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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사람들의 소망을 새긴 불상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충남 서산시)>   
문화재청

“자네 아침 일찍 어딜 다녀오나?”

“응. 절에 다녀오네. 신통하다고 소문난 관세음보살상께 온 마음을 다해 우리 자식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왔다네.”

고구려‧백제‧신라는 모두 불교를 믿었어요. 삼국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절에 가고 불상 앞에서 기도하였지요. 삼국 시대 불상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서로 달랐을까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모두 불교를 받아들여 나라의 종교로 삼았어요.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에요.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해졌지요. 삼국은 불교의 어떤 점이 좋아서 불교를 받아들였을까요?

당시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는 서로 세력을 다투고 있었어요. 잦은 전쟁 속에 삼국 시대 사람들은 삶의 불안을 많이 느꼈지요. 이때 인간사의 고통을 초월하게 해준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었어요.

또 한편으로 불교는 고대 아시아 세계에서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수준 높은 문화 체계였어요. 어떤 나라가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나라가 당시 국제적으로 요구되는 문화 수준에 도달했다는 징표였어요.

삼국의 왕들은 중국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강하게 키우고 싶어 했지요. 중국의 발달한 문물 중에는 불교도 있었지요. 불교를 받아들이기 전의 삼국은 아직 나라다운 틀을 갖추고 있지 못했어요. 삼국의 왕들은 불교를 받아들여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싶어 했어요. 더불어 백성들이 부처님을 섬기듯 자신을 섬기게 하려는 뜻도 있었지요.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중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고구려였어요. 당시 소수림왕은 위축되어있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요. 그래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지요.

소수림왕(재위 371~384)은 372년 중국 전진에서 순도라는 스님이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오자 그를 높이 받들었어요. 나중에는 절을 지어 머물게 하면서 온 나라에 불교를 퍼뜨리게 했지요.

곧이어 백제에도 침류왕(재위 384~385) 때인 384년에 중국 동진에서 마라난타라는 스님이 불경을 가지고 왔어요. 마라난타는 인도 사람이니 매우 먼 길을 온 거지요. 백제의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고 이듬해에는 도읍에 절을 세워 머물게 했어요. 이때부터 백제 사람들에게 불교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어요.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해졌어요.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발전이 늦었기 때문에 신라의 왕들은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관심이 적었어요.

신라는 법흥왕(재위 514~540) 때인 527년에야 정식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귀족 세력의 반발이 매우 심했어요. 부족마다 예부터 믿어 오던 신앙을 버릴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이차돈의 희생을 계기로 어렵사리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지요.

삼국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려고 했지요. 그런 마음으로 절을 짓고, 종을 만들고, 탑을 세웠으며, 경전을 인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널리 알렸지요. 이렇게 삼국은 불교를 받아들여 나라의 종교로 삼아 연맹 왕국에서 고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지요.

불상, 소망을 담아 부처님을 새기다

불상은 ‘부처의 상’을 뜻해요. 그런데 불교가 처음 일어났을 때는 불상을 만들지 않았어요. 부처님과 같이 뛰어난 존재를 인간의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유골을 담은 탑에 예배를 드렸어요.

  

그러나 무엇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은 부처님이었어요. 결국 인도에서는 불상을 만들었어요. 삼국 시대 사람들도 점차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부처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표현하였어요. 이렇게 불상은 탑과 함께 불교 신앙의 중심이 되었어요.

불교 전래의 초기에는 대체로 중국식 불상 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았어요. 그러나 곧이어 삼국 시대에는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어요.

  

부처님 나라의 소망이 담긴 고구려의 불상

고구려의 대표적 불상으로 국보 제119호인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이 있어요. 높이가 16.2cm로 매우 작은 불상이에요. ‘금동’은 청동에 얇게 금을 입혀 만든 것을 말해요.

그런데 왜 불상에 금을 입혔을까요? 금은 매우 귀한 금속이에요. 부처를 보통 사람과 다른 귀한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에요. 이 불상 뒷면에는 ‘연가 7년’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요.

