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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 전태일

<전태일 동상(서울 종로구)>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부근의 평화시장 앞에서 한 청년이 큰소리로 외치며 뛰어나왔어요.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몸은 불길에 휩싸였지요. 이 청년이 바로 전태일이에요. 그는 왜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을까요?

어린 시절, 어려웠던 나라 살림

전태일은 1948년 9월 대구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1948년 이전에는 방직공장 노동자였으나, 이후에는 재봉틀을 이용해 일종의 개인 사업을 했어요. 하지만 넉넉지 못한 살림에 늘 가족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지요. 당시에는 전태일의 가족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가난에 시달렸어요. 왜 그랬을까요?

전태일이 젖먹이 어린 시절이던 때 6·25 전쟁으로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국토는 황폐해져 먹고 살길이 막막한 경우가 많았어요. 1962년 국가에서는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 5년 단위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했어요.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경공업을 중심으로 경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해 나갔지요. 의류나 가발 등을 가공하여 수출하는 것이었지요. ‘한강의 기적’(한국의 빠른 경제 성장을 보고 외국인들이 붙인 말)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은 성실하게 일하며 헌신해야 했어요.

가족이 같이 살 집 한 칸도 없던 시절

전태일은 여섯 살까지 부산에서 살았어요. 이 시기 아버지 전상수는 미군 부대에 근무하며 미군 양복을 수선하고, 헌 군복과 모자를 옷으로 만들어 피난민에게 판매하였어요. 살림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힘들어졌어요. 그런데다 염색 공장에 맡겼던 옷감이 장마로 엉망이 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요.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전태일의 가족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어요. 하지만 서울에서도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잠잘 집도 구하지 못해 서울역 근처 염천교 다리 밑에서 노숙을 해야만 했어요.

아버지는 술로 보내는 날이 많았어요.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먹을 것을 구걸하기도 하고,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팥죽과 찹쌀떡 등을 팔았어요. 다행히 모은 돈으로 천막집 한 채와 재봉틀 한 대를 살 수 있게 되었어요. 전태일도 남대문초등공민학교(나중에 남대문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음)에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초등공민학교는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였어요.

하지만 이런 안정적인 생활도 오래 못 갔어요. 아버지가 또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거리로 나앉아야 했거든요. 어머니는 넋이 나가 지내는 날들이 많아졌어요.

어린 나이에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전태일

어머니마저 일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지자 전태일은 가족을 위해 나서야 했어요. 그때 전태일의 나이 12살이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니, 그 부담감은 너무도 컸어요.

전태일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어요. 신문을 팔고 구두도 닦았어요. 몸이 정말 힘들었어요. 학교를 계속 다닐 형편이 안 되어 결국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둬야 했어요. 방세도 내지 못한 전태일의 가족은 쫓겨나 천막집이 늘어선 개천가에서 잠을 자야 했지요.

아버지는 여전히 술로 보내는 날이 많았고,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어머니의 건강도 점점 나빠졌어요. 전태일은 동생 전태삼을 데리고 나가 위탁 판매소에서 삼발이, 솔, 방비, 조리 등을 받아 팔았어요. 하지만 물건이 잘 팔리지 않아 위탁 판매소에 내야 할 돈을 내지 못한 채 빚만 늘어갔어요. 힘든 생활 속에서 전태일은 가출을 하기도 했지요.

행복했던 청옥고등공민학교의 생활

서울 생활이 어려웠던 전태일의 가족은 다시 대구로 내려와 살게 되었어요. 마음을 고쳐먹은 아버지는 집에 재봉틀 한 대를 들여놓고 열심히 일을 했고, 전태일도 아버지의 일을 도왔어요. 그때 그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지요. 꿈에 그리던 학교도 다시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전태일은 밤에 문을 여는 야간학교인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니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날들을 보냈어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 나가 공부하니 몸은 힘들었지만, 전태일은 이때를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가장 빛나고 즐거웠던 날들로 기억하고 있어요. 친구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체육대회도 했어요. 전태일은 배움에 목말랐기에 수업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지요.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어요. 전태일의 아버지가 “열다섯 살에 공부를 해서 무슨 성공을 한단 말이냐? 일이나 해서 돈이나 벌어라”라며 학교를 그만두라고 했거든요. 아버지는 큰아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어떻게 해서든 그만두게 하려고 했어요.

