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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의 침입을 이겨낸 고구려 산성

<아차산 4보루(서울 광진구)>   
문화재청

“여보게. 큰일 났네. 이번에도 외적이 쳐들어왔다고 하네.”

“걱정 말게나. 우리 고구려에는 튼튼한 산성들이 있지 않은가.”

삼국 시대 고구려는 중국에서 일어난 강대국들의 잦은 침입을 막아내며 동북아 최강 국가로 우뚝 선 나라였어요. 그것은 고구려를 튼튼히 보호해준 수많은 성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고구려에는 어떤 성들이 있었을까요? 그 성들은 고구려를 어떻게 지켜냈을까요?

‘산성의 나라’ 고구려

성은 적을 막기 위하여 흙이나 돌로 높이 쌓은 큰 담이에요. 사람들은 성을 쌓아 자신이 속한 마을이나 나라를 지켜냈어요. 처음에는 주위에 나무로 만든 목책을 치다가, 흙을 다져 쌓는 토성으로 발전하였어요. 그러다 전쟁이 잦아지고 규모가 커짐에 따라 수만 개의 돌을 쌓아 올린 튼튼한 석성을 쌓게 되었지요.

지금도 고구려 영토였던 중국 지역 일대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고구려 산성을 만날 수 있어요. 오녀산성, 환도산성, 국내성, 백암성, 안시성 등등.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에만 200여 개의 고구려 성이 남아 있다고 하니 엄청나게 많지요.

지금의 북한 지역에도 평양성, 대성산성, 황룡산성, 철옹성 등의 고구려성이 많이 남아 있어요. 물론 남한 지역에서도 고구려성이 있어요. 한탄강 주변 절벽을 따라 있는 소규모 성곽이나, 서울 아차산의 산마루를 따라 있는 고구려 보루들, 심지어 대전 근처의 금강 변에서도 고구려의 산성이 발견되고 있지요.

옛 고구려 영토가 있었던 요동 지역에 있는 고구려의 성은 광활한 대평원이 아니라 산간 지대와 평지의 접경 지점, 산의 안쪽에서 볼 수 있어요. 고구려 사람들은 평지보다 산 중턱에 성을 쌓았어요.

삼면이 높은 산이나 절벽으로 막혀 자연방어가 가능하고, 다른 한 면은 경사가 완만하여 출입이 가능한 곳이지요. 산성은 쌓기는 어렵지만 일단 쌓으면 적은 군사로도 쉽게 방어할 수 있었지요. 고구려는 산성을 중심으로 적을 방어하였어요.

<철옹성(평안북도 영변)
‘무쇠로 만든 항아리처럼 튼튼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의 고구려성. 철옹성은 ‘철옹성처럼 튼튼하다’처럼 지금도 빗대는 말로 쓰이고 있어요.>   
동북아역사재단

<연천 호로고루(경기 연천군)
임진강 강가에는 주요 길목마다 고구려성이 배치되어 있어요. 그 가운에서도 호로고루는 상류에 위치하여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이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해당해요.>   
문화재청

고구려 산성은 군사 방어선인 동시에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어요. 성주들은 장군인 동시에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관이었어요. 각성에는 군대를 지휘하는 장대나 초소도 있었지만, 지방을 다스리기 위한 관아나,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도 있었어요. 그래서 고구려 각 성에는 등급이 매겨져 있었어요. 고위 지방관이 다스리는 성, 하급 지방관이 다스리는 성 등 전략적 중요도와 다스리는 지역 범위에 따라 성의 지위가 달랐지요.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산성은 그냥 수만 많았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지탱한 기둥이었어요. 고구려를 ‘산성의 나라’라고 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에요. 이에 고구려 사람들은 멸망하는 그 날까지 온 국력을 기울여 성을 쌓고 또 쌓았어요. 산성은 곧 고구려의 상징이고, 산성이 없었다면 고구려도 없었을 거예요.

