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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한 민족 기업가, 유일한

<유일한기념관(서울 동작구)>   

“유일한 박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나? 유한양행을 만들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분이셨는데…”

“보았네,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 활동에 기부하셨다고 하셨다니 대단한 분인 거 같아.”

“그것뿐만 아니야.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도 하셨다고 해.”

유한양행을 만들고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 활동에 기부한 이분은 누구일까요? 그는 어떤 일을 했기에 사회적으로 존경받을까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어요

유한양행을 만든 사람은 유일한이에요. 그는 1895년 평양에서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경상북도 예천이 고향이었던 유일한의 아버지는 장사를 하며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평양에 살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미국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어요.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유일한도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지요.

아버지: “일한이를 부강한 나라인 미국에 보내 공부시켜야겠소.”

어머니: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한성도 가보지 못한 아이를 미국에 보내다니요? 저는 절대로 보낼 수 없어요.”

어머니가 크게 반대했지만, 교육열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유일한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했어요. 아버지는 그 후 둘째 아들은 러시아, 셋째 아들은 중국, 다섯째 아들은 일본으로 유학 보냈어요.

유일한은 1904년 9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공부하기 위해 떠났어요. 배를 타고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일한은 중부의 네브라스카주의 커니라는 조그마한 농촌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기독교를 믿었던 두 자매의 집에서 살게 되었어요. 두 자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고등학교에 가기 전까지 유일한은 7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어요.

<유일한이 미국에서 활동했던 도시>   

유일한은 14살이 되던 해인 1909년 헤이스팅스에 있던 한인 소년병학교에 입학했어요. 이 학교는 무장독립투쟁을 주장한 박용만이 커니에 있는 한인 농장을 빌려 세운 것이에요.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위해 세운 최초의 무관 학교이지요.

유일한은 한인 소년병학교의 학생 중 가장 나이가 어렸어요. 학교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네브라스카주에 있는 한인들이 1년에 일인당 3달러를 내서 마련했고요. 학교는 방학 때 운영되었는데, 오전에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에 군사훈련을 하고 저녁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어요. 너무나 고된 일과였지만 학생들은 별다른 불평 없이 이 과정을 성실히 해냈어요.

한인 소년병학교에 학생들이 점점 모여들고 규모가 커지면서 1910년 헤이스팅스에 있는 대학 건물에서 공부하고 운동장을 빌려 군사훈련을 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학교는 박용만이 샌프란시스코로 가게 되자 문을 닫아야 했어요.

<한인소년병학교에서 훈련하는 모습>   

1911년 유일한은 자신을 보살펴주던 자매들과 헤어져 헤이스팅스시에 갔어요. 커니는 작은 농촌 마을이라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유일한은 헤이스팅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스스로 학비를 벌기 위해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신문 배달 등을 했어요. 학교에서는 공부와 함께 미식축구부 선수도 했어요.

공부하라고 미국에 보낸 아들이 미식축구 선수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당장 그만두라고 했어요. 유일한은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아버지를 설득했어요. 그리고 축구 선수로 활약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던 유일한>   
유한양행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일한은 바로 대학에 갈 수 없었어요. 당시 일한의 가족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북간도에 가서 살았어요.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장남인 일한에게 돌아와 가족을 돌보라고 했어요. 유일한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 미국에서 돈을 벌어 가족에게 보내기로 하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선생님을 찾아가 이 문제를 의논했어요.

선생님은 일한이 은행에서 100달러를 빌릴 수 있도록 보증을 서주었어요. 돈을 가족에게 송금한 후 유일한은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 변전소에 취직했어요. 열심히 일해서 돈을 갚았고 20살이 될 무렵인 1916년 미시간대학에 입학했어요.

유일한은 미시간대학을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학비를 벌기 위해 중국인들에게 중국 전통 상품도 팔았어요. 당시 미국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살았어요. 그들은 미국이 대륙횡단 철도를 건설할 때인 1860년대부터 이곳에 와서 살고 있었거든요. 고향을 그리워했던 중국인들은 유일한이 파는 상품을 많이 구입했어요. 덕분에 유일한은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사업가로 성공한 유일한

1919년 4월 14일부터 3일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가 열렸어요. 이 대회는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소식을 듣고 독립 의지를 보이기 위해 개최한 것이에요.

당시 24세의 대학생이던 유일한은 이 대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어요.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설명하는 결의문’도 만들어서, 이를 여러 사람 앞에서 낭독했어요. 대회 마지막 날에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시가행진도 했어요. 이때의 경험은 훗날 독립운동을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지요.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한 대표들>   
국사편찬위원회

그 후 대학을 졸업한 유일한은 제너럴 일렉트릭이라는 회사에 회계사로 취직했어요. 이 회사는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만든 회사로 누구나 일하고 싶어 하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스스로 회사를 세우고 사업을 하기 위해서였죠.

유일한은 대학 시절 중국인들에게 물건을 팔던 경험을 살려 27세가 되던 1922년 숙주를 판매하는 라초이 회사를 세웠어요. 숙주는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만두에 꼭 필요한 재료여서 미국의 수많은 중국 음식점에 판매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유일한의 예상이 맞아떨어져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어요. 1925년에는 중국 출신인 호미리 여사와 결혼도 했지요. 이제 유일한은 미국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게 되었지요.

