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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3·1 운동을 이끌다

<설악산 백담사(강원 인제군)>   

“자네, 만해 스님의 강연을 아직도 못 들었나? 한번 가 보세나.”

“여러분,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해야 합니다.”

만해 스님은 누구일까요? 그는 힘 있고, 명쾌한 강연으로 가는 곳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어요. 불교 승려인 그가 대중들에게 왜 이런 연설을 하였을까요?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였을까요?

승려가 되다

“슥슥 삭삭…”

설악산 오세암이라는 작은 절에서 한 청년이 지금 막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어요. 이 스님이 바로 만해 한용운이에요.

<한용운 생가(충남 홍성군)>   

한용운은 1879년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 들을 정도로 똑똑하였어요. 서당 훈장님과 함께 아이들을 가르칠 정도로 글공부도 열심히 하였지요.

당시 조선은 안팎으로 혼란스러웠어요. 일본은 사사건건 우리나라를 간섭하였고, 지방관들은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는 헤아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세금을 거둬 백성들을 괴롭혔어요. 그 바람에 백성들은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켰어요.

한용운의 마음 한구석에 답답함이 물밀 듯이 밀려 왔어요. 1896년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집을 떠나 오세암으로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나무를 하고 불을 때는 일부터 생활하였어요. 그러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하여 스님이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아, 도대체 이 땅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1905년 한용운은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참선과 기도를 하며, 열심히 불교 경전을 공부하였어요. 마침내 그는 ‘용운’이란 법명을 받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어요. ‘만해’라는 법호도 이때 받았어요.

불교 개혁을 부르짖다

1908년 한용운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불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자 일본 불교의 실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어요. 일본 불교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펴본 그는 속으로 놀랐어요. 그리고 조선의 불교도 크게 변해야 한다고 깨달았어요.

‘아, 조선 불교는 그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구나.’

고국으로 돌아온 한용운은 조선 불교의 개혁을 외쳤어요.

“우선 불교가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수만 권의 불경을 쌓아 놓아 봐야 소용없습니다. 불합리한 낡은 불교를 파괴해야 합니다.”

파격적인 한용운의 주장에 불교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발칵 뒤집어졌어요. 완고하고 낡은 생각을 지닌 승려들은 노발대발하였지요.

‘말로는 안 되겠다. 내 생각을 차근차근 글로 써서 나타내자.’

한용운은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다시 백담사로 돌아왔어요. 그날부터 방에 틀어박혀 『조선불교유신론』을 쓰기 시작하였어요.

<조선불교유신론>   
독립기념관

『조선불교유신론』은 말 그대로 ‘조선 불교의 모든 걸 고쳐 새롭게 하자, 묵은 제도를 아주 새롭게 고치자’는 뜻이었어요. 한용운은 이 책에 조선 불교의 전반적인 문제와 개선책을 담았어요.

『조선불교유신론』은 한용운이 평생 쓴 책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책으로 꼽혀요.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의 폭넓은 학식과 뛰어난 문장, 명쾌한 논리에 감탄을 금치 못했어요.

그 무렵,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와 합친다는 소식이 들려 왔어요. 한용운은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어요.

“나라가 망한 것도 분통이 터질 지경인데, 가만있을 수는 없지!”

“여러분! 일본 불교는 모두 우리에게 배워 간 것입니다. 스승인 조선 불교가 제자인 일본 불교 밑으로 들어가는 게 말이 됩니까?”

한용운은 전국의 사찰을 돌며 승려들 앞에서 강연하였어요. 일본의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술술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모습에 모두 감동하였어요.

승려들은 한용운을 중심으로 불교 개혁에 동참하였어요. 그의 노력으로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흡수되는 일을 막을 수 있었어요. 그는 이제 조선 불교의 큰 인물로 떠올랐어요.

만주에서 독립 운동가들을 만나다

1911년 어느 날, 한용운은 대삿갓을 쓰고 홀연히 만주로 향했어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 하기 위해서였지요. 그 당시 만주에는 수많은 애국지사가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어요.

그간 한용운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어요. 만주의 독립 운동가들은 그가 만주에 도착하자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어요.

“한 동지, 정말 잘 오셨소. 이곳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좋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동포들에게 희망을 넣어 주십시오.”

다음 날부터 한용운은 만주에 있는 의병 학교와 우리 동포들이 사는 마을 곳곳에서 강연하였어요.

“여러분! 조국을 떠나 이 낯선 만주 벌판에서 고생하는 여러분의 애국심을 깊이 존경합니다. 오늘 흘린 여러분의 한 방울의 피와 땀은 마침내 큰 바다를 이루어 일제의 총칼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용운의 연설은 힘이 있었고, 명쾌하였어요. 많은 사람은 그의 연설에 감동했고, 그는 가는 곳마다 큰 박수 세례를 받았어요.

