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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다

<여운형 선생 표석(서울 종로구)>   

“몽양 선생이 괴한의 총에 맞고 돌아가시다니 이보다 슬픈 일이 또 있을까?”

“그러게 말이에요. 이렇게 비가 내리는 것을 보니 하늘도 몽양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같아요.”

1947년 괴한의 총에 맞아 불행하게 죽음을 맞은 한 민족 지도자의 장례식이 거행되었어요. 몽양이라 불리던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근대적인 학문을 배우다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진 이 사람은 바로 민족 지도자인 여운형이에요.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양반이었던 여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여운형의 어머니는 커다란 해를 품에 안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해요.

“앞으로 우리 손자를 몽양이라고 불러야겠다.”

여운형이 태어나자 그의 할아버지는 ‘태양을 꿈꾸다.’라는 뜻이 담긴 ‘몽양’이란 호를 지어주었어요.

여운형은 집안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어요. 그의 어머니가 30살이 넘은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었거든요. 어머니는 여운형이 태어나기 전 3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니 집안사람들이 여운형을 얼마나 아꼈을지 짐작할 수 있겠죠.

15살이 된 여운형은 서울로 올라와 배재학당에 입학했어요. 배재학당은 미국인 선교사가 근대적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학교에요. 그런데 여운형은 배재학당을 1년쯤 다니다가 흥화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배재학당을 다닌 기간은 짧았지만 이곳에서 배운 신학문은 여운형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어요.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근대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의 3년 상을 끝낸 후 여운형은 집안의 노비 10여 명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어요.

“이 노비문서는 불태울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자유로운 신분이니 자기에게 알맞은 직업을 택해서 살아가도록 하세요.”

“아니, 갑자기 무슨 일이신가요?”

“여러분과 저는 날 때부터 평등한 사람들입니다.”

여운형은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집안의 노비를 자유로운 신분으로 풀어주었어요.

을사늑약 후 일본에 반대하는 운동에 나서다

“그 소식 들었나? 민영환 대감이 자결했다는군.”

“을사늑약 체결 소식에 분을 이기지 못했다는군.”

“나라를 아끼던 훌륭한 분이셨는데… 안타까운 일이네.”

1905년 일제는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어요. 당시 여운형의 나이는 20살이었어요. 여운형은 이때부터 일본에 반대하는 운동에 나섰어요. 가장 먼저 한 것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민영환의 유서 내용을 알리는 것이었어요. 그의 연설은 친일적인 사람조차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고 해요.

이후 1907년부터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한창 진행되기 시작했어요. 여운형은 경기도 양평에 국채보상운동 지회를 세우고 활동하면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했어요.

“여러분! 일제에 진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모금을 하여야 합니다. 담배는 나라를 되찾은 후 다시 피울 수 있으나 빼앗긴 나라를 찾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습니다.”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움직여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해요. 국채보상운동은 여운형과 같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어요.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여운형>   

세계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리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어요. 이 무렵 여운형은 새로운 학문을 더 공부하기 위해 1914년 중국으로 떠났어요. 처음 중국 난징에 있는 한 대학에서 공부하던 여운형은 1917년 중국 난징에 있는 한 대학에서 공부하던 여운형은 상하이로 활동 무대를 옮겼어요.

당시 상하이에는 프랑스를 비롯하여 몇몇 나라가 독자적으로 다스리는 지역이 있었어요. 그래서 일본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하기에 알맞은 곳이었지요.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나라의 독립운동가들도 이곳에 모여 독립운동을 벌였어요.

<1920년대 상하이 교민들과 함께 있는 여운형>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1918년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여운형은 신한청년당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어요. 그 무렵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났어요. 미국을 중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 세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회의를 열려고 했어요. 신한청년단은 그곳에 대표를 보내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리기로 결정했어요.

“김규식이 영어를 잘하니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단의 대표로 보냅시다.”

“국내에도 사람을 보내 이 소식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단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보냈어요. 또 믿을 만한 사람을 국내에 보내 이 소식을 알렸어요. 국내 민족운동가들은 우리의 독립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3·1 운동을 일으켰어요. 3·1 운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퍼져나갔어요. 깜짝 놀란 일제는 총칼을 앞세워 3·1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어요.

3·1 운동 후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었어요. 여운형은 임시 정부에서 외무부 차장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어요.

