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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해외 독립운동의 씨앗이 되다

<이상설 생가(충북 진천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특사로 그대를 임명하였으니 특사단을 잘 통솔하여 을사늑약이 왜적이 강제한 효력이 없는 조약이라는 것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를 바란다.”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은 인물은 누구일까요? 그는 바로 이상설이에요. 이상설은 과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단을 이끌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을까요?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리다

이상설 선생은 1870년(고종 7) 12월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어요. 젊은 시절부터 율곡 이이를 따라갈 만한 학자라고 칭찬을 받을 정도로 성리학에 밝았지요. 이상설은 과거에 합격한 후 성균관 교수를 거쳐 의정부 참찬이라는 높은 관직까지 올랐어요.

그러던 중 1905년(고종 42) 11월 17일 나라에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어요. 일제의 강요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내어주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이었어요. 외교권 강탈 소식에 백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분노했어요.

을사늑약의 체결에 앞장선 다섯 명 즉 을사오적을 처형하라는 요구가 빗발쳤고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여론이 들끓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자결을 택하면서까지 강력하게 항의했지요.

이상설도 죽을 결심으로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고종 황제에게 올렸어요. 그는 이 조약이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했지요. 고종황제에게 죽더라도 인준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어요.

“이 조약을 인준하면 국가가 망할 것이고, 인준하지 않아도 결국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죽음으로써 인준을 거부하는 게 종묘사직을 위해 낫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극단적으로 충언을 한 사람은 이상설이 유일했어요.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세우다

이상설은 관직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국권 회복 운동에 앞장서기로 다짐하였어요. 그는 이회영, 이동녕 등의 상동교회 동지들과 함께 민족운동의 방법을 논의하였지요. 그 결과 국외에서 세력을 키워 일본과 독립전쟁을 해야한다고 판단했어요.

1906년(고종 43) 이상설은 이동녕과 함께 비밀리에 출국해 중국 상하이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어요. 그리고 북간도 용정촌에 터를 잡았어요. 이곳은 이미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일본의 눈을 피하기도 쉬웠으며, 러시아와의 교섭도 편리한 지역이었지요.

<용정 서전서숙과 서전서숙의 옛터 표지석(현재 용정실험소학교)>   
독립기념관

이상설은 용정촌에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열었어요. 그는 숙장(교장)으로서 경비까지 책임지며 무상교육으로 학교를 운영하였어요. 서전서숙에서는 역사·지리·수학·국제법·정치 등의 신학문을 교육했어요. 이상설도 직접 학생들에게 수학 등을 가르쳤지요.

무엇보다 이곳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항일 민족교육이었어요. 그러나 서전서숙은 일본의 감시와 방해로 1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어요.

한편 서전서숙의 설립은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항일 민족학교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명동촌에서는 명동학교가 문을 열었고, 이어서 창동학교, 정동학교, 신흥강습소 등이 설립되었어요. 사실상 서전서숙은 해외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교육 기관인 동시에 항일 독립운동의 씨앗이 되었던 셈이지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활동하다

1907년(순종 1) 4월 이상설은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받았어요.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무효를 알려 국제 사회에 도움을 구하라는 것이었지요.

1907년 사절단의 정사인 이상설은 약속한 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절단 부사인 이준을 만났어요. 그들은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당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통역 겸 부사인 이위종과 합류했어요.

이상설 일행은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장장 64일간의 험난한 여정 끝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였어요. 그들은 곧바로 호텔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활동을 시작했어요. 이들의 목표는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임을 폭로해 조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조약을 무효화 하는 것이었어요.

그들은 대한제국 대표 자격으로 주최국 네덜란드에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요청하였어요. 그러나 네덜란드는 세계 여러 나라가 이미 을사늑약을 승인한 이상 대한제국 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면서 거부하였어요.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들에게도 협조를 구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지요.

한편 일본은 특사단이 공식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어요. 고종을 협박하여 특사를 보낸 적이 없다는 선언을 받아내고, 을사늑약은 원만하게 체결된 것이라는 전보를 헤이그에 보냈어요.

하지만 이상설 일행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곳의 언론을 활용하여 특사들의 활동을 보도하도록 했어요. 조선의 사정에 우호적인 외국인 기자들을 만나는 행운도 있었어요. 일제의 침략상과 대한제국의 입장을 담은 성명서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냈고, 『만국평화회의보』에 발표하였어요.

특사들의 활동 상황은 『런던 타임스』나 『뉴욕헤럴드』지에 실리기도 했어요. 이러한 노력으로 특사단은 각국 신문기자단이 주최한 국제협회에 초청되었어요. 이곳에서 그들은 이상설이 작성하고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번역한 ‘대한제국의 호소’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지요. 이 연설문은 당시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어요.

비록 헤이그 특사 활동이 일제의 교활한 방해 공작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약소국 중에서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지속적으로 국권 회복 운동을 한 나라는 일찍이 없었어요.

<만국평화회의 회의장 앞에서 호소하고 있는 특사단>   

해외 여러 나라를 돌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알리다

1907년 7월 이상설 일행은 헤이그를 떠나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를 돌며 일본 침략의 불법성을 알리며 국제협력을 요청하였어요. 또한 자신들은 대한제국의 특사로 왔으며 일본에 의해 독립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나라에 강력하게 알렸어요.

