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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위해 하늘을 난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권기옥>   
숭의여자고등학교

“왜 비행사가 되고 싶은 것이오?”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 일왕이 사는 궁성을 폭파하고 싶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비행사가 되고자 한 이 사람이 바로 권기옥이에요. 그녀는 어떻게 비행사가 되었을까요? 과연 그녀의 꿈은 이루어졌을까요?

하늘을 나는 꿈을 꾸다

권기옥은 1901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어요.

“또 딸이야. 갈네라고 불러야겠군.”

둘째 아이도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나자, 그녀의 아버지는 ‘갈네’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가라’는 뜻으로 얼른 죽으라는 의미였지요. 당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여성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 엿볼 수 있어요.

권기옥의 집안은 원래 부자였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노름에 정신이 팔려 그 많던 재산을 날렸지요. 살 집도 없어 남의 집 문간방에 살아야 했어요. 11살밖에 안 된 그녀도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어야 했어요. 학교에 다니는 것은 꿈을 꿀 수도 없었지요. 어깨너머로 언니의 책을 들여다보며 글자를 배웠어요.

그러던 그녀에게 배움의 길이 열렸어요. 12살의 나이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송현소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지요. 송현소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숭의여학교(현 숭의여자 중·고등학교) 3학년부터 다니게 되었어요.

권기옥이 비행사를 꿈꾼 것은 언제였는지 아세요? 바로 열일곱 살 때였어요. 평양에서 미국인 아트 스미스가 하늘에서 곡예비행을 하는 것을 보았던 그때였지요.

‘하늘을 나는 기분은 어떨까? 나도 하늘을 날고 싶다.’

난생처음 비행기가 나는 것을 본 권기옥은 그날 이후 비행사를 꿈꾸게 되었어요.

<미국인의 곡예비행을 보며 꿈을 키우는 권기옥>   

송죽회에 가입하고, 만세 운동에 참여하다

1919년 졸업반이던 권기옥은 숭의여학교 교사인 박현숙의 권유로 비밀조직인 송죽회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송죽회는 숭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여성 독립운동 단체예요.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의 ‘송’자와 대나무의 ‘죽’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지요.

송죽회에 가입한 권기옥은 3·1 운동을 준비하며 일본인 기숙사 사감의 눈을 피해 태극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 만세 운동을 펼쳤어요. 하지만 교사 박현숙에 이어 그녀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3주 동안 갇히게 되었지요.

<숭의여학교의 학생들>   
숭의여자고등학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 자금을 모으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졌어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니 많은 자금이 필요했어요. 권기옥도 숭의여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어요.

“제 머리카락을 잘라 마련한 돈이에요. 얼마 안 되지만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이건 저희 어머니께서 가락지를 팔아 마련해 주신 돈이에요.”

학생들은 독립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련한 돈을 가져왔어요. 권기옥은 모금한 돈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냈어요. 그녀는 1919년 10월 평양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어요.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하기도 했어요.

“임시 정부와의 관계를 얼른 대거라.”

“이 여자는 지독하군. 도무지 말을 하지 않는군.”

권기옥의 의지는 대단했어요. 아무리 혹독한 고문을 해도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비밀을 캐내지 못한 경찰은 ‘검찰에서 단단히 다루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고 해요.

그녀는 감옥에서 6개월을 보낸 뒤 풀려났어요. 풀려난 뒤에도 독립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어요. 일제의 식민 통치 기구 중 하나인 평안남도 도청을 폭파하기 위해 온 임시 정부 요원을 숨겨 주었어요.

이후 권기옥은 임시 정부로부터 받은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다 일본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요. 불안하고 힘겨운 날들을 보내던 그녀는 일본의 눈을 피해 몰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기로 결심하고 멸치잡이 배를 탔어요. 작은 나무배였기에 20여 일이 지난 후에야 상하이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윈난항공학교에 입학하다

상하이로 건너간 권기옥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요 인물들을 만났어요. 비행사 양성의 필요성을 알고 있던 노백린과 안창호를 만나면서 그녀의 꿈은 더욱 확실해졌어요.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가 일왕이 살고 있는 궁에 폭탄을 던지는 꿈 말이에요. 그래서 항공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했어요.

안창호는 독립운동에 비행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했어요.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비행하며 중요한 정보를 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또 한국인 비행사가 하늘을 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리라는 확신이 있었지요. 훗날 임시 정부에서 공군을 조직해 그녀를 공군 비행사로 쓸 큰 꿈도 꾸었어요.