한편, 일제는 3·1 운동 이후 민족분열 정책을 통해 우리 민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어요. 일제가 눈여겨 본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여운형이었어요. 여운형은 김규식을 신한청년단의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후 이름이 널리 알려졌거든요. 그래서 일제는 여운형을 도쿄로 초청했어요. 여운형은 일본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약속받고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이해 11월 여운형이 일본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 여러 독립운동가는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라며 반대했어요. 그럼에도 여운형은 일본으로 갔어요. 많은 독립운동가는 여운형이 독립운동을 포기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여운형은 정말 독립운동을 포기했던 것일까요?

아니에요. 오히려 여운형은 일본의 고위 관리들과 여러 차례 만나 회의하면서, 3·1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일제의 잘못을 지적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했어요. 또 일본의 한 호텔에 초대되어서는 3·1 운동을 한 이유를 설명하는 연설을 했어요.

<일본에서 3·1 운동에 대해 연설하는 여운형>   

여운형은 일본에서 잠깐 있으면서 여러 활동을 무사히 마친 후 상하이로 돌아왔어요. 또한 1922년 1월 여운형은 모스크바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민족대표로 가서 한국의 독립을 힘주어 말하기도 했어요.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오다

여운형은 상하이에서 여러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쳤어요. 그중에는 중국 사람들과 함께 일제에 맞서기 위해 만든 단체도 있었어요. 이런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중국 사람들 앞에서 여러 차례 연설도 하였어요. 이제 여운형은 중국에서도 우리 민족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어요.

1929년 여운형은 우리나라로 돌아왔어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기 때문이에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한 지 12년 만의 일이었어요.

국내에 온 여운형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여러 달 동안 조사를 받은 후 재판을 받았어요. 여운형이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이 이를 보기 위해 몰렸어요. 그러다 보니 재판이 연기되기도 했어요.

여운형은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났어요. 일본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에 다시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조선중앙일보 신문사의 사장이 되어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했어요. 이 시기 여운형은 다 쓰러져가던 이순신 장군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는 일을 했어요. 또 김구 선생의 가족들이 상하이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 일제의 감시를 받았어요.

<1935년 감옥에서 나온 안창호를 위로하는 여운형(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9월 5일부터 자진 휴간을 하다가 1937년 11월 폐간되었어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대한 기사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이 신문사는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가 잘 보이지 않도록 지웠거든요. 일제는 신문사 사장을 그만둔 여운형에게 자신들을 위해 일할 것을 권했어요.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했어요. 여운형은 일제의 이런 요구들을 단호하게 거부했어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여운형은 일본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고, 일제가 곧 망하게 되리라 생각했어요. 여운형은 이 사실을 주변의 몇몇 사람에게 이야기했어요. 소문은 점점 퍼져나갔어요. 일제는 이 소문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여운형을 다시 체포해 일본 편에 서라고 협박했어요. 집요한 협박에 굴하지 않던 여운형은 또 감옥살이를 했어요.

광복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다

1943년 7월 감옥에서 풀려난 여운형은 비밀리에 사람들을 모아 단체를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일제가 물러난 후를 대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어요.

<19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을 환호하며 맞이하는 시민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어요. 당시 대부분의 민족운동가는 해외에서 이 소식을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광복 후 바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여운형은 달랐어요. 광복 전 1944년 8월 비밀리에 만든 건국동맹을 바탕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보통은 글자를 줄여 ‘건준’이라고 불러요. 여운형은 ‘건준’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했어요.

그러나 여운형과 ‘건준’의 활동은 쉽지 않았어요. 남한에 온 미군이 그들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거든요. 상황은 점점 나빠져 우리나라는 38도선을 기준으로 서로 다른 정부가 세워지게 되었어요. 여운형은 이를 막기 위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펼쳤어요. 또 통일 국가를 만들기 위해 북한을 여러 번 방문하여 김일성과 만났어요.

미군정은 이런 여운형의 활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북한으로 가지 못 하도록 말렸어요. 이에 대해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내 집안에서 내가 윗방으로 가든 아랫방으로 가든 손님이 무슨 상관이냐”

그러나 우리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한 여운형의 노력은 더는 계속될 수 없었어요. 1947년 7월 19일 한지근이라는 자가 쏜 총을 맞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거든요. 1947년 8월 3일 장례를 치르던 날 많은 사람이 광화문 사거리에서 동대문까지 가득 채우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어요.

<장례식에 모인 많은 사람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여운형은 일제강점기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예요. 하지만 광복 후 세워진 정부에서 한동안 그의 활동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2008년 그 업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게 되었어요.

여운형이 총탄에 쓰러지지 않고 ‘건준’을 통해 좀 더 많은 활동을 했다면 광복 후 우리나라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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