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되어 노동자의 힘든 삶을 보다

전태일의 가족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고, 그는 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되었어요. 당시 청계천 주변에는 약 800여 개의 작은 공장이 있었어요.

2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옷을 만들었지요. 재단사, 미싱사를 비롯해 시다(일하는 사람의 옆에서 그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시다는 대부분 12~15살 어린 소녀들로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돈을 벌기 위해 농촌에서 올라온 경우가 많았어요. 어린 시다들은 다림질을 하고, 실밥 뜯는 일을 하며 미싱사나 재단사를 도왔지요.

시다부터 시작한 전태일은 얼마 후 미싱사가 되었어요. 월급도 조금 올라 가정 살림에 도움이 되었어요. 그런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어요.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는 어린 노동자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평화시장에 갓 시다로 취직했을 당시 모습(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전태일)>   
전태일재단

교실 넓이의 약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좁은 작업장에 10여 대가 넘는 재봉틀과 작업대가 놓였어요. 곳곳에 옷과 옷감 더미가 쌓여 있어 제대로 지나다니기 힘들었고, 좁은 공간에 다락방까지 만들어졌지요. 어린 소녀들은 다락방에서 허리도 펴지 못하고, 햇빛도 못 본 채 무려 하루에 14시간 넘게 일을 해야 했어요.

<다락방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모습>   

공장 주인들은 늦게까지 일을 시키기 위해 어린 소녀들에게 잠이 안 오는 약을 먹이기도 했어요. 당시 시다들은 한 달 월급이 3,000원이었는데, 고향집에 돈을 보내고 남는 돈으로 방세 내고 교통비 하고 나면 남는 게 없었어요.

1원짜리 풀빵 하나로 점심을 때우거나 굶기를 밥 먹듯 했어요. 위장병을 달고 살았고 코피를 쏟아가며 일을 해야 했어요. 핏기없는 누런 얼굴에, 피를 토하는 노동자들도 많았어요.

평화시장 건물들은 밖에서 보면 번듯해 보이지만 안은 마치 닭장과도 같았어요. 1960~70년대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노동자들은 너무도 어려운 삶을 살아내야 했지요.

노동자를 위한 ‘바보회’를 조직하다

재단사가 된 전태일은 점차 억울하다는 생각이 커져갔어요. 마침 그 무렵 노동자를 위한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듣게 되었어요. 그 법에 따르면 1일에 8시간, 1주일에 48시간만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현실은 하루에 14시간, 1주일에 98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고 있었지요. 이를 어긴다고 해서 처벌받는 공장 주인도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지요.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어요. 이후 근로기준법 책을 옆에 끼고 다니며 공부를 했어요.

1969년 6월 말 즈음, 전태일은 자신과 뜻을 같이할 10여 명의 재단사들을 모았어요. 모임 이름을 ‘바보회’라고 붙였어요.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찍소리도 못하고 살아온 자신들이 바보와 같아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지요. 하지만 자신들이 바라는 세상을 위해 바보처럼 온 힘을 다해 싸워보자는 의지도 담은 이름이었지요.

바보회의 회장이 된 전태일은 공장 주인들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도록 싸워나갈 것을 다짐했어요. 노동자를 사람답게 대우해 주는 모범적인 업체도 만들고 싶었지요. 노동법 관련 책을 사서 읽고 또 읽었어요. 책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접하게 된 전태일에게 작은 소망이 생겨났어요.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바보회 사람들과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좌절 속에 새로운 결심을 하다

바보회가 결성될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전태일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쳤어요. 그는 평화시장에서 위험한 인물로 소문이 나 공장에서 쫓겨났고, 다시 취직하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지요.