하지만 권기옥이 중국에 있는 항공학교에 입학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어요. 두 곳에서는 여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어요. 입학 허가를 얻어낸 곳에는 비행기가 없어 제대로 훈련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녀가 선택한 곳은 중국 서남단 윈난성 쿤밍에 있는 윈난항공학교였어요. 그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써준 추천서를 가슴에 품고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윈난성의 쿤밍시에 도착해 직접 학교를 방문했어요.

<권기옥의 이동 경로>   

“저는 비행사가 되어 조선 총독부 건물을 폭파하고 일본 도쿄에 있는 일왕의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고 싶습니다.”

권기옥의 당당하고 결의에 찬 태도에 운남성의 군사령관인 탕지야오는 흔쾌히 입학을 허락했어요. 이렇게 그녀는 윈난항공학교의 학생이 되었어요.

하늘을 찌를 듯한 권기옥의 의지와 단단한 마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지요. 온 힘을 다해 공부하고 훈련을 받았어요. 비행기 공부는 물론 조종하는 방법과 체력을 기르는 다양한 훈련도 받았지요. 대략 9시간 비행 훈련을 마친 뒤 혼자서 단독 비행까지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단독 비행을 하는 권기옥>   

항공학교에 권기옥이 있다는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 경찰은 그녀를 검거하려 눈에 불을 켰어요. 심지어 사람을 보내 암살을 하려고도 했어요. 길거리에서 그녀를 발견하면 무조건 죽이라고까지 했어요. 그녀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새벽에 비행 훈련을 해야 했고, 학교 밖으로는 나갈 수도 없었어요.

1925년 2월 드디어 권기옥은 윈난항공학교 제1기 졸업생이 되었어요. 첫 한국인 여성 비행사가 된 것이지요.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공군이 되지는 못했어요. 당시 임시 정부는 공군을 조직할 만큼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중국군의 비행사가 되었어요.

그즈음 권기옥은 독립운동가인 이상정과 결혼하고 함께 중국 국민당 공군으로 활동하며 일본에 맞섰어요. 김원봉이 중심이 된 의열단과도 교류하며 다양한 독립운동의 방법을 찾기도 했어요.

<윈난항공학교 졸업장>   
숭의여자고등학교

중국 공군으로 활약하다

1935년 드디어 그녀의 꿈을 이룰 기회가 왔어요. 중국 공군이 실력을 선전하고 중국 청년들이 공군에 지원하도록 하기 위한 비행을 계획했거든요. 선전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여성 비행사가 비행하도록 했지요. 권기옥과 또 한 명의 여성 비행사가 뽑혔어요.

<선전 비행을 준비 중인 권기옥(왼쪽에서 두 번째)>   
숭의여자고등학교

“드디어 일왕이 사는 궁성에 폭탄을 퍼 부울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군.”

권기옥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렸어요. 그날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지요. 하지만 그녀의 꿈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비행기 프로펠러가 부서지는 바람에 계획이 2주나 연기되었어요. 그사이 일본이 베이징 부근 지역을 점령하는 바람에 선전 비행은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안타깝게도 그녀는 얼마 후 공군도서관으로 이동 명령이 났고 비행사로서 더 이상 활약할 수 없게 되었지요.

교관으로 활동하고, 한국애국부인회회에 참여하다

일본이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공격하자 그녀는 남편과 함께 충칭으로 옮겨갔어요. 충칭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마지막 청사가 있던 곳이지요. 그곳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였어요. 영어와 일어를 가르치고 일본인을 구별하는 방법도 가르쳤다고 해요. 비행사로서 독립 투쟁을 벌일 수는 없었지만, 이런 활동 모두 우리의 독립을 위한 것이었지요.

1943년에는 다시 만들어진 한국애국부인회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그녀는 사교부장을 맡아 여러 갈래로 나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하나로 모으고 독립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어요. 또 한국광복군 비행대를 만들 구상도 했어요. 미국 군대와 협력해 일본에 맞서 직접 전투에 참여할 계획도 세웠어요.

<한국애국부인회 사람들(권기옥은 오른쪽 두 번째)>   
숭의여자고등학교

그러던 중 1945년 8월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했어요. 그녀는 2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이후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약하며 공군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또한 출판사 사장을 하면서 책을 출판하기도 했어요. 나이가 들어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배움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기도 했어요.

권기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순종을 강요받던 시대에 비행사를 꿈꾼 깨어있는 여성이었어요. 대부분 남성들이 조종하던 군용 비행기를 조종한 최초 한국인 여성 비행사로 차별과 편견의 벽을 허물어뜨렸지요. 또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쳤어요. 그 공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기도 했어요.

그녀는 자신의 꿈을 온전히 이루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며 살았기에 늘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하지 않았을까요? 권기옥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녀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너희도 나처럼 큰 꿈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어.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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