  

평지성과 짝을 이룬 산성

고구려 사람들은 산과 평지에 짝을 이루어 성을 쌓았어요. 평소에는 평지성을 중심으로 생활하다가 외적이 침략하면 산성으로 옮겨가 방어를 했지요. 평지성은 주로 교통이 편리하고 넓고 평평한 곳에 쌓았어요. 살기에 공간이 넓고 물을 구하거나 물자를 보급하기 쉬워 살기 좋았어요. 하지만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힘들다는 약점이 있었어요.

반면 산성은 길이 험하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곳에 쌓았어요. 산 중턱에 쌓아 올린 두터운 돌 성벽은 성벽을 공격하는 대형장비 없이는 무너뜨리기 힘들었어요. 설령 성벽 공격용 장비들이 있더라도 이들 무기를 산 중턱까지 끌고 올라가기는 불가능했어요.

좁은 산길이라 한 번에 많은 군사가 공격하기도 힘들고, 성벽이 있는 산 중턱까지 올라오느라 지칠 수밖에 없었지요. 때문에 산성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하였지요. 하지만, 평지성과는 달리 물자를 구하기 힘들어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불리하였지요.

이에 고구려 사람들은 산성과 평지성의 장단점을 고려해 일찍부터 도성에는 평지성과 산성을 모두 쌓았어요. 가령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살다가 외적이 침입하는 등의 비상시에는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였지요.

즉 평지성이 고구려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었다면, 산성은 전쟁에 대비한 피난과 방어를 위한 곳이었지요. 그래서 고구려는 도읍을 세울 때 늘 평지성과 산성을 함께 쌓았어요. 중국 지안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지요.

고구려는 도성이 있는 곳을 제외하면 대체로 산성을 훨씬 더 많이 만들었어요. 항상 주변의 여러 세력과 대결해야 했으니 방어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요. 산성을 쌓기 위한 장소와 쌓는 모양은 백성들이 피난해서 장기간 살아갈 수 있는지, 군대의 지휘와 방어가 손쉬운지 등을 두루 살펴서 결정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산과 평지가 만나는 자리여야 하고 산속에 넓고 평평한 곳이 있어야 하며, 주변에 강이 흘러 물을 쉽게 얻을 수 있고 교통도 편리한 곳이어야 하지요.

또한 고구려 사람들은 군사 방어와 지역 거점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지형을 찾아 나섰지요. 바로 넓은 골짜기를 감싸면서 강변의 평지를 끼고 있는 산 말이지요. 주변에 산비탈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고 골짜기가 넓어 주변 지역을 거느리기에 좋고 강이 가까워 물자를 운반하여 보관하기에 좋았지요.

고구려 산성은 치밀한 설계와 정교한 기술을 바탕으로 쌓은 거예요. 지금도 고구려 산성이 자리 잡은 곳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거나, 그 지역에서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 많아요.

<외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고구려 산성>   

오녀산성, 고구려의 첫 번째 산성

고구려는 주몽이 세운 나라에요. 주몽은 비류수(혼강) 유역의 작은 도시 졸본에서 나라를 세웠지요. 그때 그는 평지성인 졸본성을 쌓고, 위급할 때 피난하기 위해 졸본성과 연결된 산성을 쌓았어요. 그것이 바로 오녀산성으로 불리는 홀승골성이에요.

오녀산성은 중국 랴오닝성 환런현(요령성 환인현)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요. 오녀산의 북쪽과 동쪽으로 연결된 높고 낮은 여러 산봉우리 가운데서 가장 높고 험한 800m의 산마루를 중심으로 그 둘레를 오녀산성이 감쌌어요.

오녀산성은 산세가 험준하고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 좋은 천연 요새였지요. 하늘의 다섯 선녀가 성안에 있는 연못에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해서 오녀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어요.

<오녀산성(중국 랴오닝성)>   
동북아역사재단

<오녀산성 성벽>   
동북아역사재단

환도산성,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 쌓은 산성

고구려는 유리왕 때 졸본에서 압록강 중류에 있는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겼어요. 졸본에서처럼 강을 끼고 평지성인 국내성을 쌓아 일상생활의 중심으로 삼았지요. 그리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내성 뒤에 있는 환도산에 산성을 쌓았어요. 이것이 환도산성이에요. 고구려군은 평소에는 국내성에 거주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환도산성으로 들어갔지요.

