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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신돌석 장군 생가(경북 영덕군)>   

“일제가 강제로 조약을 맺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려 하고 있소!”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일본인을 몰아내기 위해 한목숨 기꺼이 받쳐야 하지 않겠소.”

강제로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망해가는 대한제국을 구하고자 전국의 많은 의로운 백성들이 일어났어요. 의병 부대를 이끈 사람은 대부분 양반 출신의 유생들이었어요.

그러나 평민 출신으로 의병 부대를 만들어 활약한 인물이 있었어요. 바로 신돌석 장군이지요. 그는 의병 부대를 이끌고 어떤 활약을 했을까요? 장군은 어떤 뜻을 품고 있었을까요?

일본에 맞서 을미의병이 일어나다

동학 농민군을 힘으로 제압하고,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나라 정치에 더욱 많은 간섭을 하였어요. 이때 러시아는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고 아시아 대륙의 동쪽으로 진출하고 있었어요.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을 압박해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차지한 요동 땅을 청에 다시 돌려주게 했어요.

러시아의 입김에 꼼짝을 못하는 일본을 보면서 고종과 명성 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하고자 했어요. 고종은 조정에서 친일파 신하들을 몰아내고 친러파 신하들을 여러 명 등용했어요.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에서의 불리해진 상황을 되돌려 놓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본공사 미우라가 이를 행동으로 옮겼어요. 미우라는 작전을 짜 일본인들을 동원해 경복궁을 침입했어요. 그리고 잔인하게 왕비(명성 황후)를 시해하였어요. 이 사건을 을미사변(1895년)이라고 해요.

일본에 의해 국모가 시해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백성들에게 단발령이 내려졌어요. 단발령은 상투를 자르고 긴 머리를 짧게 하라는 명이었어요. 일본의 위협을 받은 조정이 우리나라를 개화하겠다고 내린 조치였지요. 그러나 백성들은 일본이 단발령을 이용해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을 없애려 한다고 생각했어요. 국모를 잃고 일본의 강압 앞에 흔들리는 나라를 안타깝게 여기던 백성들은 더는 참을 수 없었어요. 전국적으로 백성들이 봉기하여 의병을 일으켰어요. 의병들은 함께 목소리 높여 외쳤어요.

“국모를 시해한 일본에게 복수를!”

“단발에 반대해 부모님이 물려주신 신체를 보존하자!”

< 단발령 때문에 강제로 상투가 잘리는 백성들>   

을미의병, 그 속에 신돌석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은 대부분 그 고을의 유명한 유생들이 이끌었어요. 이들은 친일 개화파의 개화 정책에 동조하며 단발을 한 관료들을 처단하였어요.

개화 정책으로 새로 만들어진 우편소를 습격하고 전신선을 파괴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이를 방어하던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지요. 이들 의병 속에 신돌석도 있었어요.

신돌석은 1878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해(지금의 영덕)에서 태어났어요. 원래 이름은 신태호이지만 아이 때의 이름인 돌석으로 더 널리 알려졌어요.

신돌석은 어릴 때부터 체격이 크고 기운이 셌다고 해요. 19세가 되던 해(1896년) 신돌석은 고향에서 100여 명의 동지를 모아 의병운동을 시작했어요.

관군과 일본군에 격렬하게 저항하던 의병들은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어요. 그러나 병력과 무기가 부족해 1년여 후에는 대부분 해산했어요. 이때 신돌석도 의병 부대를 해산하였어요. 그리고 홀로 10여 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만나 뒷날을 준비했어요.

신돌석은 27세가 되던 1904년 울진군 평해에 있는 월송정에 올라 시 한 편을 읊었어요. 이때는 러일 전쟁이 일어나 우리나라 땅이 남의 나라의 전쟁터가 되었고, 일본의 힘 앞에 민족의 운명이 벼랑 끝에 몰려있는 상황이었어요.

누각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서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가
가로누운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을사늑약에 반대해 다시 의병이 일어나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결국 일본이 승리하였어요. 이때 러시아가 동아시아로 세력을 넓히는 것을 꺼린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지지했어요.

