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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민족의 실력을 키우고자 애쓰다

<도산공원(서울 강남구)>   

“어디들 가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습니까?”

“오늘 쾌재정에서 만민 공동회가 열린답니다. 나라의 높은 관리들도 오고 특별한 청년 연사가 나와 연설도 한다고 합니다.”

만민 공동회는 우리나라 이권을 빼앗으려는 외세에 맞서 우리나라의 독립과 주권을 지키려는 민중 대회였어요. 평양 만민 공동회가 열리는 대동강 서쪽 언덕의 쾌재정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의 특별한 청년 연사는 누구일까요?

명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다

1897년 쾌재정 만민 공동회의 특별한 연사로 나선 사람은 19세의 청년 안창호였어요. 그가 처음 대중 앞에 서는 순간이었어요.

“여러분, 쾌재정에서 이렇게 뵈니 쾌재(통쾌하다)가 절로 나옵니다. 고종 황제 폐하의 탄생일인 오늘같이 뜻깊은 날에 나라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상에 오른 안창호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시원하게 입을 열었어요. 안창호의 연설은 시작부터 대중들을 사로잡았지요.

“그러나 요즘 우리에게 쾌재를 부를 일이 별로 없습니다. 백성을 보살피고 도와야 할 관리들이 오히려 힘없는 백성을 짓밟고 재물을 빼앗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라가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안창호의 연설이 이어지자 청중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어요. 안창호는 소리 높여 무능한 관리들을 비판하였어요. 높은 관리를 앞에 두고도 거침없이 할 말을 다 하는 안창호의 연설에 백성들은 놀라고 감동했어요. 곳곳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어요.

이렇듯 시원하게 백성의 마음을 긁어 주었던 쾌재정 연설 이후 안창호는 명연설가로 이름을 얻었어요. 이후에도 그는 사람들의 생각을 일깨우는 연설에 온 힘을 쏟았어요.

교육만이 희망이다

어릴 적 평양에서 자란 안창호는 청과 일본이 전투를 벌이는 것을 보았어요. 죄 없는 조선 사람들이 죽고, 다쳤어요. 집과 공장들이 불타고 사람들은 피난을 가야만 했어요. 싸우는 쪽은 청과 일본이었지만 정작 피해를 보는 쪽은 조선의 백성들이었어요. 안창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자기들 나라에서 싸울 것이지, 왜 남의 나라 땅에서 싸울까?”

“그래, 우리나라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힘 있는 민족이 되면, 어떤 나라도 우리 땅에서 소란을 피우지 못할 것이다.”

안창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깨달았어요. 이때부터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어요. 우선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구세학당에 들어가 영어와 서양의 신학문을 공부하였어요. 배움만이 변화하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고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요.

안창호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으로 돌아와 점진학교를 세웠어요. 점점 나아가자는 뜻에서 이름을 정하였어요. 점진학교는 남녀 구별 없이 학생을 받았어요.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실천한 것이었어요.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하는 자기의 뜻대로 학교의 교훈은 ‘힘을 기르자’로 정하였어요.

<점진학교 교사와 학생들>   
독립기념관

미국 교포 사회를 이끌다

1902년 안창호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섰어요. 조국을 위한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더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그는 넓고 넓은 바다에 우뚝 솟은, 웅장한 하와이섬을 보고 감격하였어요. 이때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이라 지었어요.

“나도 넓고 넓은 저 바다에 우뚝 서 있는 섬(도산)과 같이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리라.”

안창호는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어요. 그는 초등학교부터 다시 공부하기로 하였어요. 25세의 늦은 나이지만 어린 학생들과 공부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돈을 버는 힘든 생활이 이어졌지만 배움의 길은 소중하기만 하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안창호는 길을 가다가 우리나라 사람 둘이 서로 상투를 잡고 싸우는 광경을 보았어요. 지나가던 미국인들은 걸음을 멈추고, 조롱하듯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안창호는 싸움을 뜯어말리며 물었어요.

<교포들의 싸움을 말리는 안창호>   

“아니, 같은 조선 사람끼리 왜 싸우는 거요?”

“우리는 중국인을 상대로 인삼을 팔러 다닙니다. 서로 구역을 놓고 장사를 하는데 글쎄 이 친구가 내 구역을 침범했지 뭡니까.”

두 사람은 눈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높였어요. 안창호는 멀고 먼 낯선 나라에서 이런 동포들의 모습에 속상하고 분통이 터졌어요. 하지만 그들에게 뭐라 말할 수도 없었어요. 너무 가난하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안창호는 이곳 새로운 세계 미국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어요.

