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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 독립운동 의병장, 윤희순

<윤희순 동상(강원 춘천시)>   
춘천시청

“참말로 왜놈들이 국모님을 죽였단 말인가?”

“그려, 그래서 남정네들이 의병한다고 죄다 나갔다는구먼”

“밥은 먹었을라나? 먹을 게 없어 쫄쫄 굶는 의병이 많다던데.”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어요. 윤희순이 사는 춘천에서도 많은 의병들이 활동하였는데 그 중 한 무리는 그녀의 시아버지인 유홍석이 이끌었지요. 비록 여성의 몸이지만 윤희순도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았어요. 윤희순은 어떠한 의병 활동을 하였을까요?

의병들에게 밥을 지어 주다

어느 날이었어요. 일본군에게 쫓겨 도망치던 의병대들이 윤희순이 사는 마을에 몰려와 밥을 달라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어요.

마을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당황하였어요.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곡식을 어디서 구하며, 자칫 의병들을 도와주었다가 일본군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어요. 이때 윤희순이 마을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 큰소리로 외쳤어요.

“우리 바깥분들도 모두 저들처럼 의병대에 나가 있소. 저들을 먹이는 게 바로 우리 남편과 아들들을 먹이는 게 아닙니까?”

사실 윤희순도 걱정은 되었어요. 집에 곡식이 남아 있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나라가 잘못되면 일본의 괴롭힘이 더 심해지리라는 건 뻔한 일이었어요.

윤희순은 어떻게든 의병들에게 밥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윤희순은 식구들이 먹어야 할 쌀은 물론 춘천 숯장수들이 숯을 사기 위해 갖다 놓은 곡식까지 다 털어 저녁밥을 지어 주었어요. 그러자 마을 사람들도 평소 아껴 두었던 곡식을 조금씩 내어놓기 시작하였어요.

윤희순은 너무나 감격했어요. 여러 사람들이 도와주니 일이 금방 해결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깨달았어요.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라고 말이죠.

노래를 지어 의병 활동을 하다

그날 저녁 윤희순은 마을 안사람들을 모아 놓고 의병 돕기에 나서자고 설득하였어요. 하지만 이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어요. 윤희순은 사람들은 저마다 어려운 상황에서 제 앞에 닥친 일에 급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의로운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의병 활동에 도움이 될 텐데.’

어느 날 윤희순이 아들을 데리고 지나갈 때였어요. 마을 아이들이 윤희순을 보고 의병에 미쳤다며 놀렸어요. 한 아이가 그럴싸하게 말에 노래 곡조를 붙이자 나머지 아이들은 후렴을 따라 불렀지요.

‘그래, 바로 이거구나!’

윤희순은 옳다구나 생각하며 노래 가사를 적었어요. 윤희순이 앉아서 노래를 부르니 마을 아이들이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몰려왔어요. 윤희순은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노래를 가르쳐 주었어요.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 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얼 할까 의병들을 도와주세. 내 집 없는 의병들 뒷바라지하여 보세. 우리들도 뭉치면 나라 찾기 운동이요.(중략) 나라 없이 어이 살며, 힘을 모아 도와주세. 만세 만세 만만세요. 우리 의병 만세로다.

윤희순이 노래를 잘하는 아이에게 칭찬을 해주자,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왠지 힘이 불끈 솟는 듯했어요.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윤희순>   

동네 아이들이 중얼중얼 노래를 불러대자 마을 사람들도 무심코 따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윤희순의 친척 어른들은 일본 귀에 들어가 해코지당할까 두려워 조심스러웠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노래를 짓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쳤어요.

〈왜놈 대장 보거라〉
우리 조선 사람 화가 나면 황소 호랑이니라. 우리가 너희 놈들 못 잡으면 후대에도 못 잡을 소냐. (중략) 이용도 그만하고 재주도 그만 부려라. 좋은 말로 달랠 때에 너희 나라로 가거라. 대장 놈들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왜놈 앞잡이들아〉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인고. 너희들은 무슨 일로 그다지도 모르는가. 이 나라에서 태어나서 나라에 은혜는 갚지는 못할 망정 제 나라를 팔아먹고 자기 성, 자기 조상, 자기 식구, 자기 몸뚱아리를 팔아서 돈을 벌며 명예를 얻어 어느 곳에 쓴단 말인가. (중략) 후대에 너희 자식, 손자까지 대대로 무슨 낯으로 이 나라에서 산단 말이냐. 후대에 너희 자손이 원망 않도록 하여라.

그러던 차에 의병 활동을 하던 유홍석이 길가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듭 패배하자 의병들이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져 고민하던 상황에서, 이 노래를 듣고는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좋은 묘안을 생각해냈어요.

유홍석은 윤희순에게 의병들이 훈련을 하거나, 의병들을 모을 때 부르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어요.

〈방어장〉
우리 조선 청년들아 의병하러 나가 보세. 의병하여 나라 찾자. 우리 임금 세도 없어 왜놈들이 강성하니 빨리 나와 의병하여 애국하고 충신되자~ 아낙네도 나와 의병을 돕는데 우리 청년들이 나라를 잃고 가만히 있을 쏘냐. 너도 나가고 나도 나가자. 나라 없이 살 수 있나.