환도산성은 골짜기를 둘러싼 산줄기를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골짜기 안의 넓은 땅을 활용할 수 있었어요. 더구나 압록강까지 내려다보여 적의 움직임을 잘 관찰할 수 있었지요. 또 남문을 통하지 않으면 성안으로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적의 공격을 막기도 쉬웠어요.

또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동심원 모양으로 방어선을 겹겹이 갖추었어요. 그래서 외적이 혹시 어느 한 길목을 돌파하더라도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기 쉬웠어요. 국내성 주변의 성곽과 방어 체계의 짜임새를 보면 놀라울 따름이에요.

<환도산성과 국내성의 위치>   

대성산성,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쌓은 산성

고구려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어요. 427년 장수왕은 대성산 남쪽 기슭(지금의 평양 시가지에서 동북으로 7km)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였어요.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안학궁이 바로 새로운 평지성이었답니다. 안학궁의 남쪽에는 대동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대성산이 병풍처럼 둘러쌌어요.

대성산에는 거대한 산성을 쌓아 평상시에는 대동강 변 평지에 위치한 왕궁(안학궁)에서 거주하다 적군이 침입하면 산성(대성산성)으로 들어가 싸웠지요. 평지성과 산성이 짝을 이루는 국내성의 방어 체계가 완벽하게 재현되었지요.

<대성산성 성벽(평양직할시 대성구역)>   
동북아역사재단

수와 당의 대군을 막아 낸 고구려 산성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해 송화강 연안 평야 지대에서 요동 평원 남단까지 천리에 걸쳐 성을 쌓았어요. 성을 천리에 걸쳐 일렬로 기다랗게 쌓았다고 하여 천리장성이라 불러요. 천리장성에는 성과 성 사이에 일정한 거리마다 수십 명의 군사가 머무를 수 있는 크고 작은 보루(요새)까지 세웠어요. 정말 물샐틈없는 방어막을 만들었지요.

고구려가 수와 당의 대군에 맞서 치열하게 전쟁을 치른 곳은 랴오둥이라 불리는 랴오허 동쪽 지역이에요. 그곳에는 어떤 고구려 성이 있을까요?

요동 평원의 평지성인 요동성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어요. 이 성을 점령하면 요동 지방을 지배할 수 있었지요. 612년 수 양제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포위했지만, 이곳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였지요.

<고구려 산성>   

이번에는 당군이 고구려를 쳐들어왔어요. 당 태종은 수 양제와는 달리 요동성 주변의 개모성, 건안성 등을 먼저 함락시킨 다음 요동성을 포위하여 함락시켰어요. 하지만 당 태종은 또 다른 고구려 방어선인 안시성에서 그만 발목이 잡히고 말았지요.

당군은 안시성을 포위한 채 성벽보다 높은 커다란 흙산까지 만들어 공격하였지만, 안시성의 고구려 사람들은 이를 잘 버텨 당군을 물리칠 수 있었답니다.

<오골성(중국 랴오닝성)
봉황산성이라고도 부르며 요동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이에요.>   
동북아역사재단

<백암성 성벽(중국 랴오닝성)
성벽 전체가 하얀 돌로 되어있는 성으로 방어를 위한 시설인 치가 성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요.>   
동북아역사재단

안시성과 건안성, 신성 등이 바로 이런 곳에 자리 잡은 천혜의 요새였어요. 이러한 지형의 이점 덕분에 수와 당의 수십만 대군이 몇 달을 공격해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요. 엄청난 대군이 몰려와도 수많은 고구려성을 뛰어넘어 도성까지 공격하기는 매우 힘들었지요.