불교 대중화에 힘쓰다

한용운은 양산 통도사로 내려갔어요. 그곳에서 그는 불교 경전을 많은 사람이 읽기 쉽게 고쳐 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어요. 불교 경전은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무척 어려웠지요.

“누구나 읽기 쉬운 경전으로 만들어야 한다.”

불교 경전의 대중화는 불교에 대한 독실한 신앙과 해박한 지식, 불교 개혁을 향한 철저한 의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한용운은 우선 팔만대장경을 낱낱이 살펴보며 요약하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평생을 걸려도 한 번 다 읽어 볼까 말까 한 어려운 팔만대장경을 모조리 읽고 재구성하였지요. 이 일은 참으로 엄청난 작업이었어요.

마침내 1914년 한용운은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많은 불교의 경전들을 쉽게 정리하여 『불교대전』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어요. 이 책은 『조선불교유신론』과 함께 한용운이 이룬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이었어요.

<불교 경전을 정리하는 한용운>   

한용운은 ‘조선불교회’ 회장이 되어 여러 곳을 다니며 강연을 하였어요. 단상 위에 올라선 한용운은 비록 키가 작았지만 목소리는 쩌렁쩌렁했어요. 듣는 이들은 저마다 힘과 용기를 얻었지요.

어느새 한용운은 강연을 잘하는 명사가 되었어요. 또한 그 무렵 틈틈이 글을 발표하여 문필가로서도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지요.

독립 선언을 계획하다

1919년 어느 날 한용운은 최린을 찾아갔어요. 최린은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친구였어요. 그는 손병희를 만난 인연으로 천도교에 들어가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이 되어 있었어요. 그들은 일본 유학 시절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하였지요.

“자네도 들었는가? 오는 2월 8일 일본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조선 독립을 선언하겠다는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싶어, 일단 천도교에서도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네.”

“그럼 잘 되었네. 서로 연합을 하는 게 어떤가? 독립을 위한 마음이야 다 똑같지 않은가.”

한용운은 독립의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는 말에 온몸에 전율을 느꼈어요. 뜻이 통한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았어요. 드디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큰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기뻤어요.

한용운은 그날부터 독립 선언에 함께 할 뜻있는 민족 지도자들을 모으러 발 빠르게 움직였어요. 먼저 월남 이상재를 찾아갔어요.

“선생님, 지금 각계에서 조선 독립을 선언하려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함께 참여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힘이 될 것입니다.”

“만해, 그러지 말고 차라리 조선 민족의 뜻을 총독부에 알리고 조선 독립을 청하는 게 어떻겠소?”

“아니, 내 나라의 독립을 선언하는 데 무슨 청원서를 내고 남의 눈치를 본답디까? 조선 독립은 우리 스스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뜻밖에도 이상재는 거절의 의사를 밝혔어요. 한용운은 실망했어요. 민족 지도자의 생각이 너무 소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재는 민중 계몽 운동에 앞장섰으며 조선 기독교 청년운동을 이끌어 가던 큰 인물이었어요. 한용운은 누구보다 민중을 이끄는 이상재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안타까운 일이었어요.

이어 찾아간 다른 민족 지도자들도 사람들이 다친다는 이유로 독립 선언 참여를 거부하였어요. 한용운은 또 크게 실망하였어요. 그다음 한용운은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찾아갔어요. 한용운은 망설이는 손병희에게 진심으로 힘 있게 설득하였어요.

“선생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해 주십시오.”

잠시 후 손병희는 한용운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참가하겠다고 말하였어요. 한용운은 천만 군사를 얻은 듯 마음이 든든했어요.

이렇게 각계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한용운은 마침내 독립 선언에 참가할 기독교․천도교․불교의 지도자들을 모았어요. 기독교를 대표해서는 이상재 대신 이승훈이 나서 주었어요.

독립 선언서에 공약 3장을 덧붙이다

독립 선언서 작성은 최남선이 맡기로 하였어요. 한용운은 최남선이 독립운동에 직접 나서지도 않는다고 반대하였지만, 이미 최린이 부탁을 해 놓은 터라 어쩔 수 없었어요.

<3·1 독립 선언서>   
유관순기념관

독립 선언서가 최남선에 의해 완성되고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은밀하게 한용운에게 전해졌어요. 하지만 최남선이 쓴 독립 선언서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전국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읽기에는 매우 길고 어려웠어요.

“하지만 만해, 지금은 시간이 없소. 바로 인쇄를 해야 하오.”

