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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헤이그에 특사로 가다

<이준 열사 묘역(서울 강북구)>   

“이준 검사! 나를 대신해 비밀리에 네덜란드에 다녀오세요.”

“폐하! 소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을사늑약이 나의 허락 없이 체결된 불법 조약임을 세계에 널리 알려주세요.”

“소신 목숨을 바쳐 특사의 소임을 다하고 오겠나이다.”

을사늑약을 통해 일본은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고립시키려 하였어요. 이때 고종과 헤이그 특사들은 어떤 방법으로 일본의 침략을 막고자 했을까요? 이들의 노력은 성공했을까요?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이 고립되다

고종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막고자 했어요. 얼지 않는 항구를 얻기 위해 남쪽으로 진출하고 싶었던 러시아도 대한 제국의 사정에 관심이 많았지요. 그 와중에 명성 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고 조선의 운명은 더욱 위태로워졌어요.

1904년, 대륙으로 세력을 넓히려는 일본과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가 맞붙어 전쟁을 벌였어요. 러시아와 일본은 주로 우리나라의 땅과 바다, 중국의 요동 반도 여러 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어요.

<러일 전쟁을 거인과 난쟁이의 전쟁으로 비유한 풍자화>   
프랑스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

많은 나라들이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할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어요. 러시아가 아시아 대륙으로 세력을 넓히는 것을 막고 싶었던 미국과 영국이 뒤에서 일본을 도왔기 때문이었어요.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 제국을 강제로 지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어요. 서양의 여러 나라도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일본이 대한 제국을 지배하는 것을 은밀하게 인정했지요.

전쟁이 끝나자마자 일본은 이완용을 비롯해 을사오적이라 불리게 된 친일 관료들을 동원해 을사늑약을 맺었어요. 을사늑약에는 대한 제국이 일본의 허락 없이 다른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어요. 이 조약으로 일본은 대한 제국을 세계 무대에서 고립시키려고 했어요.

<대한 제국 옛 미국 공사관의 모습>   
문화재청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먼저 해외에 있던 대한 제국의 공사관들을 모두 없애고, 외교관들은 모두 돌아오게 했어요. 그리고는 대한 제국과 관련된 모든 외교 활동은 통감부를 통해 해외의 일본공사관의 일본인들이 대신하게 하였지요. 일본이 외교권을 손아귀에 넣으면서 대한 제국은 당당한 나라로 인정받기 어려워졌어요.

을사늑약에 반대하다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난 이준은 1895년 37세에 법관양성소를 1회로 졸업했어요. 그리고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관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막 관리가 된지 1주일 만에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일이 생겼어요. 이때 이준은 여러 이유로 검사가 된지 33일 만에 파면되었어요.

검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이준은 독립협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 반대파의 거센 공격을 받기도 했지요. 반대파를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이준은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더욱 깊게 공부했어요.

대한 제국으로 다시 돌아온 이준은 정부가 바른길로 가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어요. 그리고 다시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만민 공동회 운동을 펼쳤어요. 여러 단체와 사람들을 모아 거리에서 집회를 열고 정부를 맹렬히 비판하였지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여러 활동을 하던 이준은 감옥에 가기도 했고, 귀양을 가기도 했어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준은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젊은 청년들과 을사늑약 체결 반대운동을 벌이며 상소문을 직접 쓰기도 했어요.

을사늑약 이후 이준은 다시 검사가 되었어요. 이때 이준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는 일이 벌어졌어요.

황태자의 결혼을 앞두고 고종 황제가 은사령(특별 사면)을 내렸어요. 이때 일본을 따르던 상관이 사면 대상자 명단을 이준에게 주며 그대로 써서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어요. 이준은 이 명단에 을사늑약을 반대하다 잡혀 온 사람들과 매국노를 처단하려다 체포된 사람들의 이름을 끼워 넣었어요. 이준은 사면 대상자 명단은 국법에 따라 검사가 직접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지요. 그러나 상관은 이를 괘씸하게 여기고 자신이 작성한 명단만을 고종 황제에게 올렸어요.

이를 알게 된 이준은 상관이 법을 어겼다며 그를 소송하여 재판을 열 것을 요구하였어요. 그러자 상관은 거꾸로 이를 빌미로 이준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어 버렸어요.

“아랫사람이 어찌 윗사람을 명령을 거부하였는가?”

“판사께서 일본에서 공부했다더니 오늘 보니 법률에 대해 매우 무지하시군요!”

“이자가! 어찌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판사를 우롱하는가?”

“임금이 잘못하면 신하가 그것을 고칠 것을 말하고, 아버지가 허물이 있으면 자식이 이를 고칠 것을 말하거늘, 윗사람이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지 않았는데 이를 어찌 따져 말하지 못하겠습니까?”

결국 이 재판으로 이준은 태형 70대를 선고 받았어요. 그러나 태형을 받고도 바로 다음날 태연하게 출근해 친일파 관리들을 놀라게 했다고 해요.

고종 황제, 비밀리에 특사를 보내다

고종 황제는 거세지는 일본의 침략을 어떻게든 막아보고 싶었어요. 이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각국 대표들이 모여 세계 평화에 대해 논의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예정이었어요.

이 회의의 목적은 세계 곳곳에서 식민지를 넓혀가던 서양의 힘 있는 나라들이 서로 충돌해 생길 수 있는 전쟁을 미리 막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고종 황제에게 만국평화회의는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을 세계에 널리 알릴 마지막 기회로 보였어요.

