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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의열단을 이끌며 독립 투쟁을 벌이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가 중 일제가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걸 정도로 두려워했던 사람이 누군 줄 알아?”

“글쎄, 아무래도 유명한 김구 선생이 아닐까?”

“아니야,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사람은 바로 의열단 단장이었대.”

이 의열단 단장은 누구였을까요? 의열단은 어떤 일을 했을까요?

일장기를 화장실에 빠뜨리다

의열단 단장이었던 이 사람은 바로 김원봉이에요. 그는 1898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밀양공립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지요.

김원봉은 어린 시절부터 일제에 대한 저항심이 남달랐어요. 1911년 그가 보통학교 다니던 때의 일이에요. 일왕의 생일 축하 기념행사를 학교에서 열게 되었어요. 행사를 앞두고 학교에서 소동이 벌어졌어요.

“아니 일장기를 화장실에 다 처넣었다고? 누구 짓인지 빨리 밝혀내라!”

이 일은 김원봉과 윤세주가 한 일로, 그 때문에 그들은 퇴학을 당하고 말았지요. 이후 그는 동화중학을 거쳐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니게 되었어요. 두 학교에서 그는 독립 정신을 키워 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지요.

“강력한 무력이 있어야 우리가 강도 일본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 빨리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

김원봉은 군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먼저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가려 했어요. 그래서 우선 독일어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어요. 하지만 방학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좌진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나게 되면서 생각에 변화가 생겼어요.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빨리 군대를 조직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의열단을 조직해 투쟁하다

1919년 온 민족이 참여한 3·1 운동이 일어났어요.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었지요. 하지만 비폭력 원칙에 따라 펼쳐진 만세운동을 일제는 총과 칼로 무자비하게 탄압했어요. 그들의 총칼에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죽어 나가고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요.

이 소식을 접한 김원봉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만은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만주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으며 본격적인 독립항쟁을 펼칠 준비를 해나갔어요.

“우리도 이제 무력으로 투쟁합시다. 비밀 조직을 만들어서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합시다.”

1919년 11월, 그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사람들과 뜻을 모아 만주 땅에서 의열단을 조직했어요. 처음에 13명으로 시작했는데, 단원의 수는 점점 늘어 70여 명까지 되었어요.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단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라의 독립을 앞당기는 데 힘을 보태려 했어요. 조선총독부, 경찰서 등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주요 인물과 경찰, 군인 등을 처단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했어요. 김원봉은 직접 폭탄을 만들고, 성능 좋은 폭탄을 외국에서 들여오기도 했지요.

의열단 단원들의 생활은 어땠을까요? 큰일을 앞둔 사람들이니 늘 긴장하고 살았을 것 같다고요?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사격 연습을 하고 의거를 준비하는 등 큰일을 앞둔 사람들답게 진지했어요. 하지만 수영과 테니스 등 운동을 하며 가장 좋은 몸 상태를 만들었지요. 그러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기 위해 오락을 즐기며 명랑하게 생활했어요.

무엇보다 의열단 단원들은 사진 찍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사진 찍을 때면 항상 양복을 갖춰 입고, 머리 모양도 깔끔하게 정리했어요. 마지막 사진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의열단 단원들, 일제의 심장에 폭탄을 던지다

의열단 단원들의 활동은 거침이 없었어요. 김익상은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두 개와 권총 두 자루를 받아들고 국내로 들어왔어요. 그는 일본인 전기 수리공으로 변신하고, 막힘없이 일본말을 하며 철통같은 경비를 뚫었어요. 전기 수리를 하러 왔다고 해 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총독부 안에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를 파괴했어요. 그런 뒤 여유 있게 걸어 나와 5일 만에 중국에 있는 김원봉 앞에 나타나 그를 깜짝 놀라게 했지요.