가족의 생계를 제대로 책임지지도 못하고 빚만 점점 늘어나니 전태일의 마음은 무거웠어요. 하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어요. 바보회도 잘 운영되지는 않았지만 그럴수록 있는 힘을 다했어요.

그는 1969년 8~9월쯤 노동자들의 근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설문지를 돌리고, 그것을 모아 서울시청 근로 감독관을 찾아갔어요.

하지만 근로 감독관의 반응은 시큰둥했어요.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류만 두고 가라고 했어요. 전태일은 힘이 쭉 빠졌어요.

‘노동청에 가야 하나? 대통령에게 편지라도 써야 하나?’

‘학생들은 시위도 잘하던데,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시위하는 방법이라도 배울 수 있을 텐데.’

전태일의 답답한 마음은 그가 남긴 일기장에도 잘 나타나 있어요. 일자리를 얻지 못한 그는 삼각산의 교회 수도원 공사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큰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나는 돌아가야 한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꿈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중략…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바치마.

전태일은 좀 더 나은 노동자들의 삶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결심을 했어요.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우이동 계곡에 놀러 갔을 때의 모습
(앞에 선글라스 낀 사람이 전태일)>   
전태일재단

희망이 보이는 듯하더니, 다시 어두워지다

전태일은 교회 수도원 공사장 일을 그만둔 후 다시 평화시장 재단사로 취직했어요. 그에 대한 소문이 가라앉은 덕분이었지요. 다시 뜻을 같이 할 재단사들을 모아 ‘삼동 친목회’를 결성했어요.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시장 세 건물의 재단사들의 모임이었지요.

그들은 비참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현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기로 했어요. 시청과 노동청을 찾아다니고, 방송국에도 가보았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지 않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관심을 보이는 신문사 기자 한 명을 만나게 되었지요. 전태일과 동료들은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뛸 듯이 기뻤어요.

골방에서 16시간 노동 소녀 등 2만여 명 혹사 근로 조건 영점, 평화시장 피복 공장

신문에 평화시장 관련 기사가 나가자, 노동청의 근로 감독관은 전태일을 제 발로 찾아왔어요. 하지만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시끄러운 목소리를 잠재우기 바빴어요.

전태일과 동료들은 비참한 현실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기로 마음먹고 시위를 준비했어요. 지켜지지도 않는 근로기준법 책을 불태우며 시위를 벌이기로 뜻을 모았어요.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 운동의 불꽃이 된 전태일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주변은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졌어요. 경찰들이 곳곳을 지키고 서 있었지요.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평화시장 건물에서 시위를 준비하며 상황을 살폈어요.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건물 밖으로 나와 현수막을 펼쳐들었어요. 현수막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현수막을 빼앗으려는 경찰과 노동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때였어요. 전태일이 사람들 앞으로 나와 가슴에 품고 있던 근로기준법이 적힌 책자를 한 손에 들고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어요.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전태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전태일은 구호를 외치며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가더니 길거리에 쓰러졌어요. 이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 주위로 몰려들었어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전태일은 쓰러지는 순간에도 가슴속에 맺힌 한마디를 외쳤어요.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는 전태일의 뜻을 받드는 노동자들이 남아 그가 외쳤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어요. 그리고 며칠 뒤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어요.

전태일의 분신 이후 학생과 시민 등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힘든 현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정부에서도 개선된 노동 정책을 내놓았어요.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고 어려운 상황을 바꿔 나가기 위한 운동도 펼쳐졌어요. 전태일의 죽음이 노동 운동의 불꽃이 된 것이에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일터에서 병을 얻거나 목숨을 잃고서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우리는 전태일의 마지막 편지를 기억해야 해요. 그가 힘에 겨워 못다 굴린 덩이를 굴리며,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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