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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기 위해 노력하다

<오두산 통일전망대(경기 파주시)>   

“일본에 공부하러 온 유학생 여러분, 고향이 어딘지 묻지 맙시다.”

“고당의 의견이 옳습니다. 전라도, 경기도 등 출신 지역을 따지지 말고 유학생들의 친목회를 만듭시다”

1911년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조선유학생친목회가 만들어졌어요. 자기의 출신 지역별로 나뉘어 있던 유학생들의 모임을 하나로 묶은 것이죠. 이 모임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고당 조만식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왜 이런 일을 했을까요?

장사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다

조만식은 1883년 평안남도의 강서군 반석면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집안은 원래 양반이었어요. 큰 부자는 아니지만 매년 상당히 많은 쌀을 거둬들일 정도의 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다른 지역에 사는 양반들처럼 글을 읽고 과거시험을 준비하지 않았어요. 장사하는 사람들을 집에서 머물게 해 서로 이어주거나 물건을 대신 팔아주는 일을 했어요. 또 장사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보관해주거나 운반하는 일도 했어요. 상인이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조만식의 아버지는 양반이면서 왜 상인이 되었을까요? 평안도 지방에 살았기 때문이에요. 조선 시대 평안도 출신의 양반들은 차별 대우를 받았어요. 과거시험에 합격해도 높은 벼슬을 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평안도 지방의 양반 중에는 조만식의 아버지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나도 아버지처럼 장사해야겠다. 무엇을 팔면 좋을까? 옳지! 평양에 가서 옷감을 팔아야겠다.”

조만식은 15살이 되던 해 상인이 되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장사하는 모습을 보며 커서 그런지 장사도 제법 잘했어요. 돈도 많이 벌었고요. 조만식은 22살이 될 무렵 장사를 그만두었어요. 러일 전쟁이 일어나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갔거든요. 이 무렵 자신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온 기독교도 믿었어요.

늦은 나이에 학교에 가다

“이제부터 나도 신학문을 배워야겠다.”

기독교를 믿으면서 조만식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어요. 조만식은 1905년 23살의 늦은 나이였지만 학교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했어요. 그가 다닌 학교는 미국 선교사가 세운, 평양에 있던 숭실학교였어요. 요즘의 중학교와 달리 5년 동안 공부를 하던 곳이었어요.

<평양에 세워진 숭실학교>   
숭실대학교

다른 사람들보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던 조만식은 열심히 노력하여 3년 만에 학교 공부를 마칠 수 있었어요.

“졸업을 축하합니다. 이제 교사가 되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는 일본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습니다. 교사가 되는 것은 그 후에 생각해보겠습니다.”

조만식은 1908년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일본의 도쿄에 갔어요. 일본에 가서 처음 2년 동안은 영어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10년에는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어요. 이 무렵 도쿄에서 공부하는 조선유학생을 하나로 묶는 친목 단체를 만들기도 했어요.

일제에 맞서 실력을 키우기 위한 운동을 펼치다

1913년 조만식은 공부를 마치고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곧바로 오산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조만식은 오산학교에서 헌신적으로 일했어요. 처음에는 월급도 받지 않았어요. 또 학생을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어요.

1919년 일제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보여 준 3·1 운동이 일어났어요. 조만식은 1915년 오산학교의 교장이 되었다가 이 무렵 교장에서 물러나 평양에서 3·1 운동에 적극 참여해 수배되었어요. 그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떠나다가 체포되었어요.

조만식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국내에서 일제에 맞서 우리 민족의 실력을 키우기 위한 운동을 펼쳤어요.

“우리 민족이 일제에 맞서 실력을 키우려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든 물건을 사용하도록 합시다.”

조만식은 평양에서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어요. 물산장려운동은 일제로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우리 민족이 만든 물건을 사용하자는 운동이에요. 1920년 평양에서 이 운동을 펼치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가 만들어졌어요. 뒤를 이어 각 지방과 서울에서도 물산장려운동을 하기 위한 단체가 만들어졌어요.