<동양척식주식회사>   
독립기념관

김상옥은 종로 경찰서에,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지요. 김상옥은 서울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수백여 명의 일제 경찰들과 맞서기도 했지요. 총격전은 3시간여 동안 계속되었고, 거리에서는 아주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어요. 목숨 건 의열단 단원들의 투쟁은 독립투쟁 중 가장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투쟁 중 하나였어요. 일본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지요.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시 나가사키 형무소로 보내라. 비용은 모두 외무성에서 댈 것이다.”

일제 경찰은 김원봉을 체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요. 현상금도 어마어마하게 내걸었어요. 일제 식민 통치 기간 가장 높은 현상금이 걸린 사람이 바로 김원봉이었어요. 하지만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는 쉽게 잡히지 않았어요.

< >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김원봉은 신채호에게 의열단의 선언문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의열단 단원들은 어느 독립운동 단체보다 격렬하게 일제와 싸웠어요. 의열단에는 여성들도 있었어요.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박차정이지요. 김원봉과 결혼한 그녀는 이후 남편과 함께 독립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박차정과 김원봉>   
독립기념관

조선의용대를 만들고,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이 되다

의열단의 활동은 사람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고, 독립의 희망을 불어넣었지요. 하지만 암살과 파괴만으로는 독립을 앞당길 수 없었어요. 많은 의열단 단원이 체포되어 희생되기도 했지요. 김원봉은 다른 방향을 고민해야만 했어요.

“이제는 대규모의 조직적인 투쟁을 준비해야 하겠군.”

1926년 김원봉은 황푸군관학교에 들어가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어요. 중국 국민당 정부 사람들 등 많은 사람도 만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조직적인 군대를 만들어 무장 투쟁을 할 궁리를 했어요. 이후 그는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시켰어요. 그리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조선인혁명간부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독립운동가로 길러냈어요.

<조선의용대(깃발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김원봉)와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의 김원봉>   
독립기념관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어요. 김원봉은 다음 해 조선의용대를 만들었어요.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동의를 얻어 만든 군대예요. 사실 다른 나라에서 군대를 만든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어요. 군대가 만들어지자 우리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그 수가 300여 명이나 되었지요.

중국 국민당 정부는 본토 깊숙이 쳐들어오는 일본에 맞서는 데 조선의용대의 도움을 받았어요. 이들은 주로 전투보다는 포로 심문, 군사 문서 번역, 선전 활동 등을 통해 일본에 타격을 주었어요. 조선의용대에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조선의용대는 훗날 둘로 나뉘었어요. 일부 대원들은 김원봉을 따라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만든 한국광복군에 들어갔어요. 그 덕분에 한국광복군은 전투력이 훨씬 강해졌지요. 나머지 대원들은 사회주의 계열 조직의 부대가 되었어요.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무부장(지금의 국방부 장관)과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어요.

<약산 김원봉의 모습>   
독립기념관

김원봉, 광복 이후 북으로 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나라 밖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하나, 둘 조국으로 돌아왔어요. 김원봉도 들어와 통일된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그는 임시 정부의 주석 김구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이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했어요.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어요. 결국 그는 공산주의의 우두머리로 몰려 친일파였던 경찰에게 체포되어 뺨을 맞고 고문까지 받았어요.

“내가 일본 놈들에게도 당하지 않은 수모를 광복을 맞이한 후 친일파 경찰에게 당하다니…”

김원봉은 그날 이후 3일 내내 통곡을 했다고 해요. 이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로 인해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야 했지요. 그러던 중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가 김일성을 만나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남북 협상을 벌였어요.

하지만 남쪽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자, 김원봉은 돌아오지 않고 북에 남게 되었어요. 이후 북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정치 활동을 했지요. 그러던 중 1958년쯤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어요. 그가 왜 죽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어요. 김일성과 다른 입장을 가져 제거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열렬히 독립운동을 펼친 사람이지만, 남과 북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어요. 남한에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주는 훈장도 받지 못했고, 북한에서도 대우받지 못했지요.

요즘들어 김원봉의 활동이 일반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고 있어요. 그러면서 그의 공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어요. 우리도 김원봉처럼 모든 것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지만 잊혀져야만 했던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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