이처럼 수많은 산성을 연결해 물샐틈없는 방어망을 구축했으니 10만, 100만 대군이 와도 겁나지 않았지요. 때문에 고구려 침략을 논의하던 외적의 장군들도 입을 모아 “고구려는 산에 의지해 성을 잘 쌓았기 때문에 쉽게 함락할 수 없다.”고 하였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이야기가 서려 있는 온달산성

온달산성은 고구려 온달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성이에요. 온달 장군은 평강 공주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바로 그 ‘바보 온달’이에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고구려 25대 왕인 평강왕(재위 559~590) 때의 일이에요. 평강왕에게는 예쁜 딸 평강 공주가 있었어요. 그런데 공주는 어려서부터 잘 울었어요. 그럴 때마다 왕은 공주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공주, 그만 울어라. 그렇게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

온달은 이집 저집 구걸하며 홀로 눈먼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외모도 우스꽝스럽고 볼품없어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어요. 평강왕은 공주가 울 때마다 공주의 우는 버릇을 고쳐주려 농담처럼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며 공주를 달랬던 것이지요.

시간은 흘러 어느덧 평강 공주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어요. 그러자 평강왕은 훌륭한 귀족 청년에게 시집보내고자 하였어요. 그런데 평강 공주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어요.

“싫습니다. 폐하, 저는 제가 울 때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습니다.”

평강왕은 이런 공주의 태도에 매우 당황스러웠어요.

“오~ 얘야, 그건 네 울음을 그치게 하려 했던 거짓말이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온달과 꼭 결혼하겠습니다.”

평강왕은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공주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어요. 결국 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고, 공주는 그 길로 물어물어 온달의 집을 찾아갔어요. 온달은 믿기지 않았지만, 공주의 말을 믿고 결혼을 하였지요. 평강 공주는 궁궐에서 가져온 패물을 팔아가며 바보 온달에게 무술과 학문을 닦도록 하였어요.

온달은 평강 공주의 도움으로 하루하루 실력을 키워나갔어요. 그렇게 세월이 지났어요. 온달은 매년 3월 3일을 맞이하여 열리는 큰 사냥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온달은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맘껏 뽐냈지요.

“아니, 저렇게 무술을 잘하는 청년이 누구인가?”

“온달이라고 합니다.”

평강왕은 예전 바보 온달의 모습을 떠올리며 깜짝 놀랐어요. 그러다 북주의 무제가 고구려에 쳐들어왔어요. 이때 온달은 고구려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적군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지요. 이윽고 평강왕은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고 큰 벼슬을 내렸어요.

이후 영양왕(재위 590~618)이 즉위하자 온달은 왕 앞에 나아가 말했어요. 당시 삼국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거세게 다투고 있었어요.

“신라에게 빼앗긴 조령(충주 지방)과 죽령의 서쪽 땅(강원도 일대)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온달은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그만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싸움이 끝난 후, 온달의 장례를 치르려고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모두 깜짝 놀랐어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평강 공주가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였어요.

“장군, 삶과 죽음이 이미 정해졌소. 그러니, 이제 돌아갑시다.”

그러자 비로소 관이 움직여 온달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어요. 그가 죽은 곳이 바로 단양의 온달산성이라고 해요.

단양의 온달산성은 남한강이 한눈에 훤히 보이는 작은 크기의 산성이에요. 성벽 안팎을 모두 돌로 쌓았고, 벽 사이에까지 작은 돌로 촘촘히 채워 놓아 매우 튼튼해요. 가파른 절벽과 직각으로 만든 성벽은 적의 침입을 막기에 효과적이었어요.

한편 온달산성은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죽었다고 하는 ‘아단성’ 후보지의 한 곳으로 추측되고 있어요. 또 한편으로 온달산성은 온달의 설화가 내려오지만, 온달산성은 축성 양식으로 보면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지요.

여러분 이제 고구려를 왜 산성의 나라라고 하는지 알겠지요? 고구려는 자연 지형을 이용해 많은 산성을 쌓아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을 수 있었어요.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일대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은 1,500여 년 전 고구려 사람들의 지혜와 기술이 녹아 있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에요.

그러나 한편으로 고구려를 지켜주었던 성곽의 수가 많았던 만큼, 그것을 쌓느라 또 지키느라 피땀 흘린 수많은 고구려 백성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되겠지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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