<헤이그 특사의 이동 경로>   

고종 황제의 눈에 을사늑약을 강력하게 반대하던 이준과 이상설이 보였어요. 이준은 검사 출신으로 법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윗사람이 저지른 불법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고 따져 바로잡는 강직함을 갖고 있었어요. 이상설 또한 을사늑약에 반대해 관직을 버리고 북간도로 망명하여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요. 고종 황제는 특사로 두 사람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생각했어요.

1907년 4월, 고종 황제로부터 은밀히 명령을 받은 이준은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아내에게도 부산에 출장을 다녀온다며 자신의 임무를 숨길 정도였어요.

이준이 출발할 무렵 대한 제국을 돕던 미국인 헐버트도 은밀히 고종 황제의 명령을 받고 스위스로 떠났어요. 일본이 헐버트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사이 이준은 무사히 부산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날 수 있었어요.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고종 황제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은 이상설이 이준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상설과 이준은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어요. 9,300여 km! 배로 가면 한 달 이상이 걸렸을 거리를 15일 만에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브르크에 도착했어요.

상트페테르브르크에 도착한 이준은 전 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을 찾아갔어요. 이범진은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 공사관들이 폐쇄될 때 귀국하지 않고 아들 이위종과 함께 뒷일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특사 일행은 헤이그로 출발할 것을 미루면서 러시아 황제를 만나 고종 황제의 편지를 전달하고자 했어요. 그러나 15일이 지나도 러시아 황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 않았어요. 대한 제국을 지지하던 러시아의 정책이 그사이에 변해 있었던 거예요.

러시아는 일본을 비밀리에 만나 대한 제국의 일본 지배를 인정하고 어떤 방해나 간섭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어요. 대신 일본은 만주와 외몽골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를 인정해 주었어요. 물론 은밀한 거래를 한 러시아는 이를 대한 제국에 알려주지도 않았지요.

어쩔 수 없이 특사 일행은 여러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로 떠났어요. 그리고 1907년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어요. 이미 만국평화회의가 열린지 열흘이 지난 후였어요.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델란드 헤이그 기사의 집>   
KBS 한국사 傳

3인의 특사, 대한 제국의 자주독립을 세계에 알리다

특사들은 늦었지만 그래도 회의장에 들어가 을사늑약이 고종 황제의 허가를 받지 못한 불법 조약임을 알리고, 대한 제국의 처한 상황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고자 했어요. 그러나 러시아의 배신과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러시아 출신 의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으나 이 또한 이뤄지지 못했어요. 러시아 본국에서 이미 대한 제국의 특사들을 돕지 말라는 전보가 도착해 있었던 거예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특사 일행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마침 만국평화회의장 주변에는 전쟁과 서양의 식민지 지배를 반대하는 많은 언론과 시민운동가들이 있었어요.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한 특사들은 밖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들에게 대한 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어요.

“특사 여러분은 왜 이 평화회의를 방해하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각국 대표단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각국의 대표들은 세계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조약을 맺을 겁니다.”

“조약이라고요? 그렇다면 1905년 일본이 강제로 맺은 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희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것으로 조약은 무효입니다.”

“특사 여러분은 일본에 큰 힘이 있다는 것을 잊으셨군요.”

“일본의 힘을 인정한다면 이곳에서 정의와 법과 권리에 대해 말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한 제국이 왜 희생되어야 합니까? 솔직하게 총과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왜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특사들은 기자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기도 했어요.

“대한 제국은 산이 많고 그 산의 골짜기 하나하나가 천연 요새입니다. 우리 2천만 국민은 대한 제국을 동북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고,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요? 지금 일본은 대한 제국을 집어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 제국은 외세가 침략했다고 손쉽게 무릎을 꿇을 나라가 아닙니다.”

<회의장 밖에서 연설을 하는 특사들>   

특사들의 연설은 기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어요. 연설회에 참석한 기자 중 몇 명은 대한 제국에서의 일본의 만행을 막기 위한 결의문을 채택하자고도 했어요. 특사들의 활동 이후 서양 언론들이 대한 제국이 처한 현실을 자세하게 다루기 시작했어요. 특사들의 외교 활동으로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대한 제국의 사정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네덜란드 땅에 묻히다

특사들이 헤이그에서 활동을 한지 20여 일 특사들의 만국평화회의 참석은 끝내 거부되었어요. 이때 이준이 호텔 방에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했어요. 사망 원인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어요. 오랜 여행과 쉼 없는 활동 때문에 병을 얻어 사망했다는 말도 있고, 대한 제국의 독립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자살했다는 소문도 돌았어요. 분명한 것은 이준이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해 크게 실망하고 애통해했다는 것이에요.

조선통감부에도 특사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어요. 당황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도 모르게 특사가 보내졌다는 사실에 분노하였어요.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를 찾아가 이를 심하게 따져 물었어요. 그리고는 이 사건을 빌미로 대한 제국을 빼앗는데 방해가 되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지요.

먼 나라에서 비통한 죽음을 맞이한 이준은 네덜란드에 묻혔어요. 그리고 1963년 우리나라에 다시 모셔왔어요. 이준의 묘 주변의 비석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어요.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특사로서 임무를 다하지 못한 이준이 눈을 감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준이 원하던 대한 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헤이그 특사 :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국사편찬위원회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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