“미국에 있는 교포들의 생활이 엉망이구나. 우리가 달라져야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다. 우선 이들의 생활부터 바로잡아 주어야 하겠다.”

안창호는 그날부터 자신의 학업을 뒤로 한 채 교포들을 한마음 한뜻으로 모으는 일에 앞장섰어요. 먼저 교포들의 생활과 의식을 개선해야겠다고 생각하였어요.

안창호는 교포들이 사는 마을로 가 거리를 청소하기 시작하였어요. 처음에는 안창호를 그저 비웃기만 하던 교포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어요.

“이제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돌아가며 길거리 청소할게요.”

집과 주변이 깨끗해지니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도 좋아졌어요. 까마득히 먼 나라에서 서로 경계하기 바빴던 사람들이 환히 웃는 얼굴로 인사도 나누고 어려운 일도 서로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작은 일부터 실천한 안창호의 노력에 미국 교포들의 삶이 확 바뀌었어요. 어느새 교포들은 안창호를 지도자로 믿고 따르게 되었어요.

오렌지 한 개에 나라 사랑을 담다

1903년 안창호는 한인 친목회를 만들어 교포들이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살 수 있도록 힘썼어요. 그해 안창호는 일자리를 찾는 교포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의 리버사이드로 이사를 하였어요. 그는 이곳 농장에서 일하면서 한인들에게 일거리를 알선해 주었어요. 또 그럴 때마다 교포들을 이렇게 격려해 주었지요.

“여러분, 오렌지 한 개를 따도 정성껏 따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한 길입니다. 남의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정성을 기울여 일합시다.”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안창호>   
독립기념관

1905년 안창호는 한인 친목회를 이끌어 온 동지들과 함께 공립협회를 만들었어요. 공립협회는 교포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항일 민족 운동에도 앞장서 활동하였어요.

안창호는 계속해서 계몽 운동을 벌이며 교포들에게 애국 사상을 심어 주었어요. 그의 뛰어난 지도력 덕분에 교포들의 삶은 점점 나아졌고, 미국인도 조선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 줄어들었지요. 공립협회의 회원 수는 날로 늘어났고 협회의 위상도 높아져 갔어요.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해 애쓰다

이 무렵 일제가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 왔어요. 공립협회는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을사늑약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배포하였어요.

안창호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어요. 이제 더는 조국의 현실을 두고만 본 채 미국에 머무를 수 없음을 깨달았어요.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안창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애국심을 북돋는 연설을 했어요. 일본 경찰이 그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했지만, 안창호는 아랑곳없이 더욱더 목소리를 높여 외쳤어요.

“여러분, 우리나라를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고, 둘째는 우리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힘이란 무력이 아닙니다. 배워서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힘입니다.”

안창호의 연설을 듣기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강연장은 사람들로 꽉 찼어요. 힘이 넘치는 그의 연설에 많은 사람은 우렁찬 박수를 보냈어요.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는 안창호>   

1907년 안창호는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 독립국을 세우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라는 항일 정치 단체를 만들었어요. 그들은 자신이 직접 연락을 할 상대 외에는 누가 같은 조직원인지 아닌지조차 모를 정도로 철저히 비밀리에 활동하였어요.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갖춘 애국 국민을 키우고자 하였어요. 교장 선생님이었던 안창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말했어요.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다. 나라가 힘이 있어야 나도 힘을 얻을 수 있다.”

<대성학교 졸업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신민회는 대동강 상류에 도자기 회사도 세웠어요. 평양의 마산에서 나는 질 좋은 흙으로 도자기를 만들어 팔면 경제적으로 국민 생활에 보탬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어요. 또한 서울·평양·대구 등지에 출판 사업과 서점을 겸한 태극서관도 세웠어요.

안창호는 일제의 날카로운 감시 속에서도 끊임없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어요. 이런 일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에게 큰 지지와 존경을 보냈어요.

국외 한인들의 힘을 한데 모으다

1909년 안창호는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풀려났어요. 더는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음을 깨달은 안창호는 훗날을 기약하며 시베리아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향하였어요.

1912년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미국 본토, 하와이, 만주, 시베리아 등 각 지역 대표자를 모이게 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였어요. 국외 한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고 생활을 개선할 목적이었지요. 그는 초대 총회장에 뽑혀 여러 나라에 사는 한인 사회를 조직적으로 이끌며 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갔어요.