여기서 ‘연가’는 고구려가 쓰던 연호에요. 그래서 이 불상의 이름에 ‘연가 7년명(銘)’이 붙었어요. ‘연가 7년명’은 ‘연가 7년이 새겨진’이라는 의미에요. 여래는 부처님을, 입상은 서 있는 모습을 말해요. 이대로 이름을 풀이해 보면 연가 7년이 새겨진 금동으로 만든 부처님의 서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라 할 수 있지요.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의 앞면과 뒷면>   
문화재청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뒷면에 새겨진 글 때문에 사람들이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 수 있었어요. ‘연가 7년’이란 글자로 이 불상이 신라의 영토인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되었지만, 고구려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지요. 또한 6세기에 고구려의 힘이 신라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지요.

또 ‘1,000개의 불상 중 29번째’라고 적혀 있어 이 불상이 평양 동사라는 절의 승려 등 40명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든 1,000개의 불상 가운데 29번째 불상임을 알 수 있어요.

이 밖에 고구려 불상으로 ‘금동 신묘명 삼존불 입상’이 있어요. 부처님의 빛을 상징하는 광배 하나에 본존불과 좌우보살상이 조각된 삼존불의 형식이에요. 광배 뒷면에는 다섯 사람이 모여 그들의 스승과 부모를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요.

고구려 사람들은 불상에 글자를 새겨 간절한 소망을 담았어요. 불상을 1,000개 만들어 온 세상이 부처님 나라가 되기를 말이지요.

백제 사람들의 미소를 담은 백제 불상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인 후 많은 불상을 만들었어요. 그 가운데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이 있어요.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은 백제가 중국과 왕래하던 교통로 상에 있는 충청남도 서산의 한 골짜기 바위 면에 새겨진 불상이에요. 이와 같이 깎아지른 절벽을 그대로 재료로 삼아 불상을 조각했기에 ‘마애’라 이름 붙였어요. ‘여래’란 부처님을 높이는 말이에요.

불상은 혼자 있기도 하지만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처럼 양쪽 옆에 불상을 하나씩 끼고 있을 때가 많아요. 엄밀하게 따지면 부처님을 조각한 불상이 아니라 보살을 조각한 보살상이에요.

불교에서 받들어 모셔야 할 세 분의 존귀한 사람 즉 부처와 양옆에 두 보살이 나란히 있는 불상을 ‘삼존불’이라고 해요. 삼존불 속의 보살은 부처를 도와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하지요. 삼국 시대 불상 중에는 삼존 형식의 불상이 많았어요.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   
문화재청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넉넉한 분위기를 풍겨요. 특히 가운데 본존불의 미소는 웃는 듯 마는 듯 온화한 웃음으로 유명해요. 그래서 이를 ‘백제의 미소’라고 불러요. 이 미소는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해요. 마치 자기들 얼굴 모습을 부처님의 미소로 담고 싶어 했던 백제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지요.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을 보면 백제 장인들이 돌을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어요. 또한, 백제 사람들의 불교 신앙과 예술 정신을 엿볼 수 있지요.

이 밖에도 백제에는 많은 불상이 있어요. 국보 제128호인 금동 관음보살 입상은 공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높이 15.2㎝의 자그마한 보살상으로 백제의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머리에는 꽃무늬로 장식한 반원 모양의 관을 썼고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표현되어 있으며, 얼굴은 미소가 없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지요.

국보 제134호인 금동 보살 삼존 입상은 하나의 광배에 삼존상을 배치한 형식으로, 보살상을 중심에 두고 양옆에 나한상을 배치한 독특한 작품이에요.

국보 제247호인 공주 의당 금동 보살 입상은 1974년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보살상이에요. 머리에는 삼면보관을 쓰고 있는데, 가운데에 작은 부처가 표현되어 있어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국보 제293호인 부여 규암리 금동 관음보살 입상은 그 높이가 21.1㎝로 1907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절터에서 발견되었어요. 머리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진 관을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어요. 보살이 서 있는 대좌는 2중의 둥근 받침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지요.