“그럼 선언서 맨 끝에다 공약 3장이라는 걸 덧붙이면 어떻겠소?”

이리하여 한용운은 독립 선언서에 ‘공약 3장’을 써서 덧붙였어요.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

‘공약 3장’은 독립 선언서에 비해 간결하고 힘 있는 문장이었어요. 함께 있던 최린과 이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였어요.

“명문장이오! 우리의 비폭력 원칙과 독립 의지가 잘 담겨 있소.”

1919년 2월 24일 최린의 집에서 이들은 모임을 했어요. 그들은 토론 끝에 거사 날짜를 3월 1일로 정하였어요. 3월 1일이라는 숫자는 천도교․기독교․불교의 3개 단체가 합쳐서 하나로 된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어요.

‘독립 선언서’에 서명할 사람들도 정했어요.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를 대표하는 사람들,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 한용운을 비롯한 불교를 대표하는 사람들 모두 33명이었어요. 그리고 서명자 순서도 정하였어요. 토론 끝에 총대표자 손병희를 제일 먼저 쓰고 이어 각 종교 단체 대표들을 쓴 다음 나머지 29명은 가나다순으로 쓰기로 하였어요.

<독립 선언을 준비하는 한용운 >   

독립 선언서 인쇄는 오세창이 총책임을 맡았어요. 미리 인쇄해 놓으면 들킬 염려가 있어 2월 27일 비밀리에 진행되었어요. 창문을 두꺼운 담요로 가리고 숨을 죽인 채 2만 여장을 찍어 내었어요.

거사 전 2월 28일 민족 대표자들은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기 위해 손병희 집에 은밀히 모였어요. 그때 한 사람이 말했어요.

“내일 아무래도 학생들이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이 열릴 것을 알고 모여들 것 같은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럼 장소를 옮겨 근처 음식점이 태화관에 모여 합시다.

한용운은 못마땅했지만, 많은 사람이 태화관에 찬성하였어요. 이어 민족 대표들은 독립 선언식의 순서를 정하였어요. 아무래도 긴 독립 선언서를 다 읽을 시간이 없을 듯하였어요. 이에 한용운이 대표로 간단히 선언서 요지를 설명하고 만세만 부르도록 하는 것으로 정하였어요.

“그 일은 만해가 맡는 게 좋겠소. 누구보다 웅변과 연설에 뛰어나고 공약 3장도 손수 덧붙였으니 말이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기미년 3월 1일 새벽은 밝아 왔어요. 한용운은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새벽 예불을 올리고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어요.

약속한 시간이 되자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속속 모여들었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총 33명 중에서 29명의 민족 대표들이 참석했지요. 민족 대표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하고 진지하였어요.

“그럼 만해, 독립 선언식을 이끌어 주시지요.”

미리 약속한 대로 한용운이 독립 선언식을 이끌게 되었어요. 한용운은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였어요.

“여러분! 우리는 이천만 백성을 대표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선포하고 세계 곳곳에 알립시다. 모두 일어납시다! 대한 독립 만세!”

한용운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어요. 그러자 민족 대표들도 벅찬 가슴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지요. 그 시각 탑골 공원에서도 학생 대표가 독립 선언서를 읽었어요. 만세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어요. 사람들은 너도나도 감춰둔 태극기를 꺼내 들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어요.

이윽고 일본 경찰들이 태화관에 들이닥쳐 민족 대표들을 모조리 잡아들였어요. 일본 경찰이 한용운의 팔을 강하게 잡아끌자, 한용운은 뿌리치며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어요.

“이놈들아, 내 나라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게 무슨 잘못이냐? 우린 죄가 없으니 떳떳하게 우리 발로 걸어가겠다!”

한용운은 당당하게 일본 경찰의 차에 올라탔어요. 거리엔 수많은 사람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었어요. 일본 경찰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에게 총칼을 휘둘렀어요.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여기저기 쓰러졌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의 만세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사람들이 불어났어요.

“그대는 앞으로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계속 할 것인가?”

“그렇소.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터이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이오.”

한용운은 고된 심문과정에서도 당당하게 행동했어요. 그는 감옥살이 하면서도 원칙을 정해놓고 일제에 철저히 저항하였어요. 또한 그 유명한 ‘조선 독립의 서’라는 장문의 독립 이유서를 썼어요. 그는 평화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의 회복이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행동인가를 주장하며 일본 군국주의를 엄중히 꾸짖었어요.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중략)… 총칼이 어찌 만능이며 무력이 어찌 승리이리요. …(중략)…”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1922년 3월 쌀쌀하던 어느 날, 한용운은 3년의 옥고를 치르고 감옥 밖으로 나왔어요. 그는 고된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어디서든 당당하게 행동했어요. 3·1 운동과 감옥살이를 한 뒤로 한용운은 더 유명해졌어요.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물밀 듯이 들어왔지요.

