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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외교의 중심을 잡다

<광해군 묘(경기 남양주시)>   

“큰일 났네, 큰일 났어. 함경도마저 왜군에 짓밟히고, 임금님은 도망 다니기에 바쁘니. 이 나라가 어찌 될꼬.”

“자네 아직 소식 못 들었는가? 세자께서 싸움터를 누비며 나라를 이끌고 계신다네. 이 덕에 우리 군의 사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하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왜 세자가 전쟁터에서 선조 대신 조선을 이끌게 된 것일까요? 이 세자는 누구일까요?

전쟁터에서 나라를 이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그때까지 조선은 아직 세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전란 중에 임금이 잘못될 수도 있어 세자 책봉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어요.

사실 광해군은 임금의 후궁인 공빈 김씨에게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세자 책봉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그런데 당시 적자는 없었고, 형인 임해군은 말썽을 자주 일으켰어요. 반면 동생 광해군은 어질고 총명하였지요.

왜군들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고, 전쟁 상황은 점점 더 조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어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세자를 빨리 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고, 선조와 신하들은 광해군을 세자로 결정했어요. 그렇게 세자가 된 광해군은 선조를 따라 피난길에 올랐어요.

“전하, 이 땅을 버리고 떠나시면 나라는 어찌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백성은 누구를 의지하고 살란 말씀이옵니까?”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선조는 중국에 원병을 청한다는 구실로 급히 의주로 피난하였어요.

이때 세자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전란을 지휘하였어요. 그러자 분전하는 세자의 소식을 듣고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갔어요. 도망가는 조정을 보며 흩어졌던 민심도 다시 모이기 시작했지요.

“세자께서 비바람 속에서도 산중에서 조선을 이끌고 있소”

“와~ 이제 우리도 왜군들에 맞서 제대로 싸워 봅시다.”

“지난번 전투도 세자께서 군사들을 격려해서 이겼다 하오.”

군사들의 사기는 높아졌고, 백성들은 희망을 갖게 되었어요. 광해군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위험천만한 전쟁터 한복판으로 들어가 사실상 나라의 중심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어요.

<백성들을 이끄는 광해군>   

어렵게 왕위에 오르다

전쟁이 끝나면 당연히 광해군이 그 다음 왕위를 이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지요. 위험한 전쟁터에서 선조를 대신해 조선을 성공적으로 잘 이끌었으나 돌아온 것은 칭찬이 아니라 견제였어요.

명도 전란을 이끌었던 광해군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세자 책봉은 승인하지 않았어요.

“세자는 당연히 장자가 되어야 한다. 받아들일 수 없다!”

광해군은 세자로 있으면서도 불안해졌어요. 반면 전쟁 중에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해 위신을 크게 잃은 선조는 내심 이러한 상황을 방관하면서 광해군을 견제하고자 했어요.

그러던 중 선조는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였고, 이들 사이에서 영창대군이 태어났어요. 선조는 매우 기뻐하였어요. 아에 몇몇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만들고자 하였어요.

‘걱정이구나. 명은 세자로 인정할 수 없다 하고, 아바마마는 날 미워하는 것 같고. 적자인 영창대군마저 태어났으니…’

영창대군이 태어남으로써 명과 선조의 견제를 받는 광해군의 앞날이 더 불확실해졌어요.

광해군은 이럴수록 몸을 더욱 낮추고 숨죽여 지냈어요. 행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까봐 조심 또 조심했어요.

그러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어요. 선조가 돌연 쓰러져 자리에 눕게 된 것이에요. 사태는 긴박하게 돌아갔지요. 특히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고자 했던 신하들에게는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었어요. 결국 선조가 죽고,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어요.

대동법을 실시하다

오늘날 국민들은 나라에 세금을 내고, 나라는 이 세금으로 필요한 일을 하지요.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였어요. 토지에 매기는 조세, 군사의 의무를 져야하는 군역, 그리고 각 지방의 유명한 특산물을 내게 하는 공납이 있었어요.

특히 공납은 백성들에게 아주 큰 부담을 주었어요. 해마다 내야 하는 특산물은 정해져 있었어요. 게다가 그 지역에서 나지도 않는 물품을 내야하는 일까지 생겼어요.

“올해에도 난 특산물을 구하러 먼 지역까지 다녀와야 하네.”

“그마저 구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지난번 수산물은 운반 도중 죄다 썩어 곤란했다네.”

해마다 백성들은 특산물을 준비하느라 난리였어요. 백성들의 허리는 휠 지경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특산물을 대신 내주고 이자를 붙여 대가를 받는 일이 생겨났어요. 이를 방납이라 해요. 언뜻보면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듯 보였어요. 하지만 방납을 담당하는 이들은 관아와 짜고 자신들이 마련한 물건이 아니면 퇴짜를 놓아 버렸어요.

