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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화와 과학 기술의 결정체, 경주 첨성대

<경주 첨성대(경북 경주시)>   
문화재청

“360여 개의 돌을 다듬어 쌓아 올리도록 할 것이오.”

“몸통에 작은 창을 내도록 하시오.”

“되도록 평지에 세우면 좋겠소.”

360여 개의 돌을 다듬어 쌓아 만든 이것은 바로 경주 첨성대에요.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요. 그렇다면 경주 첨성대는 무엇을 하던 곳일까요? 왜 넓은 벌판에 세워졌을까요?

신라의 과학과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경주 첨성대

경주 첨성대는 국보 제31호로 신라 천년의 도읍지 경주에 있는 문화유산이에요.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라는 뜻이지요. 신라 궁궐이 있던 월성과 왕릉급 무덤들이 모여 있는 대릉원 사이 벌판에 자리하고 있지요. 동양에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하죠.

동궁과 월지와 함께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꼽혀요. 사진으로만 보던 경주 첨성대를 직접 본 사람들은 실망한 표정을 짓고, 의구심을 갖기도 하지요.

“생각보다 규모가 작네요. 엄청 클 줄 알았는데…”

“천문대가 산에 있어야지, 왜 이렇게 낮고 평평한 곳에 있어요?”

그런데 경주 첨성대의 상징성과 건축의 비밀을 알게 되면 이런 이야기는 쏙 들어가게 될 거예요. 규모도 작고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경주 첨성대가 국보로 지정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1,3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또 신라의 과학 기술과 문화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삼국유사』와 『세종실록』에 따르면 7세기 중엽 선덕여왕 때 경주 첨성대를 만들었다고 해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왜 쌓았는지, 무엇을 하던 곳인지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학자마다 경주 첨성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요.

돌을 잘 다듬어 28단으로 쌓아 올린 높이 10미터가량의 굴뚝 모양의 건축물. 이 문화유산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 있을까요? 지금부터 경주 첨성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며 궁금증을 해결해 볼까요?

  
사진출처: 문화재청

경주 첨성대는 무엇일까요?

경주 첨성대는 과연 무엇일까요? 『삼국유사』에는 경주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하지만 경주 첨성대를 어떻게 이용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정말 천문대가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해요.

경주 첨성대를 천문대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어요. ‘사람이 드나들며 천문 관측하기에 너무 비좁다. 천문대는 보통 높은 지역에 있는데, 신라의 첨성대는 평지에 있어 천문대로 보기 어렵다. 기록에 나온 첨성대가 현재의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해요.

현재 경주 첨성대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세 가지 정도로 모아져요. 첫 번째는 4계절과 24절기를 측정하기 위해 세운 천문대라는 의견이지요. 두 번째는 국가에서 나라의 앞날을 점치며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는 의견이에요. 세 번째는 선덕여왕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물이라는 의견이 있어요.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재까지 경주 첨성대는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고 별자리를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천문대라는 의견이 더 힘을 얻고 있답니다.

<첨성대 앞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 신라 선덕여왕>   

천문 관측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천문 관측은 무척 중요하게 여겨졌어요. 농업이 국가 경제의 근본이었던 시대에 하늘의 움직임을 살펴 계절의 변화와 날씨를 예측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했거든요. 농사짓는 백성들에게 언제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해야 하는지 그 시기를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왕의 임무라고 생각했지요.

계절의 변화와 농사 시기를 예측하려면 역법서(달력)가 필요했어요. 그러기 위해 해와 달,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해야 했지요. 중국이나 우리나라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천문학을 왕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꼭 필요한 학문으로 여겼어요. 천문 관측을 담당한 기관은 왕실에서 직접 관리했어요.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왕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라고 여겼지요. 그러다 보니 왕은 천문 관측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자체적인 역법(달력)을 만들기는 정말 어려웠답니다. 고대부터 연구되던 천문학은 조선 세종 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했고, 비로소 우리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삼국 시대에도 천문학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기록과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경주 첨성대예요.

경주 첨성대에 담겨 있는 비밀

경주 첨성대는 작은 규모의 건축물이지만,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요. 이를 통해 경주 첨성대의 기능도 추측할 수 있지요.

경주 첨성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요. 네모난 받침대와 둥근 몸체, 꼭대기 우물 정(井)자 모양의 정자석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네모난 받침대는 땅을, 둥근 몸체는 하늘을 의미하지요. 정자석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자오선의 표준이 된다고 해요. 정자 모양의 돌의 각 면이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고 있어요.

<첨성대의 구조>   

경주 첨성대를 만드는 데 사용된 돌의 개수는 총 360여 개라고 해요. 이는 음력 1년 날 수와 같아요. 받침은 네모난 2단의 기단을 쌓았어요. 기단 한 단은 땅속에 있지요. 둥근 몸체는 27단이고, 땅 위의 기단 한 단을 더하며 모두 28단이에요. 기본 별자리 28수를 의미해요. 몸통 가운데 네모난 창이 나 있는데 창을 기준으로 아래로 12단, 위로 12단이에요. 합하면 24단이지요. 각각 12달과 24절기를 의미해요.