<프랑스 만화가가 그린 만평 ‘조선을 둘러싼 일·청·러’(위), 러시아와 싸우라고 일본의 등을 떠미는 ’영국과 미국’(아래), Georges Ferdinand Bigot>   

미국과 영국은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는 것을 당연시했어요. 미국과 영국도 아시아의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때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미국, 영국, 러시아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보호조치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

전쟁의 결과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던 고종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어요. 러시아를 물리친 일본은 더욱 노골적으로 대한제국을 차지하려 하였어요. 대한제국으로 파견 온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동원해 덕수궁을 포위하고, 고종과 신하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였어요.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허락 없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일본이 대신 행사한다는 내용의 을사늑약은 사실상 식민통치를 시작하겠다는 뜻이었어요. 나라의 자주적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다는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갔고, 분개한 많은 백성이 다시 의병을 일으켰어요.

신돌석, 주막 앞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1906년, 을사늑약에 대한 소식을 들은 신돌석은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어요. 평민 출신 신돌석이 의병을 일으킨 장소는 그의 집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주막 앞이었어요. 양반 유생들이 대부분 서원이나 향교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모습과는 무척 달랐지요.

“포악한 왜놈들이 황상 폐하를 협박하여 조선을 차지하려 하오! 나라가 위급한데 내 한목숨이 어찌 아깝겠소!”

“옳소! 와! 와!”

“나를 따라 우리 땅에서 왜놈들을 몰아냅시다!”

신돌석을 따르던 의병들은 대부분 농민이었어요. 농민 이외에도 상인, 포수, 그리고 양반 출신들도 여럿 참여했지요. 신돌석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에요. 신돌석의 명성에 많은 백성이 몰려와 한때는 의병의 수가 3,000여 명이 넘기도 하였어요.

신돌석 의병 부대에게 가장 급한 일은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청송·울진·평해·영해·영덕 등 경상북도 지역의 관아를 먼저 공격해 무기 창고를 털어 총과 화약, 탄환을 마련했어요.

무기가 준비되자 신돌석은 울진과 삼척을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어요. 특히 울진은 신돌석 의병 부대가 수차례에 걸쳐 기습 작전을 벌인 곳이었어요. 동해안의 여러 고을 중에 울진은 일본인이 일찍부터 발을 붙이기 시작한 곳이었어요. 울진을 차지한 일본인 어부들은 잠수기를 이용해 전복과 해삼 등 해산물을 쓸어갔어요.

잠수기를 사용하던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어부들보다 10배 이상 많은 수산물을 채취할 수 있었어요. 가난한 우리 어부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죠. 일본인들이 동해안의 어장을 빼앗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신돌석은 울진을 주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이에요.

<경무서와 우편소를 공격하는 의병들(신돌석장군기념관)>   

의병 부대는 울진을 공격해 일본인이 살던 집 수십 채를 불태웠어요. 일본인의 집을 공격하다가 관군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지요. 그리고 삼척 지역을 공격하여 일본 배 9척을 깨부수기도 했어요.

일본인을 위해 만들어진 경무서(파출소)나 우편소 등도 의병들의 공격 목표였어요. 이러한 시설들을 없애 일본인들이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했어요. 무기가 떨어지면 후퇴했다가 다시 준비되면 울진과 삼척의 일본인들을 공격하는 일이 반복되었어요.

<신돌석 의병 부대의 활동 지역>   

일본의 대규모 부대에 맞서 유격전을 펼치다

신돌석 의병 부대를 비롯해 경상도의 의병 항쟁이 치열하게 펼쳐지자, 일본은 대규모 군대를 보내 의병 부대를 진압하려고 했어요.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일본군이 몰려왔어요. 신돌석은 정면으로 일본군과 맞서 싸워서는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았어요. 그래서 부대를 이끌고 태백산맥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어요.

신돌석은 부대를 작은 규모로 나눠서 유격전을 펼쳤어요. 이미 태백산맥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던 의병들은 일본군을 공격하고 태백산맥으로 도망가 숨는 전술을 사용한 것이죠. 한여름의 더위와 장마 속에서 태백산맥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쫓고 쫓기는 전투가 계속해 벌어졌어요.