“최고의 품질이 아니다. 불합격! 다시 준비하시오.”

어느새 이들을 통하여만 공물을 낼 수 있게 되어 버렸지요.

“이제 가격은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한다.”

공물을 독점한 방납으로 인해 공물의 가격은 폭등하였어요. 방납으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은 오히려 훨씬 커져 버렸어요.

백성들 중에는 빚에 쪼들려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경우까지 생겼어요. 이로 인해 나라의 수입도 줄어들었어요.

“전하, 방납 때문에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앞으로 공납은 특산물 대신 쌀로 통일해서 내도록 하겠소.”

광해군은 모든 공물을 지역 특산품 대신 쌀, 옷감 등으로 대신 내도록 하였어요. 이를 ‘대동법’이라고 해요.

1608년 5월 대동법은 우선 경기도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되었어요. 경기도 백성들의 반응은 상당히 뜨거웠어요.

대동법이 우리 백성들의 삶을 살렸다.

대동법 시행은 당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어요. 방납을 통해 경제적으로 이득을 보던 세력들은 거세게 반발하였어요. 그럼에도 광해군은 경기도에서의 대동법 시행을 끝까지 지켜냈어요.

이후 대동법은 점차 확산되어 17세기 후반에는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어요. 대동법의 시행은 농민들의 부담을 크게 줄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대동법시행기념비(경기 평택시)>   

실리적인 외교를 펼치다

“전하, 명이 우리에게 지원병을 요청하옵나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북방 정세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어요. 명은 국력이 약해져 점점 망해 가고 있었어요. 반면 만주에서는 누루하치 세력을 중심으로 한 여진족이 급성장하고 있었지요. 세력을 키운 여진족은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어요. 이에 위협을 느낀 명은 조선에게 후금을 치고자 하니 군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어요.

‘지금 명은 약해지고 있고 후금은 강해지고 있다. 섣불리 우리 군사를 보냈다가는 위험해질 게 뻔하다.’

‘군사를 보내면 여진과 적이 될 터 뒷감당을 어찌하겠는가?’

그간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던 광해군의 고민은 깊어만 갔어요.

“전하, 즉시 지원병을 보내야 합니다. 명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주었던 은혜의 나라이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명은 우리 사대부들에게 아버지의 나라이옵니다. 어찌 군신의 도리를 져버리려 하시옵니까?”

대부분의 신하들은 명과의 의리를 생각해 군사를 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어요. 고민을 거듭하던 광해군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어요.

“강홍립 장군에게 1만의 병사를 주어 명을 도우라 하시오.”

그런 후에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을 따로 은밀히 불렀어요.

“그대에게 특별히 당부할 것이 있소. 싸우더라도 적극적으로 싸우지는 마시오. 지금 명은 국론이 분열되어 있고 누르하치의 세력은 강하니 우리가 후금을 이길 수는 없소.”

<광해군의 중립 외교>   

조선군과 명군은 후금의 대군과 만나 격렬히 싸웠어요.

“물러서지 마라! 조·명 연합군이라고 별 볼일 없구나.”

후금은 명군을 총공격하였고, 명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어요. 기회를 엿보던 강홍립의 조선군도 후금에 항복하였지요.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혔어요.

“싸우러 간 장수가 투항하였으니 강홍립을 처벌하소서.”

이런 신하들에 대해 광해군은 오히려 꾸짖어 말했어요.

“그대들은 어찌 나라 밖 돌아가는 사정을 모른다 말이오. 어차피 명은 망할 것이오. 우리가 저 강해진 후금을 이길 수 있다 보오? 우리에게는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오.”

조선의 속뜻을 안 후금은 화친의 사신을 보내 왔어요. 명은 조선의 의도를 의심했지만, 광해군은 외교적 계책으로 이를 극복하였지요.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기에 큰 전란을 피할 수 있었어요. 광해군은 나라와 백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외교를 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이유로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말았어요. 새어머니이자 영창대군의 친어머니인 인목 대비도 궁에 가두어 버렸어요. 이러한 광해군의 행동은 사람의 도리를 중시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쉽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이 일은 광해군을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좋은 빌미가 되었어요.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어요.

광해군은 여러가지 중요한 업적을 남겼지만, 쫓겨난 임금이었기 때문에 ‘조’, ‘종’ 같은 왕의 정식 명칭과 ‘능’과 같은 왕 지위의 무덤을 갖지 못하였어요. 그런 광해군에 대해 과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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