  

이상설이 해외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외교 활동을 펼치는 중에 국내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어요.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어요. 곧이어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시켰어요. 대한제국은 이제 일본에 저항할 마지막 수단마저 빼앗겼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발 빠르게 헤이그 특사에 대한 재판을 열고, 이상설에게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였어요. 이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어버렸어요.

1908년(순종 2) 이상설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독립 지원을 호소하는 외교 활동을 펼쳤어요. 미국 언론에도 호소하고, 여러 도시를 돌며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늑약이 강제로 이루어진 무효 조약임을 계속 강조하였어요.

이상설은 미국 내 한인 사회의 단합에도 힘을 쏟았어요. 그러면서 그들도 독립운동에 함께 참여시키고자 노력하였지요. 1909년(순종 3) 이상설은 미국 한인 단체인 공립협회와 합성협회를 통합하여 ‘국민회’라는 민족운동 단체를 결성하였어요. 이후 국민회는 중요한 해외 독립운동 단체로 성장하여 갔어요. 그리고 훗날 이상설의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에 큰 후원자가 되었지요.

러시아 연해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다

1909년 4월 이상설은 미국을 떠나 러시아의 연해주로 갔어요. 그는 연해주에서 동포들에게 군사 훈련을 비롯한 각종 교육을 실시해 자주독립의 기반을 다지려고 하였어요.

이상설은 밀산 항카 호수 남쪽 봉밀산 부근의 땅을 사서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어요. 한국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이곳을 ‘한흥동’이라 불렀어요. 한민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썼고, 밀산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를 양성하였어요. 한흥동 마을은 연해주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였어요. 연해주는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어요.

한편 이상설은 국내외 모든 의병 세력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1910년 6월 이상설은 이범윤, 유인석과 함께 연해주와 만주는 물론 국내의 모든 의병을 통합한 ‘13도의군’을 편성, 국내로 진군하고자 하였어요. 그러나 일본이 러시아 정부를 움직여 방해하는 바람에 13도의군의 공격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어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이상설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지만, 그래도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더욱 힘을 내자고 다짐했어요.

<지도로 보는 이상설의 해외 독립운동>   

권업회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치다

1910년 이상설은 일제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니콜리스크로 유배당했어요. 하지만 금방 풀려나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돌아왔어요. 그는 우리가 비록 강대국 사이에 낀 약한 나라이지만, 스스로 강해져야만 한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펼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1911년 이상설은 최재형, 홍범도 등이 만든 권업회에 참여했어요. 권업회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도 동포들의 권익 향상에 많은 힘을 쏟았지요. 실업자가 된 동포들에게는 직업을 주었고, 저축을 장려했지요. 동포들끼리 서로 믿고 단합할 수 있도록 도왔어요. 권업회 활동은 동포들에게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어요.

권업회는『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동포들의 권익과 의식 향상에도 힘썼어요. 이 신문은 러시아 지역은 물론 만주와 국내까지 보급되었지요.

그러나 『권업신문』은 일제와 러시아 당국에 의해 1914년 8월 30일 제126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어요. 이상설은 책임자로서 최후까지 노력했으나 큰 벽 앞에서 또다시 좌절하고 말았지요.

<권업회 활동과 『권업신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다

1914년 이상설은 이동휘, 이동녕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어요. 국권을 빼앗긴 이후 최초의 망명 정부라 볼 수 있지요. 13도의군에서부터 권업회와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이상설과 함께 활동한 동지들을 기반으로 임시정부 체제를 구축했어요.

그는 대한광복군정부를 통해 정부 대 정부로서 일제와 본격적인 전쟁을 하고자 하였어요. 실로 국제 정세에 밝은 이상설이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가 일본의 동맹국이 되어 우리 독립 투사들을 탄압하였어요. 결국 대한광복군정부와 권업회는 해체되었고, 『권업신문』간행도 중단되고 말았지요.

1915년 3월 이상설과 동지들은 중국 상하이로 갔어요. 그곳에서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을 고민하였어요. 이들은 ‘신한혁명당’을 결성하고 광복군의 무장 활동과 대일 전쟁 방안을 논의하였어요.

이상설은 국내외에서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고자 했어요. 그리고 고종 황제를 당수로 추대하여 국내외의 활동을 크게 확장하고자 하였지요. 하지만 밀정의 고발로 인해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모두 중지되고 말았어요.

1916년 연해주와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상설은 건강이 나빠져 그만 쓰러지고 말았어요. 그는 결국 1917년 4월 1일 47세의 젊은 나이에 절절한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였어요.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혼인들 조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은 어떤 심정으로 이런 유언을 남겼을까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가면 러시아 지역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이상설을 기념하여 세운 비가 있어요. 이상설이 남긴 유언을 마음에 새기며 그의 활동을 되짚어보면 독립을 열망했던 절절한 마음이 조금은 느껴질 것 같아요.

<우수리스크 이상설 유허비와 이상설>   
독립기념관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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