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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끌다

<황룡전적비(전남 장성군)>   

“너는 피해를 본 것이 없는데 왜 동학군들과 함께 난을 일으켰느냐?”

“나 하나 피해를 보았다고 난을 일으킨 것이 어찌 사내가 할 일 이겠느냐? 백성이 억울해 하고 슬퍼하니 그 피해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오로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동학군들과 함께 봉기했다고 한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당시 백성들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을까요?

동학을 믿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이 사람은 바로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끈 전봉준이에요. 그는 1855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그의 집안은 벼슬을 하던 양반 가문이었으나 점점 집안이 기울어 가난해졌어요.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이름 대신 녹두라고 불렀어요. 작은 키에 단단한 모습이 마치 녹두 같았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녹두장군이라고 불리게 된 거예요.

전봉준이 살았던 시기 조선은 몹시 혼란스러웠어요. 안으로는 민씨 가문이 권력을 휘두르며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탐관오리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 자기 배만 불리느라 정신없었고요. 백성들은 세금을 못 내 캄캄한 밤에 도망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밖으로는 서양 세력들은 항구를 열고 교역을 하자며 조선의 문을 두드렸어요. 더욱이 청과 일본은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경쟁하고 있었지요.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백성들은 마음 붙일 곳이 없어 종교에 의지하기도 했어요.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도 서서히 백성들 사이에 퍼져 나가며 희망을 준 종교였지요.

동학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가르쳤거든요. 이러한 가르침은 전봉준을 동학으로 이끌었고 그에게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어요. 그는 고부 지역(전라북도 정읍) 동학 교단의 책임자인 접주가 되어 활동했어요.

고부에서 농민들과 함께 봉기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봉준이 사는 고부에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해 왔어요. 고부는 동진강 물줄기가 흘러 가뭄에 쉽게 메마르지 않으며 기름진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 살기 좋은 곳이었지요.

“그 소식 들었나? 새로 온 군수가 글쎄 또 보를 쌓는다는군.”

“뭐라고! 보가 이미 있는데, 뭔 또 보를 쌓는단 말인가? 보를 쌓으려면 우리만 죽어나겠군.”

보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하천이나 냇가에 둑을 쌓고 물을 가두어 두는 곳이지요. 농민들은 군수가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게 틀림없다며 불만을 터뜨렸어요. 조병갑은 보를 쌓는다며 주인 허락 없이 나무를 베고, 농민들을 동원해 일을 시켰지요. 그래놓고선 기가 막히는 이야기를 했어요.

“농사짓는데 물을 끌어다 썼으니 물세를 내도록하라!”

조병갑의 못된 짓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불효세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며 농민들을 못살게 했지요. 자기 아버지를 기리는 비석을 세운다고 1천 냥이나 되는 돈을 거두기도 했어요.

농민들의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갔어요. 불만을 이야기하러 조병갑을 찾아가 보았지만 소용없었어요. 오히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요. 그중에는 전봉준의 아버지도 있었어요.

“아버님이 감옥에서 돌아가셨다고?”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전봉준은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어요. 농민들과 함께 고부 관아로 쳐들어가기로 마음먹었어요. 백성들의 피를 빨아 욕심만 채우는 탐관오리들을 처단할 생각이었지요. 전봉준과 농민들은 사발통문을 만들어 돌리며 봉기를 일으키기로 마음을 모았어요.

<동학농민군 사발통문
함께 봉기한 사람들의 이름이 사발 모양으로 빙 둘러 적혀 있어 누가 주동자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1894년 1월, 전봉준이 이끄는 1,000여 명의 농민들은 고부 관아로 쳐들어갔어요. 조병갑은 이미 달아난 상태였어요.

“무기고에서 무기를 빼내어 무장하라! 창고의 곡식들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자! 죄 없이 옥에 갇힌 사람들도 풀어주고, 만석보도 허물어 버리자!”

고부 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에서는 조병갑을 끌어 내리고 새로운 군수를 보냈지요.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끌다

새로 온 군수는 조병갑과 다르게 행동했어요. 농민들의 마음을 달래려는 마음에서였지요. 하지만 고부 봉기를 조사하러 온 조사관인 이용태가 갖가지 못된 짓을 저질렀어요. 농민들의 재물을 빼앗고, 매질하는가 하면 고부관아 습격에 참여한 농민과 그 가족들을 동학교도라며 마구 잡아들였지요.

상황이 심각해지자 1894년 3월, 전봉준은 농민군을 모아 무장(전라북도 고창)에서 봉기하였어요. 이들은 고부를 점령하고 이후 백산으로 이동했지요. 대나무 창을 든 농민들이 전라도 지역 곳곳에서 하나 둘 백산으로 모여들었어요. 이들 중에는 동학을 믿는 동학교도들도 있었어요. 김개남, 손화중 등이 그들을 이끌었지요.

전봉준은 동학 농민군 앞에서 결의문을 읽어 내려갔어요.

