활을 시작했어요. 다시 관직 생활을 하던 중 1568년 명종이 죽고 17세의 나이 어린 선조가 왕위를 이어받았어요. 선조도 이황에게 자신의 곁에서 관직 생활을 계속할 것을 요청했어요.

그러나 이황은 정치적으로 출세하기보다는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내는 데 힘을 쏟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황은 자신이 일생 동안 연구한 성리학의 핵심을 10개의 그림으로 요약한 『성학십도』를 작성하고 그것을 올리는 까닭을 적어서 선조 임금께 바쳤어요.

<『성학십도』의 표지와 내용>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하! 제가 나라에 보답할 길은 이 그림뿐입니다. 부디 성군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려주시옵소서.”

이황은 『성학십도』에서 백성의 지도자인 국왕이 모범을 보여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선조는『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게 하고, 그 내용을 교훈으로 삼아 정치를 펴나갔어요.

이듬해인 1569년 3월, 이황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기를 원했어요. 선조는 이황이 좀 더 곁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그의 뜻이 굳건함을 알고는 더 말릴 수가 없었어요.

고향에 돌아온 이황은 도산 서당에서 제자들에게 온 힘을 다해 학문을 가르쳤어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얻어 1570년 12월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어요.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선조는 슬퍼하며 최고 관직인 영의정의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를 것을 명했어요.

이후 이황이 길러낸 많은 제자는 이후 조선을 이끌어가는 훌륭한 학자나 관리가 되었어요. 또한 그가 강의했던 작은 도산 서당은 이후 건물이 늘어 도산 서원으로 확대되었어요. 그 후 도산 서원은 경상도를 넘어 조선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발전했지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폐 1,000원권 앞면에는 이황의 초상화와 그가 근무했던 성균관 명륜당 건물이 있고, 뒷면에는 도산 서당과 주변 경치를 담은 그림이 있어요. 이처럼 화폐에 담길 정도로 이황은 조선 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랍니다.

여러분! 이번 방학 때 도산 서원에 가서 퇴계 이황의 삶과 가르침을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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