“나타나고 사라짐이 자유로워 쉽게 체포할 수가 없다.”

신돌석 의병 부대를 쫓던 일본군은 보고서에 이렇게 썼어요. 이처럼 신돌석의 활약에 일본군은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대규모 부대를 동원해 오랜 기간 신돌석을 잡기 위해 태백산 일대를 쥐 잡듯 쫓아다녔지만 피해만 늘어갔지요. 일본군과 백성들은 귀신같이 움직이는 신돌석의 모습을 신기해하며 그를 ‘태백산 호랑이’라 불렀어요.

일본군에게 신돌석 의병 부대는 정말 골치 아픈 대상이었어요. 일본군은 몇 차례의 대규모 작전을 통해서도 장군을 잡을 수 없게 되자 장군의 부인을 이용하기도 했어요. 일본군은 부인 한씨를 잡아와 극진히 대접하였어요. 그리고 온갖 달콤한 말로 회유한 뒤 장군의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주면서 풀어주었지요. 한씨는 일본군의 위협에 가슴 졸이며 태백산맥 깊은 곳에 은신하고 있던 신돌석을 찾아갔어요.

“서방님, 일본군이 저에게 편지를 전하라 하여 이리 왔습니다.”

“왜놈들에게 끌려가 어찌 죽지 않고 돌아왔소? 게다가 왜놈들의 편지까지 가지고 오다니!”

신돌석은 크게 화를 내며 편지를 읽지도 않고 화롯불 속에 던져버렸어요. 작전이 실패하자 일본군은 “신돌석을 잡는 자가 있으면 1천 근의 금과 1만 호의 고을을 준다”며 현상금을 걸어 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도 소용이 없었어요.

<신돌석 의병 부대와 일본군의 전투>   

의병 부대의 해산과 장군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1908년 9월 이후, 신돌석 의병 부대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어요. 일본군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 의병들이 활동할 수 있는 지역은 계속 줄어들었어요. 일본군의 대규모 작전으로 의병의 수도 줄어들고 무기와 식량을 구하는 것도 갈수록 어려워졌어요.

게다가 매서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요. 어쩔 수 없이 신돌석은 후일을 약속하며 의병들에게 모두 살길을 찾아 떠나도록 명령했어요.

의병 부대를 해산하고 신돌석은 고향 근처 마을로 갔어요. 마을에는 옛 부하 김상열 형제가 살고 있었어요.

“장군, 일본군의 눈을 피해 참으로 잘 오셨소.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편히 쉬세요.”

“동지! 이렇게 살아 볼 수 있어서 좋소.”

“오늘 밤은 술이나 한잔하면서 옛 기억이나 나누시면 어떨까요?”

오래간만에 가까운 사람을 만난 신돌석은 깊이 안심을 했어요. 그러나 김상열 형제의 생각은 달랐어요. 일본군이 내건 어마어마한 현상금에 욕심이 났어요. 그래서 술에 독을 타서 장군을 깊은 잠에 빠뜨렸어요. 맨정신으로는 장군의 힘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거든요.

김상열 형제는 깊이 잠든 신돌석을 살해했어요. '태백산 호랑이'답지 않게, 그것도 옛 부하의 손에 당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어요.

신돌석! 그는 한말 항일 의병 대장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였어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 대부분이 양반 출신이었는데, 그는 평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양반을 비롯한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어요. 의병항쟁을 한 시기는 채 3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는 단 하루도 편히 쉬지 않고 태백산맥의 깊고 높은 산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요.

신돌석 장군이 목숨을 잃은 지 1년 정도 지나면서 일본군의 대규모 작전으로 국내의 의병항쟁은 크게 약화되었어요. 많은 의병이 희생되었고, 의병 중 일부는 머나먼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이 되었어요. 또 일부는 국내에서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항쟁을 멈추지 않았지요.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는 위아래가 따로 없다는 신돌석 장군의 뜻은 다른 이들을 통해 계속되었어요.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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