<봉기하는 동학 농민군>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허약하면 나라가 쇠약해진다. 지금 조정과 관리들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히 할 대책은 생각지 아니하고 녹봉만 받아먹고 있다.”

전봉준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의로운 깃발을 들고 일어났음을 밝혔지요.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로 들어가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들을 모두 없앨 것을 결의했어요.

당시 모인 동학 농민군은 1만여 명에 가까웠어요. 백산에 모인 동학 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었대요. 사람들이 앉으면 죽창만 보이고, 서면 흰옷 입은 봉기군으로 뒤덮인 흰 산이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동학 농민군들의 봉기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 관군을 보내왔어요. 동학 농민군들은 황토현에서 그들을 크게 물리쳤어요. 그 기세를 몰아 황룡촌 전투에서는 장태를 이용해 관군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승리를 거두었어요. 장태는 닭을 키울 때 사용하는 것인데 안에 짚을 넣어 굴리며 총알을 막는 데 사용했지요.

<장태를 이용하는 동학 농민군>   

연이어 승리를 거둔 동학 농민군은 4월 말 전라도 지역의 중심지인 전주성까지 점령해버렸어요. 전주성 점령 소식을 전해 들은 고종은 봉기군에게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왕의 명령에도 봉기군이 해산하지 않자 청에 군대를 요청했어요. 청의 군대가 도착하자, 곧바로 일본도 군대를 보냈지요.

일본군의 출동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정부는 동학 농민군에게 그만 싸우고 화약을 맺을 것을 제안했어요. 조선이 청과 일본의 전쟁터가 될 위기에 처하자 동학 농민군도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주 화약을 맺었지요. 그들은 탐관오리 처벌, 신분제 폐지, 토지를 균등하게 나눌 것 등의 내용을 담은 개혁안을 실시할 것을 약속받고 스스로 해산했어요.

이후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고을 53곳에 자치 행정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 스스로 여러 가지 개혁을 해나갔지요.

외국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봉기하다

동학 농민군이 해산했는데도 청과 일본군은 물러가지 않았어요. 오히려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적인 허수아비 정권을 세우고 조선의 일에 간섭하려고 했어요. 일본은 청의 군대에 공격을 가해 청일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에서 승리한 후 기세를 몰아 청의 본토까지 공격했지요.

조선에서 일본이 물러가지 않자, 1894년 9월 동학 농민군은 다시 봉기했어요. 삼례지방에 모여든 봉기군은 10만 명 가까이 되었어요.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역의 동학교도와 손병희가 이끄는 충청도, 경상도 지역의 동학교도와 농민군은 논산에서 다시 모였어요. 공주를 점령한 뒤 한성까지 쳐들어갈 생각이었지요.

동학 농민군이 논산에 모인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정부는 군사를 출동시켰어요.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과 관군이 함께 3갈래의 길로 나뉘어 공격해왔지요. 드디어 동학 농민군의 앞날을 결정지을 전투가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벌어졌어요.

<동학 농민군의 활약>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부정부패한 관리들을 벌주자!”

동학 농민군은 소리 높여 외치며 있는 힘을 다해 싸웠어요. 하지만 신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는 일은 만만치 않았어요. 죽음을 무릅쓰고 고개를 향해 오르며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지요. 7일간 50여 차례나 계속된 전투는 결국 동학 농민군의 패배로 끝이 났어요. 살아남은 동학 농민군이 1만여 명 중 5백여 명이었다고 하니, 전투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우금치 고개는 여기저기 쌓인 시체로 가득했어요. 동학 농민군뿐만 아니라 정부군도 있었지요. 모두가 조선 사람들이었어요.

아직도 불리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금치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은 뒤 남은 동학 농민군은 흩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현상금이 내걸린 전봉준도 몸을 피해야 했지요. 한겨울 추운 날씨에 이곳저곳 숨어다니던 전봉준은 전라북도 순창에 있는 부하의 집으로 피신했어요.

하지만 현상금에 눈이 먼 부하가 신고해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졌어요. 전봉준은 체포 과정에서 심하게 다쳤어요. 김개남과 손화중 등 다른 지도자들도 체포되었지요.

재판장으로 나오는 전봉준은 걷지도 못하고 가마에 실려 나왔어요.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재판을 받았지만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어요.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 본심이다. 탐관오리들의 못된 짓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진압되고 전봉준은 처형되었지만, 사람들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았어요.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사람들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불렀어요. 녹두장군 전봉준을 기리면서요. 또 그들이 목놓아 주장했던 개혁의 내용은 이후 하나씩 이루어지게 되지요.

< 잡혀가는 전봉준>   

130여 년 전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봉기한 전봉준, 시대는 다르지만 전봉준이 바랐던 세상과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비슷한 점이 있어요. 바로 어떠한 차별 없이 사람들 누구나 귀하게 대접받은 세상이지요.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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