신라 문화 전성기를 담은 신라의 불상

신라의 국력은 불교의 발전과 더불어 상승하였어요. 신라의 국격이 높아지면서 불상을 만드는 솜씨 역시 더욱 발전하였어요. 신라의 대표적 불상으로 보물 제63호인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이 있어요.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경북 경주시)>   
문화재청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은 원래는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었는데 1923년 지금의 자리(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에 모아 세웠어요. 이 불상도 돌로 만든 세 분의 부처님이 서 있는 모습이라는 뜻에서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이라 이름 붙였어요.

이 불상 가운데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가 있는데, 특이하게 이중으로 되어 있어요. 눈두덩과 양쪽 뺨을 부풀린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온화하고 자비로운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어요.

불상의 모습은 왜 이렇게 다양할까요?

부처는 깨달은 사람을 말해요. 석가모니뿐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에도 깨달은 이들을 모두 부처라 하지요. 그래서 부처 중에는 석가모니불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미륵불, 아미타불, 약사불, 비로자나불 등 많은 부처가 있어요. 삼국에 들어온 대승 불교 때문이지요.

또 불교에서는 부처님 말고도 보살이나 여러 수호신을 믿고 받들었어요. 보살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면서도 중생(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생물들)을 깨우치기 위해 부처가 되기를 미룬 존재예요. 보살은 자신의 깨달음보다 중생 구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재들이었지요.

<경주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과 경주 감산사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   
문화재청

대승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많은 부처가 있듯이 또한 많은 보살이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보살은 인간과 더 가까운 존재로 여겨져 부처님 다음으로 예배의 대상이었지요. 그리하여 삼국 시대 사람들은 우리가 보듯 수많은 종류의 불상을 만들게 된 것이지요.

보살상과 불상의 차이는 거의 보살만이 머리에 관을 쓴다는 데에 있어요. 보살상은 화려한 옷에 머리 장식, 구슬 장식 등을 하고 있어서 아무 장식도 없는 간결한 옷차림의 불상과 금방 구별되지요. 또 보살상은 손에 연꽃이나 병, 구슬 따위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삼국 시대에는 세 나라 사이의 전쟁이 치열하던 때라 특히 미륵보살이 큰 인기를 끌었어요. 미륵보살은 천상의 도솔천에 계시면서 먼 훗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보살이에요. 한시라도 빨리 내려와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해주길 바란 거죠.

8세기에는 무량수불로도 불리는 아미타불의 시대가 열렸어요. 아미타불은 극락세계에서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부처님이에요. 이 무렵 유행하기 시작한 ‘정토 신앙’에서는 보통 사람도 서방 극락정토에 있는 아미타불과 그의 조수인 관음보살만 열심히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했어요. 바야흐로 신라의 방방곡곡은 ‘나무아미타불(아미타불에 귀의합니다)’이라는 기도로 가득 차기 시작했지요.

무엇을 생각하는 불상의 모습일까요?

삼국 시대의 불상 중에는 특히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 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반가’는 반만 책상다리를 한 모습으로 걸터앉아서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위에 올린 자세를 가리켜 말해요. ‘사유상’은 생각하는 모습을 새긴 조각상이라는 뜻이에요. 즉 반가사유상이란 반가좌 형태로 앉아 오른손을 뺨에 살짝 대고 사색하는 자세의 보살상을 말해요.

<금동 미륵 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   
문화재청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은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유명하지요. 국보 제78호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에 걸치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괸 자세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에요. 가냘픈 몸매에 살아 움직일 듯한 자태, 얼굴에 띤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지요. 삼국 시대 사람들의 예술 감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국보 제83호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높이가 93.5㎝로 국보 제78호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 반가사유상이에요.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서 ‘삼산관 반가사유상’으로도 불리고 있지요.

단순하면서도 균형 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 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코·입의 표현이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어요. 삼국 시대 사람들의 뛰어난 조각 기술을 보여주고 있지요. 또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자비로운 모습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지요.

특히 국보 제83호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는 거의 같은 형태의 목조 반가 사유상이 일본 고류사에 있어요. 삼국 시대에 제작된 반가사유 보살상은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지요.

