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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근대적인 개혁과 독립을 꿈꾼 서재필

<서재필 동상>   
독립기념관

“서재필 선생! 이번에 새로운 신문을 만들려고 하는데, 도와주십시오.”

“좋습니다. 신문 만드는 데 제가 앞장 서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라 안팎의 소식을 알리고, 자주독립의 정신을 일깨우기에는 신문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1896년에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어요. 한글과 영문으로 된 독립신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근대적 지식을 알게 되었고, 애국심과 자주정신을 갖게 되었어요.

이외에도 서재필은 자신이 미국에서 배운 근대적인 문화를 조선에 소개하였으며,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어요. 서재필은 왜 자신의 전재산까지 바쳐가면서 독립운동을 펼쳤을까요?

갑신정변에 참여하였으나 실패로 끝나다

서재필은 1864년에 전라남도 보성의 외가에서 서광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이후 친가가 있는 충청남도 논산에서 성장하다가 친척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갔어요. 아들이 없는 친척에게 양자를 보내는 것은 조선 시대에 흔히 있던 일이에요. 일곱 살이 되던 해 서재필은 한성(지금의 서울)에 있는 외삼촌 김성근의 집에 보내져 그곳에서 한학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어요.

외삼촌 집이 있었던 한성 북촌은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 개화지식인들도 살고 있었어요. 서재필은 집에서 한학을 배우기도 하였지만 이들과 어울리면서 근대 문물과 지식을 가까이할 수 있었지요. 또한 일본을 자주 드나들던 승려 이동인으로부터 당시 나라밖 소식도 듣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었어요.

1882년 서재필은 과거 시험에 합격을 했어요. 얼마 후 국방을 튼튼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옥균의 권유를 받고 일본에 건너가 군사학을 배우기로 결심했어요. 그래서 이듬해 다른 동료 14명과 함께 일본 도쿄에 있는 도야마 육군학교 입학했어요. 이곳에서 그는 근대적인 군사기술과 지식을 배운 뒤 약 1년 만에 귀국했어요.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라 불린 세력은 당시 청나라의 정치 간섭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개혁을 빨리 이루고자 했어요. 마침 일본도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어요. 마침내 급진 개화파는 1884년에 정변을 일으켰어요. 이를 갑신년(1884년)에 일어난 정변이라고 해서 ‘갑신정변’이라고 해요.

서재필도 일본에서 함께 공부한 동료들을 이끌고 여기에 참여하였어요. 급진 개화파는 정부의 높은 관리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만든 후에 자신들의 개혁 의지를 담은 개혁안을 발표했어요.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고 재빨리 군대를 보내 정변을 일으킨 세력을 공격했어요.

결국 갑신정변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어요. 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했어요. 한편 서재필은 다른 동료들처럼 반역자로 몰려 그의 부모님, 아내, 형을 비롯해 어린 아들까지 죽는 비극을 맞이했어요.

  

<일본으로 망명한 직후 급진 개화파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국사편찬위원회

미국으로 떠나 어렵게 공부하다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이 외교 문제가 되어 자신들의 입장이 곤란해지자 서재필 일행을 차갑게 대하고 돕지 않았어요. 이에 실망한 서재필은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어요. 미국에 도착한 일행은 생활이 너무 어려워 뿔뿔이 흩어졌어요. 서재필은 잡일과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밤에는 교회에 가서 영어를 배웠어요.

미국에서 교회에 다니며 어렵게 생활하던 서재필은 친구 집에서 사업가 홀렌백(John W. Hollenback)을 소개받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펜실베니아에 있는 해리 힐맨 고등학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이때 서재필은 자신의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바꿨어요.

서재필은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학비 마련이 힘들어 워싱턴으로 가서는 낮에는 육군의학도서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안 의과대학에서 공부했어요. 마침내 그는 스물 여덟살이 되던 1892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의사가 되었어요. 이렇게 그는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었어요.

<서재필의 의과대학 졸업 사진
컬럼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 졸업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맨 윗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서재필이다.>   
독립기념관

한편, 서재필은 1890년에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1894년에는 미국인 여성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을 하였어요. 결혼 직후 서재필은 병원 개업을 하였지만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로 인해 힘든 생활을 보내야 했어요.

국내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발행하다

1894년 조선에서 근대적인 개혁인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정부는 개혁에 필요한 인재들이 필요했고, 당시 일본에서 돌아와 개혁을 이끌던 박영효는 미국에 있는 서재필에게 귀국을 요청했어요.

마침 이때 10년 전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도자들에 대한 죄도 용서가 되었어요. 조선 정부의 공식 요청에 서재필은 조선의 근대적인 개혁에 힘을 보태겠다는 큰 결심을 하고, 망명을 떠난 지 11년 만인 1895년 12월 조선으로 돌아왔어요.