“조국이 일제에 짓밟혔지만, 우리라도 국외에서 인정받는 단체를 만듭시다. 우리 조국의 존재를 알리고 외국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민족인지 알려야 합니다.”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임원들>   
독립기념관

안창호는 국외 교포들에 관련된 일을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의논해 줄 것을 미국에 직접 요청하였어요. 미국은 이 요청을 받아들였고 대한인국민회는 대사관처럼 미국이나 러시아에서도 인정받는 대표 기관으로 자리를 잡았어요.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를 이끄는가 하면, 건전한 인격과 실력을 갖춘 젊은이들을 키워내기 위해 ‘흥사단’이라는 단체를 세웠어요. 안창호가 내세우고 있는 건전한 인격이란 신체가 튼튼하며, 한 가지 이상의 전문 지식과 생산 기술을 가진 성실하고 진실한 인간을 말해요. 정치가, 군인, 경제가 등 분야별 인재를 양성하고, 이들이 활약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어요.

이후 흥사단은 여러 지역에 단원들을 확보하며 발전을 거듭하였어요. 안창호의 바람대로 많은 젊은이가 흥사단 활동을 통해 훌륭한 지도자로 거듭나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지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다

1919년 안창호는 미국에서 3·1 운동 소식을 들었어요. 그는 대한인국민회 대표자 대회를 소집하고 포고문을 발표하였어요. 그리고 벅찬 감격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외쳤지요.

“장하다, 내 겨레! 훌륭하다, 내 민족! 이제 온 민족이 일제히 일어나 생명과 재산을 모두 바칠 각오로 대한 독립을 힘껏 외칩시다!”

고국을 떠나온 1세대 한인 이민자들은 낯선 땅에서 차별과 나라 잃은 슬픔을 겪었어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렌지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고된 노동뿐이었지요. 그들은 생계를 이어가기도 빠듯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번 돈의 반 이상을 기꺼이 조국을 되찾기 위한 독립 자금으로 내놓았어요.

안창호는 조국을 되찾기 위해 이렇게 독립 자금을 모금하였어요. 그는 독립자금을 미주 지역을 대표하여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전달하였어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두 달이나 걸려 상하이에 도착하였어요. 상하이의 독립 운동가들은 그런 안창호를 뜨겁게 맞아주었어요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무총리/임시정부 통합 후 안창호>   
독립기념관

“반갑소. 선생을 내무총장으로 임명했으니 열심히 일해 주시오.”

안창호는 우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건물을 지었어요. 그리고 연통제를 실시하고 만주에 흩어져 있는 독립군 조직을 임시 정부 아래로 통합하여 독립운동의 힘을 한데 모으고자 노력했어요.

또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대한민국적십자회를 다시 일으켜 세웠어요. 학교를 설립하고 언론의 선전 활동에도 힘을 썼지요.

안창호는 한성,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에 수립된 3개의 임시 정부를 통합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어요. 그리하여 상하이에 정통성을 가진 통일 정부를 세우게 되었지요.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동국 총판에 취임하여 여러 방면에서 독립을 위한 사업을 펼쳐 나갔어요.

안창호는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펼치고자 노력하였어요.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임시 정부는 분열을 거듭하였어요. 이때마다 안창호는 중재하고 통합하고자 노력했어요. 그리고 그는 높은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묵묵히 실제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쏟았지요.

자나 깨나 독립을 꿈꾸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났어요. 이 일로 일제는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갔어요. 안창호도 일본 경찰에 붙잡혔어요.

“앞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석방해 주겠소.”

“나는 밥을 먹어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잤소. 나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오.”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모습(1937년)>   
국사편찬위원회

일제는 갖은 방법으로 안창호의 독립운동 의지를 꺾고자 했지만 그의 뜻은 변함없이 단호했어요. 어둡고 좁은 독방에 갇혀 있던 안창호는 그만 병이 나고 말았어요. 안창호는 병보석으로 풀려나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지만 그의 병은 점점 깊어졌어요. 1938년 3월 10일 마침내 안창호는 교포들을 걱정하며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어요.

도산 안창호는 민족의 힘을 키우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한평생을 바쳤어요. 특히 낯선 다른 나라 땅에서 교포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려고 있는 힘을 다했어요.

교포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독립은 한 걸음 더 가까워졌어요. 국외 교포들은 고된 현실 속에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어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도산 안창호가 있었어요.

지금도 우리 국외 교포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대단하지요. 이는 안창호와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도산 안창호가 우리에게 외쳤던 말이 생각나지 않나요?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안창호 어록비(서울 강남구)>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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