불상의 명칭과 구조

불상에는 부처의 초인간적인 속성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가 몇 가지 있어요. 불상 뒤에는 부처의 진리와 지혜의 무한한 빛을 상징하는 ‘광배’를 두고 있어요. 머리 위에는 신비로운 혹인 ‘육계’를 두고, 머리카락은 소라처럼 말려진 ‘나발’ 모양이며, 귀는 길고 두 눈썹 사이에는 지혜의 빛을 내보내 온 누리를 밝혔다는 ‘백호(하얀 털)’가 나 있지요.

불상은 보살상‧천왕상 등과 달리 부속물이나 장식이 없는 단순한 수행자 복장을 함으로써 세속을 초월한 지고함을 보여주지요.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연꽃을 새겨요. 연꽃 위의 부처는 세계의 정신적인 통치자이자 절대자를 상징하지요.

<불상의 명칭>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국립중앙박물관)

역사 속 작은 이야기: 황룡사의 커다란 불상 이야기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일단 불교를 받아들인 다음에는 발 빠르게 움직였어요. 흥륜사, 황룡사, 영흥사 등 대규모 사찰을 세우고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자기 나라를 ‘불국토’, 즉 부처가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어요.

신라의 자부심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설화가 있어요.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 때의 일이었어요. 이 무렵, 나라에서 용궁 남쪽에 궁전을 지으려고 하였어요. 그런데 그 터에서 갑자기 황룡이 나타났어요. 그 일로 궁궐 대신 절을 짓게 되었고 절의 이름을 ‘황룡사’로 지었지요.

황룡사를 모두 지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 바다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났어요. 나라에서 그 배를 조사해 보니 편지가 있었어요.

“인도의 아육왕(인도의 아소카왕으로 불교를 크게 융성시켰다)이 매우 많은 양의 황철과 황금을 가지고 불상을 만들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냅니다. 원컨대 이 배가 멈추는 곳에 장륙의 불상을 이룩하여 모시도록 하십시오. 아울러 이 배에 불상 하나와 보살상 두 개를 함께 실었습니다.”

신하에게 이 소식을 듣게 된 국왕은 배가 도착한 지방(하곡현)에 ‘동축사’라는 절을 짓게 하고 배에 실렸던 불상과 보살상을 법당에 모셨어요. 또 함께 실려 있던 철과 황금으로 커다란 불상을 만들기 시작해 얼마 후에 완성했어요. 그리고 그때 새로 만든 불상은 황룡사에 모셨어요. 그리고 이듬해의 일이었어요.

장륙불상(크기가 매우 큰 불상)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해 바닥을 1척이나 적셨어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는 왕이 세상을 떠날 징조라고 여겼지요.

한편 황룡사의 불상에는 또 다른 기록도 전해지고 있어요. 인도의 아육왕이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받들려고 불상을 세 번이나 만들었지만 모두 실패했어요. 더구나 아육왕의 태자는 불상 만드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이에 아육왕이 못마땅하여 물었어요.

“태자는 왜 불상 짓는 일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냐?”

태자가 대답하였어요.

“폐하, 그건 혼자의 힘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저는 일찍이 그 사실을 알았지만 일부러 모른 체했던 것입니다.”

아육왕은 이때 느낀 바가 있어서 불상을 만들 수많은 황철과 황금을 배에 싣고 바다로 띄워 보냈던 것이에요. 그 뒤 배는 바다를 끼고 있는 수많은 나라에 도착했지만 어떤 나라에서도 불상을 만들지 못했어요. 그에 따라 마지막으로 신라에 도착했는데 마침내 진흥왕이 그 일을 마칠 수 있었어요.

한편 그 소식을 듣게 된 아육왕은 비로소 근심을 떨쳐 냈다고 전하고 있어요.

삼국 시대의 다양한 불상을 잘 만나 보았나요? 이제 불상이 낯설지 않을 거예요. 불상을 통해 우린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어요. 앞으로 불상을 만나면 더 친하게 볼 수 있겠지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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