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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갑신정변을 일으키다

<우정총국(서울 종로구)>   

“그 소식 들었나? 어제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큰불이 났다고 하던데?”

“맞아! 그 일 때문에 주상 전하께서 처소를 창덕궁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셨다고 하더구먼.”

“김옥균이 중심이 된 개화당이 한 일이라더군. 그 사람들이 새로운 정부를 만들고 개혁안도 내걸었고...”

개화당이 내건 개혁안은 무엇일까요? 개화당을 이끈 김옥균은 어떤 인물일까요?

한양의 북촌에서 살게 되다

김옥균은 1851년 충청남도 공주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당시 조선은 안동 김씨 가문이 권력을 잡고 세도 정치를 펼치던 시기에요. 김옥균도 안동 김씨였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집안의 다른 사람들처럼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시골 양반으로 살고 있었어요.

“옥균아! 너는 이제부터 한양 북촌의 김병기 대감댁에 가서 살아야 한다. 그분이 너를 양자로 삼는다고 하시는구나.”

“북촌은 어떤 곳인가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동네란다. 권세 높은 양반들이 많이 사는 곳이지.”

김옥균이 6살 되던 어느 날, 아버지는 그를 친척이었던 김병기의 양자로 보냈어요. 김병기는 김옥균의 아버지와 달리 높은 벼슬을 하고 있던 사람인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던 것이지요. 아들이 없는 친척에게 양자를 보내는 것은 조선 시대에 흔히 있던 일이에요.

이때부터 김옥균은 한양의 북촌에서 살았어요. 덕분에 북촌의 양반 자제들과 사귀면서 친구로 지냈어요. 어려서부터 문장이나 시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렸던 김옥균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22세에 과거 시험에서 1등인 장원급제를 했어요.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 근대 국가를 꿈꾸다

김옥균은 자신처럼 북촌에 살고 있던 박규수의 사랑방을 자주 찾아갔어요.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로 청을 두 번이나 다녀왔어요. 그는 청에 들어온 서양의 근대 문물을 본 후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생각을 개화사상이라고 해요. 박규수의 제자가 된 김옥균은 개화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요. 그리고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훗날 뜻을 같이하게 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만나게 되지요.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인 개화당 사람들>   

그러던 중 1875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어요. 이때 박규수는 개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후 직접 나라를 다스리던 고종은 박규수의 주장을 받아들였어요.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부산을 비롯하여 3개의 항구를 개항했어요.

1881년 조선 조정은 일본에 ‘조사시찰단’, 청에 ‘영선사’를 보냈어요. 두 나라가 어떻게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죠. 이를 바탕으로 외국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려는 정책을 펼쳤고 신식 군대도 만들었어요.

1882년 큰 일이 벌어졌어요. 구식 군인들이 신식 군인보다 차별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켰어요. 바로 임오군란이 일어난 것이죠.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고 왕비가 궁궐에서 몸을 피해 장호원까지 도망갔어요. 임오군란은 청의 군대가 들어와 진압되었어요. 그 후 조선 조정은 청의 간섭을 받게 되었어요.

“조선이 근대 사회가 되려면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해요. 또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여러 가지 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아닙니다. 청의 보호를 받으면서 외교를 펼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에요.”

임오군란 후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함께 개화사상을 공부하던 사람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어요. 김옥균은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하루빨리 근대적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김옥균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을 급진 개화파 또는 개화당이라 해요.

<미국에 사절단으로 간 사람들(1883년)>   
독립기념관

갑신정변을 일으키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근대적 개혁을 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잡을 궁리를 했어요. 그런데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의 군대가 있어 쉽지 않았어요. 개화당은 충분한 군사력이 없었거든요. 또 정변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돈도 충분하지 않았고요.

“우리 일본이 군사 150명과 3백만 엔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일본이 우리의 거사에 도움을 준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김옥균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정치권력을 잡으려 했어요. 그러던 중 좋은 기회가 생겼어요. 정변의 걸림돌이라 생각했던 청의 군대 일부가 조선에서 철수했거든요. 이 무렵 청은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어요. 그래서 조선에 주둔한 3,000명의 군인 중 절반인 1,500명이 조선에 남게 되었어요. 일본이 도움을 준다는 군사력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김옥균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어요.

“불이야!”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근대적 우편 업무를 담당하는 우정총국이 문을 여는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부근의 한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기 위해 밖에 나갔던 민영익이 정변 세력에 의해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왔어요. 순식간에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잔치에 모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건물을 빠져나갔어요.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창덕궁에 있던 왕과 왕비에게 청의 군대가 폭동을 일으켰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피난을 가야 한다며 왕과 왕비를 모시고 경우궁으로 갔어요.

정변을 일으킨 다음 날 아침 개화당은 고종의 허락을 받아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어요. 한편, 왕비는 지난밤에 일어난 사건을 청의 군대가 일으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어요. 청과 은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은 왕비는 경우궁이 비좁다며 창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김옥균은 창덕궁이 너무 넓어서 청의 군대가 오면 지키기 쉽지 않다고 반대했어요. 그러나 왕비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개화당은 하는 수 없이 왕과 왕비의 처소를 창덕궁으로 옮겼어요.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3일째 되던 12월 6일 개화당은 근대적 개혁안을 발표했어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의 개혁안>   

그날 오후 청의 군대가 창덕궁으로 들이닥쳐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어요. 얼마간의 총격전이 끝나고 일본 군인들이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자신을 스스로 지킬 군인이 많지 않았던 개화당도 일본 군인을 따라 창덕궁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갑신정변은 일어난 지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답니다.

그 후 개화당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변의 실패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어요. 특히 홍영식은 고종을 끝까지 모시고 있다가 청군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또 김옥균과 박영효 등 9명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어요. 이로써 개화당 세력은 한동안 조선에서 살 수 없었어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동안 조선에서 개화정책이 제대로 추진되기 힘들었답니다.

일본에서의 길고 긴 망명 생활

김옥균에게 일본은 그리 낯선 곳은 아니었어요.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었거든요. 일본에 도착한 직후 얼마간은 일본인의 집에 머물 수 있었어요. 그러나 얼마 후 셋집을 얻어 나올 수밖에 없었고, 한 해 두 해가 흐르면서 10년이나 살게 되었답니다.

일본 정부도 점차 김옥균이 일본에 와서 사는 것을 반기지 않았어요. 심지어는 조선, 청과의 외교에 방해가 된다며 남쪽과 북쪽에 있는 섬으로 각각 유배를 보내기도 했어요. 4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다시 도쿄로 돌아온 김옥균은 1894년 상하이로 망명했어요. 청의 권력자를 만나 조선과 일본, 중국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서양 세력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홍종우가 쏜 총에 맞아 죽임을 당했어요. 실은 홍종우는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보낸 사람이었어요.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통해 청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주독립 국가를 만들고자 했어요. 또 개혁안의 내용 중에는 당시 조선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어요. 하지만 김옥균을 포함한 개화당의 개혁안은 백성들의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게 되죠. 그 이유는 뭘까요? 아마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일본의 군사력에 너무 의존해서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조선의 근대 국가 수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갑신정변의 주역 :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독립기념관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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