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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들이 꿈꾸던 세계, 백제 금동 대향로

<백제 금동 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

“진흙 속에 무언가 묻혀 있습니다. 인부들을 모두 돌려보내시오.”

“네. 알겠습니다.”

“외부에 알려지면 오히려 발굴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외곽에 있는 능산리 고분군에 주차장을 만들기 전 먼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어요. 발굴 조사를 벌이던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어요. 절터 물웅덩이에서 국보급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거든요. 이 문화유산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왜 땅속에 묻히게 된 것일까요?

백제 금동 대향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

이 문화유산이 바로 국보 제287호인 백제 금동 대향로예요. 백제 금동 대향로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 발굴되었어요.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의 세 번째 수도였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서 3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고분군이지요. 사비 시대(538~660) 백제 왕릉으로 총 8기의 무덤들이 있어요.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정비되면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부여군청은 관람객들을 위해 넓은 주차장을 만들기로 했어요. 1993년 12월, 공사를 진행하기에 앞서 발굴 조사를 벌였어요. 하지만 기대와 달리 특별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국립부여박물관 발굴 조사단은 조사를 중단하는 것이 아쉬워 부여군청에 조금 더 시간을 줄 것을 요청했어요.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위치>   

부여군청의 허락을 얻은 발굴 조사단은 새로운 문화유산이 발굴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다시 조사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난 12월 12일,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어요.

부여 능산리 고분 북쪽에 있는 절터(능산리 절터)에서 작은 기와 조각들이 발견되었어요. 조사단은 몹시 흥분했어요. 무언가 더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땅을 깊게 파기 시작했어요. 진흙땅에 물이 가득 차 물을 퍼내면서 발굴을 하던 터라 땅을 파내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한참 동안 땅을 파자 금속 조각이 보였어요.

“이게 무엇입니까?”

조사 단원들은 금속 조각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어요. 공사를 하던 인부들을 돌려보내고 연구사들만 남아 조용히 발굴 작업을 이어갔어요. 혹시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몰려들 테고, 그러면 발굴을 제대로 진행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발굴 조사단은 오후 5시부터 다시 발굴을 진행하기로 했어요. 빨리 진행하려는 마음에 어둠이 내려앉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불을 밝히며 발굴을 멈추지 않았어요. 한겨울이라 날까지 추워 발굴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어요. 물이 차 있는 진흙 구덩이에 박혀 있는 금속 물체가 혹여 망가질까 봐 종이컵을 사용해 물을 퍼내며, 조심스럽게 땅을 파냈어요.

발굴을 시작한 지 4시간 정도 지난 9시경, 여기저기서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향로 하나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거든요. 향로는 뚜껑과 몸통이 따로 분리된 채 진흙 속에 묻혀 있었어요.

<진흙에 묻혀 있는 백제 금동 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

극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문화유산이 바로 백제 금동 대향로에요. 백제 문화의 꽃이라고 불리는 공예품이지요. 도대체 이 향로는 어떤 문화유산이기에 백제 문화유산의 꽃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그 이유를 알아봅시다.

  

뛰어난 공예 기술로 만들어진 백제 금동 대향로

한강 유역에서 건국된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누리며 발전했어요. 하지만 백제는 5세기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수도인 한성을 빼앗기고, 문주왕 때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겼어요. 무령왕 때에는 지방에 왕족을 보내 지방 세력을 통제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며 백제를 안정시켰지요.

무령왕에 이어 성왕이 왕위에 올랐어요. 그는 다시 백제의 수도를 옮겼어요. 좁은 웅진에서 벗어나 넓은 벌판이 펼쳐진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부흥을 꿈꾸었어요.

백제는 사비로 수도를 옮긴 후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더욱 발전해 나갔어요. 문화도 활짝 꽃피었지요. 이런 백제 문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백제 금동 대향로예요.

백제 금동 대향로는 불교와 유교, 도교 사상이 드러난 공예품으로 백제인들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표현되어 있어요. 높이는 61.8cm이고, 무게는 11.85kg나 돼요. 중국이나 주변 국가에서 발견된 향로가 보통 20cm 정도인데, 그것의 3배나 되는 대형 향로지요.

중국 한나라 때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면이 있지만, 백제만의 독창적인 기술이 아니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거예요. 과학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이와 똑같은 향로를 만들기 어렵다고 하니, 백제인들의 공예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

향로는 뚜껑, 몸체, 받침 부분을 각각 따로 만들어 이어 붙이고, 겉에는 금을 입혔어요. 무엇보다 특별한 것은 수많은 사람과 동물, 산봉우리 등을 붙여 만든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들어 거푸집 같은 곳에 쇳물을 부어 만들었다는 점이에요. 정교하고 섬세한 모습을 조각해 붙여넣지 않고,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 백제 기술이 그만큼 뛰어났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어요.

<정교함을 엿볼 수 있는 몸체의 모습>   
국립부여박물관

백제 금동 대향로를 땅 속에 묻은 이유는?

백제 금동 대향로는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해요.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떻게 녹슬지도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진흙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진흙 때문에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 형태가 변하지 않았던 거예요. 백제 금동 대향로 주변에서는 나무 곽과 천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천으로 향로를 싸서 나무 곽 속에 넣어 땅속에 묻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누가, 왜 이곳 능산리 절터에 백제 금동 대향로를 묻었던 것일까요? 혹시 백제의 멸망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비에서 부흥을 꾀한 성왕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다시 찾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신라 진흥왕과 군사 동맹을 맺어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았어요.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백제는 신라 진흥왕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말았어요. 진흥왕은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고 난 뒤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한강 하류마저 점령해 버렸지요.