윤희순이 만든 노랫소리는 쉽고 확실하게 백성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어요. 노래를 부르면 기운이 솟고, 모두 하나로 똘똘 뭉치는 효과가 있었어요.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1895년 유홍석이 춘천 유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을 때, 윤희순도 나라를 위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의병을 돕겠다고 나섰어요. 하지만 시아버지 유홍석은 말렸어요. 제사도 지내야 하고, 자손도 잘 키워야 한다고 말이죠. 남녀의 구별이 엄격한 시절이라 그녀도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나라는 점점 위태로워져만 갔어요.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더니 곧 광무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나라의 군대마저 해산시켰어요. 일본군과 의병들의 군사력 차이는 너무나도 컸어요. 의병들은 일본군에 쫓겨 중국 만주 지역까지 갔다가, 무기만 빼앗긴 채 돌아와야만 했어요.

윤희순은 이를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어요. 십여 년 전 의병을 일으킬 때처럼 마을을 돌아다니며 부녀자들도 의병 활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어요.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

“너도 나가고 나도 나가자. 나라 없이 살 수 있나.”

윤희순은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자들이 함께 부르게 했어요.

<〈안사람 의병가〉를 부르는 윤희순>   

〈안사람 의병가〉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도 뭉치면 왜놈 잡기 쉬울 새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없이 소용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 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중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윤희순의 안사람 의병가>   
국가보훈처

윤희순의 외침은 곧 노랫가락에 실려 마을 안팎으로 퍼져 나갔어요. 순식간에 의병 600여 명이 모였어요. 의암댁, 턱골댁, 벌골댁, 용문댁, 소리댁 등 마을 아낙으로만 이루어진 ‘안사람 의병대’가 조직되었어요. 마을 골짜기 여우내골에 의병 훈련장도 만들었어요. 안사람 의병대원들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군사 훈련을 받았어요.

그러나 의병대들에게는 제대로 된 무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안사람 의병대는 쇠붙이를 모아 화승총(불을 붙게 하는 노끈으로 화약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구식 소총)을 만들기도 하였어요. 여성들이 앞장서서 식량과 무기를 만들어 오자 의병대의 사기도 높아져만 갔어요.

일본은 의병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토벌대를 보냈어요. 워낙 무기가 우세하기 때문에 일본군이 의병들과의 싸움에서 지는 경우는 드물었지요. 일본은 이번에도 춘천 의병대들을 쉽사리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일본군들이 고갯마루를 내려오자 의병들은 일본군을 둘러싸면서 포위망을 좁혀 나갔어요. 첫 사격 소리가 울리자 천지가 진동하듯 화승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어요. 무기의 우세함을 믿고 있던 일본군들은 놀라 주춤거렸어요. 의병들의 수에 놀라고, 또한 무기에 다시 놀랐어요.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의병들의 위세에 당황한 일본군은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해치우자.”

“달아나는 놈들 꽁무니에 화승총을!”

춘천 의병대는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들과도 연합하여 활약하였어요. 다른 지역에서 의병들의 승리 소식도 들려 왔어요.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이어 가다

치열한 의병 활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었어요. 이에 유홍석은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어요. 그러자 윤희순은 지금 죽으면 일본만 좋은 일이지 뺏긴 나라를 어찌 되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만주 땅으로 먼저 건너가고 윤희순은 집의 살림을 정리하고 곧 뒤따라갔지요.

만주 땅에서 유홍석은 유제원과 함께 의병을 모으고 조직하였어요. 그러는 동안 윤희순은 여성들을 모아 황무지를 개간하여 식량을 마련하는 등 생계 유지에 힘을 쏟았어요. 일제의 감시 속에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 훈련도 하였어요.

만주에서 윤희순의 삶은 너무나 힘들었어요. 하지만 윤희순은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하는 가족을 뒷바라지하며 자신도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이어나갔어요.

이웃 마을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일깨워 주고자 하였고, 군자금을 모집해 항일 운동 단체에 전달하였어요. 그러다 보니 항일 운동을 함께 했던 중국인들 중에는 윤희순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았어요.

한편 윤희순은 독립지사의 여성들과 함께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데 힘썼어요. 학생들에게 목숨 바쳐 항일 운동에 앞장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항일 애국 노래를 가르쳐주어 힘과 용기를 불어넣었지요.

그러는 와중에 시아버지 유홍석이 숨을 거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유제원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먼 이국 땅에서 홀로 남게 된 윤희순은 외롭고 힘들었어요. 하지만, 시련을 극복하며 자식들을 독립운동가로 키우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어요.

윤희순의 아들 유돈상은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펼쳐 나갔어요. 3‧1 운동이 일어나자 유돈상은 사람들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어요. 그러나 국내 잠입을 시도하다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어요.

“실망하지 마라. 이럴 때일수록 독립지사들을 더 길러내야 한다.”

윤희순은 실의에 빠진 아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어요. 이후 유돈상은 다시 힘을 내 조선독립단 학교를 세우고 국권 회복과 항일 투쟁에 앞장설 독립운동가를 길러 냈어요. 윤희순도 조선독립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을 열심히 뒷바라지하였어요. 윤희순의 아들, 며느리, 조카까지 가족 모두가 독립 무장 투쟁에 앞장섰기 때문에 당시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가족 군대’라고 불렀어요.

1935년 윤희순의 아들 유돈상마저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제에 붙잡혀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났어요. 슬프게도 아들이 죽은 지 10여 일 후, 3대에 걸쳐 의병 활동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던 윤희순도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끝맺었어요. 그때 그녀의 나이 일흔여섯이었어요.

나라를 구하는 데에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며 나선 윤희순의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은 지금 우리들에게 큰 울림이 되고 있어요. 윤희순은 나라를 구하는 길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어요.

윤희순의 이야기를 공부하며 여러분은 무엇을 알게 되었나요? 옳은 무언가를 실행하고자 할 때 여러분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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