조선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자신을 조선인이 아니라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미국인으로 소개하였어요. 그는 외국인 거주지에서 살면서, 10년 계약에 월급 300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중추원 고문을 맡았어요. 당시 중추원은 입법 기관으로 여러 가지 법을 만드는 정치기구였어요.

서재필은 신문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근대적인 지식을 전달하고 정부의 개화 정책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서재필의 생각을 들은 정부 관리들도 신문 발행을 돕겠다고 했어요. 드디어 서재필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6년에 독립신문을 만들었어요.

독립신문은 네 쪽으로 발행되었는데, 나라 안팎의 소식과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는 글을 실었어요. 또 정부와 관리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글을 실어 국민이 쉽게 나랏일을 알도록 하였어요. 그중 한 쪽은 영어로 인쇄하여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 수 있도록 하였어요.

<독립신문>   
국립중앙도서관

이어 서재필은 개화 지식인들과 함께 독립 협회를 만들었어요. 독립 협회는 백성의 성금을 모아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세웠어요.

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중 집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어 당시 러시아가 조선의 정치를 간섭하고 있는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하였어요. 그리고 서양 강대국들이 조선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권한을 빼앗아가는 것도 비판하며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하였어요.

특히 서재필은 배재학당 등 여러 근대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어요. 그는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근대 교육을 통해 인재를 많이 길러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기회가 되면 미국에 유학을 떠나 더 넓은 세계를 접하고 올 것을 강조하였어요.

서재필이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자 정부의 보수적인 관리들은 서재필을 비난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정부는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 직책에서 해임시켰어요. 이렇게 해서 서재필은 1898년 다시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는 서재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미국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회사를 세워 문구업과 인쇄업을 하였어요. 그러던 중 1905년 대한 제국이 다른 나라와 외교 활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일본에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에 서재필은 미국 대통령에게 대한 제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힘써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어요. 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대한 제국은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말았어요.

머나먼 미국에서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소식에 서재필은 크게 실망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요. 그러다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은 서재필에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직접 발로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어요.

서재필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함께 1919년 4월 14일부터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 자유 대회를 열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어요. 한국의 독립 의지를 미국인들에게 널리 알린 것이지요.

<국외에서 일어난 3·1 운동>   

<미국 필라델피아 한인 자유 대회에서 행진하는 재미 한국인들
(1919.04. 16.)>   
국사편찬위원회

1921년에 워싱턴 군축 회의가 열리자 서재필은 이승만과 함께 한국대표단이 되어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러 나라에 호소하는 글을 제출하였어요.

1925년에는 하와이에서 열린 범태평양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일본의 잔학함을 비판하고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어요. 서재필의 외교 활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이전까지 한국 문제에 관심이 없던 미국 지식인층의 관심을 한국으로 돌리는 데 기여하였어요.

그러나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하던 서재필에게 큰 어려움이 닥쳤어요. 서재필과 그의 가족은 끼니를 거를 지경에 이르렀어요. 할 수 없이 서재필은 1920년대 후반부터 의학 공부를 다시 하고 의사로 지내면서 생계를 꾸렸어요.

비록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독립운동의 현장에서는 한 발 물러나 있었지만 조국에 대한 서재필의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어요. 그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국내의 여러 잡지에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글들을 기고하였어요.

또한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해서 미국 군인들의 신체 검사 업무를 하는 징병 검사관으로 활동하였어요. 일본의 패망이 곧 조국의 독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의 승리에 힘을 보태고 싶었던 것이지요.

드디어 1945년 한국은 광복을 맞이하였어요. 이어 한반도에서 북위 38도선 남쪽 지역에는 미국의 군대가 통치하는 미군정이 3년 동안 이어졌어요.

이 기간 중에 미군정은 서재필을 최고 고문 자격으로 초대했어요. 서재필은 1947년 83세의 나이로 귀국하여 강연 활동 등을 펼치면서 조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했어요.

<1947년 서재필의 모습(왼쪽부터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   
국사편찬위원회

또한 서재필은 당시 분열된 정치 상황을 통합하고자 노력하였어요. 일부 정치인들이 서재필에게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그는 거절했어요.

이후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한 서재필은 9월에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재필은 기자회견에서 조국의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어요.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국민의 권리를 약탈당하지 마십시오. 정부를 무조건 따르지 말고 국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국민의 하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다른 사람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우십시오. 이것만이 제 평생의 소원입니다.

미국에 돌아온 서재필은 의사 생활을 다시 하다가 많은 나이와 과로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였어요. 1950년 조국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병세가 더 악화되었고, 결국 그는 1951년 1월 5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서재필은 갑신정변, 독립신문 발행, 독립 협회 활동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독립운동 등에 앞장 섰어요.

<기자회견을 하는 서재필>   

여러 사건들 속에서 서재필이 꼭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도 서재필의 삶을 되돌아보며 당시 우리 민족이 간절하게 추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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