그러자 백제는 신라와 전투를 벌였어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어 전투를 치르게 된 거지요. 성왕의 태자 여창(훗날 위덕왕)이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나가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어요. 처음에는 백제가 승리하는 듯했지만 이내 신라에 유리한 상황이 되었지요.

성왕은 신라군과 힘들게 싸우고 있는 태자를 위로하고자 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했어요. 하지만 관산성으로 가던 길에 성왕은 숨어 있던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어요.

이후 성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위덕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 성왕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능산리에 절을 세웠던 것 같아요.

이 능산리 절터에서는 창왕(위덕왕)이 만들고, 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했다는 글이 새겨진 사리 보관 용기(창왕명 석조사리감)가 발견되기도 했어요. 백제 금동 대향로가 발견된 그 절터이지요. 백제 금동 대향로도 성왕의 제사 때 향을 피우기 위해 절 공방에서 만든 것으로 보여요.

그렇다면 백제 금동 대향로를 목곽 안에 넣어 공방 터에 묻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백제가 멸망할 즈음 스님들이 귀중한 향로가 적들에 의해 훼손될까봐 땅에 묻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백제의 멸망이 스님들에게는 얼마나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는지 짐작이 되나요?

<백제 금동 대향로를 만드는 모습>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백제 금동 대향로

백제 금동 대향로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받침, 몸체, 뚜껑, 그리고 맨 위 봉황으로 이어졌어요.

받침은 용이 몸체를 받치고 있어요. 앞발을 치켜들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이죠. 마치 용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모습은 생동감을 느끼게 해주지요. 용의 세 발은 삼각형 모양으로 바닥을 딛고 있어요. 앞발은 치켜세워 향로가 균형감을 갖추도록 표현했어요. 용의 꼬리는 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어 물을 상징하는 용을 강조하고 있어요.

몸체는 연꽃 봉우리가 막 피어난 모습이에요.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지요. 연꽃잎에서는 주로 물과 관련된 생물들을 볼 수 있어요. 신선 두 사람과 날개 달린 물고기를 비롯한 상상 속의 동물 27마리가 새겨져 있어요.

<백제 금동 대향로의 세부 ①받침, ②몸체, ③뚜껑, ④손잡이>   
문화재청

뚜껑에는 74개의 산봉우리가 첩첩이 겹쳐져 솟아있고,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와 17명의 신선, 그리고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39마리의 다양한 동물들이 새겨져 있어요.

산 사이로 작은 길도 나있고, 시냇물도 흐르죠. 신선들이 낚시하는 호수도, 폭포수가 흐르는 모습도 있어요.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이곳은 마치 신선들이 사는 세상 같아요. 5명의 악사는 각각 완함(비파), 적(피리), 소(관), 백제금(현·거문고), 고(북)를 연주하고 있어요.

뚜껑 맨 끝에는 봉황이 앉아 있어요. 봉황은 어진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새로, 신성하게 여겨지는 동물이지요. 그런 봉황이 여의주를 턱 밑에 끼고, 꼬리를 곧게 치켜올리고 날개를 활짝 펴 날아오를 듯한 기세를 하고 있어요.

뚜껑 윗부분에 10개의 구멍과 봉황의 가슴에 2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요. 이 구멍을 통해 향이 피어오르면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들지요.

백제 금동 대향로 속에 새겨진 코끼리와 원숭이

백제 금동 대향로에 등장하는 동물 중 당시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동물이 있어요. 바로 원숭이, 악어, 코끼리지요. 백제 사람들은 본 적이 없었던 동물들을 어떻게 백제 금동 대향로에 조각해 놓을 수 있었을까요?

백제는 바다를 통해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하며 해상왕국으로 불렸던 나라에요. 기록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중국을 넘어 코끼리와 원숭이가 사는 인도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여요.

<백제 금동 대향로에 새겨진 꼬끼리, 악어, 원숭이>   
국립부여박물관

역사 속 작은 이야기: 향로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향로는 향을 피울 때 사용하는 물건을 말해요. 절에서 의식을 거행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지요. 인도에서 좋지 않은 냄새를 없애고, 실내의 습기를 없애기 위해 향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해요. 불교가 탄생하면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 중 하나가 되었지요.

그러면서 향을 피우는 의식이 단순히 냄새와 습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자신을 태워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어요. 유교에서도 제사를 지낼 때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드리기 위해 향을 피웠지요.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해지기 전부터 향로를 사용했어요. 한나라 때 만든 박산향로가 그 증거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향로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불교가 전해지면서부터예요. 박산향로는 신선들이 살았다고 전하는 산인 중국의 박산 모양을 본떠 만든 향로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에 향로를 제작하고 사용했던 증거들이 발견되었어요. 벽화에 향로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지요. 백제 금동 대향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시대마다 다양한 향로가 만들어졌어요.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는 주로 흙으로 만든 향로를 사용했어요. 청동 향로도 만들었고요. 고려 시대에는 청자나 청동으로 만들었고요. 조선 시대에는 백자와 유기로 만든 향로가 널리 사용되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된 향로가 지금까지 사용되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지요.

백제 금동 대향로에 대해 배우고 나니 왜 이 향로를 백제 문화의 꽃이라고 부르는지 알게 되었지요? 백제 장인들이 온 정성을 담아 만들어낸 백제 금동 대향로를 보고 있으면 향로 속에 새겨진 악사들이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할 거예요. 또 각종 동물들이 평화롭게 뛰어노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할 거예요.

<박산향로(낙랑)와 청자투각칠보무늬향로(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집필자] 황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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