네모난 창은 남쪽을 향하고 있어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길이에 따라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어요. 춘분과 추분 때에는 햇빛이 창을 통해 경주 첨성대 안 바닥까지 비추지요. 반면 하지와 동지에는 햇빛이 비치지 않아요. 이 하나의 건축물에 천문과 역법의 원리가 다 담겨 있다니, 놀랍지 않나요?

경주 첨성대가 천문대라면 과연 어디서 하늘을 관측했을까요? 학자들은 경주 첨성대 꼭대기에 있는 정자석 아래에 판을 걸쳐 놓고 그곳에서 하늘을 관측했다고 추측해요.

그렇다면 어떻게 경주 첨성대 안으로 들어갔을까요? 첨성대 안에는 계단이 없답니다. 몸체 중간에 나 있는 네모난 창에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올라가 경주 첨성대 안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그 안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던 거지요.

경주 첨성대는 작은 규모이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특별해요. 고대 건축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도 보여주고 있어요. 네모난 기단과 정자석, 둥그런 몸통을 통해 직선과 곡선의 조화가 주는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지요.

평지에 세워져 있는데 천문대라고?

천문대는 모두 높은 곳에 있어야 할까요? 물론 현대에 천문대는 대부분 높은 산에 있어요. 전문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도시의 평지에서는 높은 빌딩에 시야가 가려 하늘을 관측하기 쉽지 않다고 해요. 또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도 천문 관측을 방해한대요.

하지만 옛날에는 평지에서도 천문 관측이 가능했어요. 높은 빌딩도 반짝이는 불빛도 없었으니까요. 경주 첨성대가 있는 곳을 잘 살펴보세요. 주위에 높은 산도, 큰 나무도 없어 하늘을 관측하기 안성맞춤이지요. 약 10m 높이의 경주 첨성대 위에 올라가면 사방을 둘러보며 하늘의 행성과 별자리를 잘 관측할 수 있었을 거예요.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은 경주 첨성대

경주 첨성대는 놀랍게도 1,3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요. 더 놀라운 것은 지진과 같은 강한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2016년 경주에서 진도 5.8의 강진이 발생했어요. 땅이 갈라지고 한옥 기와가 무너져 내리기도 했어요. 천년의 도읍지 경주에 있는 문화유산들도 일부 훼손되었어요. 경주 첨성대도 2cm 정도 기울었고, 돌 틈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진도 5.8이라는 강진의 규모에 비해 피해가 크지 않은 편이었어요. 전문가들은 어떻게 강한 지진에도 큰 피해 없이 온전할 수 있었는지 다시 한번 깜짝 놀랐어요. 조사를 통해 내진 설계가 잘 되어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과학 기술과 건축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삼국 시대에 어떻게 내진 설계를 했을까요? 먼저 받침대를 만들기 전 땅을 깊게 파고 흙과 돌을 번갈아 넣어 땅의 지반을 단단하게 다졌어요. 원형의 몸체를 만들기 위해 돌을 안쪽으로 조금씩 규칙적으로 들여쌓아 균형감을 갖게 했지요. 그리고 직선이 아닌 원형으로 쌓아 안정적인 구조로 만들었어요.

무엇보다 큰 역할을 한 것은 정자석과 비녀돌이에요. 꼭대기에 쌓은 정자석은 서로 맞물려 좌우로 흔들림을 방지해 주고 있어요. 그리고 경주 첨성대 몸통에는 삐죽 나와 있는 돌이 있어요. 이것이 바로 비녀돌이에요. 몸통 사이에 끼워 넣은 돌로 몸체를 잡아주며 안정성을 더해주고 있지요. 이러한 치밀한 설계 덕분에 강한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답니다.

<첨성대의 정자석과 비녀돌>   

역사 속 작은 이야기: 고려의 개성 첨성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도 첨성대가 남아 있어요. 북한의 국보 제131호로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유산이지요. 고려 궁궐이었던 만월대 궁궐터 서쪽에 남아 있어요. 고려 태조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지금은 천문 관측기구를 올려놓았던 축대만 남아 있어요.

축대는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네모난 돌마루를 5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돌마루까지의 높이는 3미터가량이 되요. 4개의 기둥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동서남북을 가리키지요.

기둥 아래에는 주춧돌이 놓여 있는데, 주춧돌에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어요. 돌마루에도 구멍이 나 있고요. 이 구멍에 관측기구를 놓고 고정시킨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계단을 만들어 관측대 위로 올라가 관측했던 것 같아요. 고려는 개성의 천문대를 중심으로 고대부터 이어진 천문 관측 기술을 발전시켰을 거예요.

지금도 천문을 관측하고 우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노력이 1300여 년 전 신라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니 놀랍지 않나요? 이제 경주 첨성대에 담긴 의미와 놀라운 건축 기술을 생각하며 경주 첨성대를 보게 된다면 실망하기보다는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될 거예요.

<개성 첨성대>   
국립중앙박물관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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