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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한 문무 대왕릉

<경주 문무 대왕릉(경북 경주시)>   
문화재청

“바닷속에 무덤을 만들다니 대단하군.”

“용이 되어 우리 신라를 지켜주겠다고 하니 고마울 뿐이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와 백제 땅을 모두 차지하려는 당의 침략을 물리치고 삼국 통일을 완성한 인물이에요. 이제 그가 죽어서 바다에 묻혔어요. 신라는 왜 그의 무덤을 바닷속에 만들었을까요?

바닷속에 무덤을 만들다

경주 토함산 동쪽 바다에는 조그만 바위섬이 하나 있어요. 바닷가에서 약 200미터쯤 떨어져 있는 이 바위섬이 바로 삼국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의 무덤인 문무 대왕릉으로 ‘대왕암’이라고도 불려요.

경주 문무 대왕릉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왕의 무덤 중에 가장 독특한 무덤일 거예요. 어떻게 왕의 무덤이 바다에 만들어졌을까요? 직접 보면 무덤이라기보다도 바다 한가운데 솟아난 평범한 바위로 보이죠. 하지만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바다 위에 있는 이 바위섬을 신라 문무왕의 무덤이라고 믿었어요.

게다가 어부들은 이곳을 신성하게 여겨 바위 근처에서는 고기잡이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곳은 문무 대왕릉으로 확인되었어요.

문무왕릉 가운데는 연못처럼 움푹 파여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십자 모양의 물길이 나 있어요. 동쪽에서 몰려오는 파도는 물길을 따라 대왕암의 가운데로 들어와서는 서쪽 물길로 빠져나가요. 물길이 사방으로 나 있기 때문에 파도가 높은 날이나 낮은 날이나 대왕암 안에는 늘 바닷물이 잔잔하게 고여 있어요.

불교가 신라 사회에 퍼지면서 불교식 장례법인 화장이 유행하여 뼛가루를 바다와 강에 뿌리거나 뼈단지에 넣어 무덤을 만들었지요. 당시 문무왕을 화장한 뒤 이곳에 뼛가루를 뿌렸을 거라 짐작되고 있어요.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문무왕

“뭐라? 또 왜구가 쳐들어왔어? 왜구들 때문에 편한 날이 없군.”

신라인들은 동해로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가는 왜구들 때문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당시 동해와 남해 바닷가에는 왜구들의 노략질이 아주 심했으니까요. 그들은 순식간에 나타나 마을을 불사르고 많은 재물을 빼앗아 갔어요. 왜구 때문에 늘 걱정하던 문무왕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어요.

내가 죽으면 동해 바다에 묻어다오. 나는 죽은 뒤 용이 되어 부처님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위해 왜구를 막을 것이다.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동해의 용이 되려고 한 것이에요.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재위 681~692)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동해 한가운데 있는 바위섬을 깎아 못을 만들고, 그 못 안에 아버지의 뼈를 뿌린 수중 왕릉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은혜에 감사하며 절을 짓다

문무왕은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절을 짓게 했어요. 지금은 탑만 남아 있는 이 절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라 이름 지었어요. 감은사는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를 물리치고자 문무왕 때부터 짓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인 신문왕 때 완성되었어요.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 석탑>   
문화재청

감은사터에는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탑이 나란히 서 있어요. 이 두 탑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힘을 보여주는 듯 다른 절의 탑보다 크고 엄숙한 모양을 하고 있지요. 이러한 감은사는 이후 통일신라 시대 절을 지을 때 좋은 본보기가 되었어요.

  

대왕암과 감은사는 정말 통해 있을까?

감은사와 대왕암은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를 막으려는 바람이 담긴 곳이에요. 감은사의 중심 건물인 금당 아래에는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드는 통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감은사의 금당은 나란히 서 있는 두 탑의 북쪽에 있어요. 지금은 금당의 터만 남아 있는데 잘 살펴보면 금당 아래에 구멍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요.

그리고 감은사 터 앞을 흐르는 대종천은 곧바로 문무 대왕릉이 있는 동해로 흘러 들어가요. 이런 흔적으로 보아 대왕암과 감은사의 금당은 연결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다에서 하천을 거슬러 부처님이 계신 금당까지 온다고 상상해 보세요. 부처님의 힘을 빌린 용은 왜구를 가볍게 물리쳤겠지요?

<감은사 금당 터>   
문화재청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신비한 피리, 만파식적 이야기

문무왕을 장사지낸 뒤 대왕암 주위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신문왕은 깜짝 놀랐어요.

“언제부턴가 동해에 작은 바위산이 하나 나타나더니 감은사 쪽으로 와서는 바다 위에 둥실둥실 떠 있다고 합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구나. 도대체 그 바위산이 무엇이란 말이냐?”

신문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바닷가로 가 보았어요. 바다에는 정말로 거북이 모양의 바위산이 떠 있고 그 위에 대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어요.

“낮에는 저렇게 대나무가 두 그루로 떨어져 있지만, 밤이 되면 하나로 합쳐진다고 합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로다. 내 직접 저 바위산에 가 보리라.”

신문왕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어요. 그 뒤 9일 만에 신문왕이 바위산에 가니 용이 나타나 바위산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나라가 평화롭고 번성할 것이라 하였어요. 신문왕은 그 말대로 피리를 만들었어요.

피리는 신기하고 놀라운 힘을 갖고 있었어요. 피리를 불면 쳐들어오던 적군이 물러가고, 병을 앓던 사람들도 나았어요. 또 가뭄에는 비가 오고 홍수에는 비가 그쳤으며 바다의 바람과 물결도 잠잠해졌어요.

피리 소리는 세상의 나쁜 일을 없애고 평화를 가져다주었어요. 사람들은 이 피리를 ‘세상의 걱정을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라 하여 ‘만파식적’이라고 불렀어요.

바다에 무덤이 만들어지고, 왕은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친다니 신기하지요. 여러분은 문무 대왕릉과 감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문무 대왕릉과 감은사를 통해 왜구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왕과 신문왕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되지 않나요? 더불어 삼국을 통일한 후 나라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평안해지기를 원했던 만파식적 이야기의 의미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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