‘그동안 내가 쓴 시들을 정리해야겠다.’

1925년 한용운은 백담사를 오가며 틈틈이 써온 시들을 정리하였어요. 그는 시를 쓰며 마음을 다잡곤 하였지요. 여러 편의 시를 모아 『님의 침묵』이란 한 권의 시집으로 엮었어요.

<『님의 침묵』 중에서>   

『님의 침묵』이 나오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연설을 잘하고 한시를 잘하던 그가 이처럼 빼어난 현대시까지 잘 쓸 줄은 몰랐기 때문이에요. 『님의 침묵』에 실린 시는 하나하나가 모두 뛰어난 문학성을 지녔어요. 그의 시에는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님의 침묵』에서 한용운이 끝없이 추구하고 그리워하는 ‘님’은 바로 ‘조국’이었어요. 일제의 감시가 더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조국의 독립을 ‘님’으로 은유하여 표현한 것이에요.

한용운은 『님의 침묵』의 시에서 잃어버린 조국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담았어요. 우리나라가 주권을 빼앗겨 슬프지만,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담았지요. 그의 시들은 많은 사람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안겨 주었지요.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

많은 사람이 한용운을 우러러봤어요. 존경받는 종교인으로 뛰어난 연설가이자 문학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독립 운동의 한길을 걸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정작 한용운은 외로웠어요.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서울 성북구)>   

함께했던 독립 운동가들이 하나둘 곁을 떠나가고 있었어요. 3·1 운동 이후 일제는 우리 민족의 강력한 저항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민족 지도자들을 하나둘 회유하기 시작하였어요.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중에는 배신자들이 생겨났어요.

그 중엔 3·1 운동 때 독립 선언서를 만든 최남선도 있었어요. 그는 일제의 꾐에 넘어가 ‘중추원 참의’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어요.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한용운은 매우 분노했고, 슬퍼하였어요.

“이런 천하의 배신자들! 어찌 조국을 등 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한용운은 길가에서 우연히 최남선을 만났어요. 최남선은 한용운에게 반갑게 인사하려 하였어요.

“만해 선생, 정말 오랜만이오! 저 최남선입니다.”

“당신 누구시오?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례를 치른 지 오래요.”

최남선뿐 아니라 최린도 마찬가지였어요. 한용운과 둘도 없는 오랜 친구이자 3·1 운동을 같이 한 동지였던 최린도 배신하여 높은 관직에다 일제의 앞잡이 신문인 매일신보의 사장이 되었지요.

그 소식을 들은 한용운은 새벽 일찍이 최린의 집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엎드려 통곡하였어요. 최린이 놀라 뛰쳐나와 물었어요.

“아니, 만해가 아니오? 도대체 무슨 일이오?”

“내 친구 최린이 죽었다고 하여 와서 조문하는 거요. 아직 죽을 때가 안 된 사람인데 참으로 안되었소.”

한용운은 그렇게 내뱉고는 휙 돌아섰지요. 그때부터 그는 최린을 죽은 사람으로 여기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어요.

이처럼 한용운은 나라를 저버린 사람들과는 과감히 인연을 끊었어요. 일제는 물론 그들이 지원해 주는 돈도 절대 받지 않았지요. 그는 굶는 한이 있더라도, 옳지 못한 일과 돈 앞에서는 절대 고개 숙이지 않았어요. 한용운은 그야말로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1937년 어느 날 한용운에게 슬픈 소식이 들려 왔어요. 애국지사였던 김동삼 선생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돌아가신 것이었어요. 그런데 한용운을 더욱 슬퍼하게 한 것은 누구도 그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어요. 일제의 눈이 무서워서였지요.

한용운은 그 길로 달려가 그의 시신을 인수하고 심우장에 모시고와 슬퍼하며 장례를 치르었어요.

만해 한용운은 평생 조국을 뜨겁게 사랑했어요. 자기 뜻을 바로 세워 꿋꿋하게 의로운 길을 걸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복을 1년여 앞둔 어느 날, 그는 건강이 나빠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평생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한용운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어요. 이런 한용운에 대해 벽초 홍명희는 이렇게 평가하였어요

“한용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1만 명 아는 것보다 낫다.”

<한용운의 모습(국사편찬위원회)과 한용운 사당 만해사(충남 홍성)>   

만약 한용운이 스님으로서 절에서 불공만 드리고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한용운이 사람들을 만나 설득하며 3·1 운동을 이끌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독립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이 만약 무서운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한용운처럼 끝까지 절개를 지키며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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