1925년 유일한은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식민지 조선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가난과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받는 동포들을 봤어요. 그러자 유일한은 잘나가던 미국의 사업을 정리하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어요. 유일한은 우리나라로 돌아오기 며칠 전 서재필을 만나러 갔어요.

유일한: “서재필 선생님! 며칠 있으면 조선으로 가게 되어 인사 왔습니다.”

서재필: “어려운 결심을 했군요. 부디 조선에 가서 건강하고 뜻한 바를 이루길 바랄게요. 그리고 이것은 내 딸이 만든 버드나무 목각 판화입니다.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 돌아와 유한양행을 만들다

유일한은 1926년 10월 가족과 함께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왔어요. 미국에서 가져온 50만 달러의 재산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미국에서 약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회사인 유한양행을 차렸어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과 기생충, 피부병 등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았던 유일한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거든요.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유일한은 서재필이 선물로 준 목판화의 버드나무를 유한양행의 심볼로 삼았어요. 유한양행은 미국에서 피부약, 결핵약, 구충제 등을 수입해서 병원에 판매했어요. 뿐만 아니라 안티푸라민과 같은 약도 만들었어요. 평소 유일한은 다음과 같은 마음으로 기업을 경영했어요.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유일한은 이러한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1939년 11월 24일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바꾸고 주식을 종업원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또 새로 공장을 지을 때 종업원들을 위한 기숙사, 운동장, 수영장 등을 함께 만들었어요.

1930년대 유한양행은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 베트남 등에 물건을 수출하며 그 규모가 점점 더 커졌어요. 유일한은 1938년 4월 사업을 더욱 키우기 위해 유럽과 미국을 돌아보러 떠났어요. 그런데 광복이 될 때까지 국내로 돌아오지 못했어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나빠졌고, 일제가 미국에서 온 유일한이 만든 회사인 유한양행을 탄압했기 때문이지요.

다시 미국에 살게 된 유일한은 대학원에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그리고 1945년 1월에는 남몰래 미국의 냅코 작전을 지원했어요. 냅코 작전은 미국의 특수공작기관인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이 한국인 특수공작원을 양성해 한반도의 인천, 황해도, 서산 등에 침투시키고 비밀조직을 만들려고 한 것이에요.

이를 위해 1944년부터 한국인 19명을 비밀리에 훈련 시켰는데, 유일한은 50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자원했던 것이지요. 이 작전은 일본이 1945년 8월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실행되지 못했어요.

<냅코 작전>   

광복 후 국내에서 모범적인 기업 활동을 하다

미국에서 광복을 맞이한 유일한은 얼마 후 우리나라로 돌아와 유한양행을 다시 맡아 운영했어요.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유한양행은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기업을 위해 헌신한 종업원 덕분에 큰 피해 없이 회사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1958년 유일한은 유한양행의 운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유한의 정신과 신조’를 만들었어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우리는 힘을 다하여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 그렇게 하기 위하여 첫째, 경제 수준을 높이며 둘째, 한결같이 진실하게 일하고 셋째, 각자와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

이러한 그의 경영철학이 바탕이 되어 그 후 유한양행은 계속 성장해 나갔어요.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0년대 후반 유한양행은 대대적인 세무 조사를 받았어요. 그 당시는 여러 기업이 정부에 정치에 필요한 돈을 제공하며 사업을 했어요. 그런데 유한양행은 이를 거절했기 때문이지요.

정부는 계속되는 세무 감사 속에서 유한양행이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증거는 찾지 못하고 오히려 내지 않아도 될 세금까지 잘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1968년 유한양행은 모범납세 기업으로 선정되어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어요. 덕분에 유한양행은 정치적 탄압을 피해갈 수 있었지요.

또 유일한은 1969년 주주 총회에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아니라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었어요. 이것은 당시 다른 어떤 기업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었어요.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돌려준 유일한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모범적인 기업으로 키우는 한편, 자신의 오랜 꿈인 교육 사업을 시작했어요. 이를 위해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세웠어요.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고 기숙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무료로 제공했어요. 이렇게 학교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많은 비용은 모두 유일한이 개인 재산으로 부담했어요.

그 후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이듬해 개인 주식을 기부하여 학생들을 교육하거나 장학금으로 사용하게 했어요. 1970년 유일한은 오랜 병환 중 마지막 공식 행사로 유한공업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했어요. 그곳에서 학생들에 훌륭한 기술자가 되라는 내용의 졸업 축사를 했어요.

모범적인 기업인으로서 교육 사업을 펼치던 유일한은 1971년 세상을 떠났어요. 그는 유언장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어요.

첫째,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둘째,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의 묘소와 주변 땅 5,000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되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공업 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어린 학생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 달라. 셋째, 내 소유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넷째,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라.

유언장의 세 번째 조항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은 훗날 ‘재단법인 유한재단’으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이 재단은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 외에 사회를 위한 여러 공익사업도 하고 있어요. 이렇듯 유일한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내놓았어요.

1995년 국가는 유일한의 공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주었으며, 유일한은 1999년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로 선정되기도 했어요.

친구들 중 혹시 유일한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유일한기념관을 방문하거나 유일한의 묘가 있는 유한동산을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유한 동산에 가면 유일한이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볼 수 있어요.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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