<물산장려운동을 이끄는 조만식>   

조만식은 뒤이어 1923년에는 일제에 맞설 수 있는 실력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만들어 우리 대학을 세우기 위한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일제와 타협하지 않다

1920년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변화가 생겼어요. 1910년대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던 사람 중에 일제에 협조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에요.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우리 민족이 펼친 3·1 운동을 지켜본 일제가 식민 통치 방법을 바꾸었기 때문이에요. 일제는 “우리의 문화를 존중하고 정치에서 자치권을 준다.”며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중 일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어요. 민족을 분열시키기 위해서였죠.

실제로 1920년대에 일제와 타협하여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자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이들은 훗날 대부분 친일파가 되지요.

조만식은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를 위해 ‘신간회’라는 단체를 만드는 데 앞장섰어요. 1927년에 만들어진 신간회는 회원들이 점점 늘어나고 전국에 지회가 생겼어요. 만들어진 지 2년 만에 회원 수는 약 4만 명이 되었고 전국에 149개의 지회가 세워졌어요.

조만식은 평양 지회장이 되어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열었어요.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역 앞에서 광주학생운동 상황을 널리 알리는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12월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어요.

<신간회의 평양 지회장이 된 조만식>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간회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독립운동의 방향을 놓고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의견이 대립했거든요. 조만식은 신간회 해체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으나 신간회는 만들어진 지 4년 만인 1931년에 해산되었어요.

신간회가 해산된 후 1932년 조만식은 서울에 왔어요. 조선일보 사장을 맡게 되었거든요. 당시 조선일보는 경영난을 겪고 있었어요. 조만식은 이를 수습하고 언론을 통해 민족운동을 펼쳤어요.

조선총독부는 중일 전쟁 후 조만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지원병제도에 적극 협조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조만식은 조선총독부의 요구를 모두 거절했어요. 그리고 협조를 간청하러 온 일본군에 맞서 한국 청년들의 징병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일제 경찰에 잠시 구속되기도 했어요.

“조선총독부가 계속 무리한 일을 시키려 하는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 고향으로 가서 피해야겠다.”

이 무렵 조선일보의 경영도 어려워지자 조만식은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갔어요.

광복 후 북한에서 활동하다

“아버지, 제가 평양으로 돌아가던 중 면사무소 앞에서 라디오 방송을 들었는데 일제가 항복했대요.”

1945년 8월 15일 조만식은 자신의 고향에서 광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광복 후 서울에서는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져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 준비를 했어요.

평양에서도 여러 민족운동가가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조선건국준비평남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보통은 줄여서 ‘평남 건준’이라 불러요. 조만식은 평남 건준 위원장 자격으로 광복 후 우리 민족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기 생각을 밝혔어요.

“전쟁에서 진 일본인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하지 맙시다. 또 조선 동포끼리 사사로운 복수를 하지 말고, 서로 뜻을 모아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힘써야 합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조만식의 마지막 모습>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조만식이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덕분에 평양 사람들은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광복을 맞이했어요. 그런데 조만식의 활동은 쉽지 않았어요. 8월 26일 소련군이 평양에 왔거든요. 소련은 38선 북쪽 땅에 자신들의 공산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국가를 만들려 했어요. 조만식은 소련 군정이 하는 일이 우리나라를 분단시키는 것으로 생각하여 협조하지 않았어요.

결국 1946년 1월 조만식은 소련군과 김일성 일파에 의해 평양 호텔에 갇혀 지내게 되었어요. 조만식을 아꼈던 여러 민족 지도자 중에는 그에게 남쪽으로 갈 것을 권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조만식은 북한에 사는 동포들과 함께하겠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1950년 6·25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때에 북한에서 죽음을 맞이했어요. 조만식이 북한에 남아 북한 동포와 함께 하겠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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