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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성장 - 발해, 해동성국으로 우뚝서다

<발해 석등>   
국사편찬위원회

“상경 용천부를 중심으로 전국 곳곳을 잇는 교통로를 만들고, 그 길들을 주변 나라까지 이어 활발하게 교역하도록 하라!”

상경 용천부는 발해의 도읍이에요. 상경 용천부는 주변 여러 나라와 도로로 연결될 정도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였어요. 그만큼 발해가 강대국으로 발전했다는 뜻이지요. 건국 이후 발해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였을까요? 이 과정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무왕, 발해의 영토를 넓히다

719년,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 죽자 맏아들 대무예가 왕위를 이어받아 무왕이 되었어요. 무왕은 나라의 기틀을 튼튼하게 갖추어 나가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발해만의 독자적인 연호 ‘인안’을 사용하였지요. 무왕은 우선 주변 여러 부족을 정복해 나갔어요. 무왕의 정복 활동으로 고구려와 부여 땅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죠.

“대무예가 왕이 되어 영토를 개척하고 넓혔으니, 동북 지방의 여러 민족이 두려워하며 국왕에게 신하로서 복종하였다.”

이때 문젯거리가 하나 생겼어요. 말갈족의 한 갈래인 흑수말갈이 발해와 당 사이에서 홀로 힘을 키우고 있었던 거예요. 흑수말갈은 발해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당과 교류하려면 발해를 지나가야만 했어요. 그런데 발해의 힘이 점점 커지자 흑수말갈은 매우 두려워졌어요.

결국 흑수말갈은 발해를 통하지 않고 직접 교류하자고 당에 제안했어요. 물론 당은 흑수말갈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요. 흑수말갈의 배신에 무왕은 분노했어요. 흑수말갈의 결정은 그들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다른 말갈 세력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지요.

“흑수말갈이 몰래 당과 손을 잡았다고? 두고만 볼 수 없지!”

대문예, 발해를 배신하다

무왕은 동생 대문예에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어요. 그러나 대문예의 생각은 달랐어요.

“흑수말갈을 공격하면 분명히 당의 군대가 쳐들어올 것입니다. 지금 우리 발해의 힘으로는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대문예는 당에 머문 적이 있어 그 나라 사정에 밝았어요. 게다가 당은 현종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어 나라의 힘이 더 강해져 있었어요. 때문에 대문예는 무왕의 흑수말갈 공격을 반대했지요.

하지만 무왕은 흑수말갈에 대한 공격을 거듭 명했어요. 그럼에도 대문예가 명을 듣지 않자 무왕은 무척 화가 났어요. 비록 자기 동생이지만 이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지요. 무왕은 그를 파면하고 다른 사람을 총대장으로 임명했어요. 그러자 대문예는 무왕이 자신을 해칠 거라고 여겨 당으로 도망쳐 버렸어요. 무왕은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왔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왕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것도 괘씸한데, 도망을 쳐? 그것도 명색이 내 동생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결국 발해군은 흑수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어요. 그리고 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반역죄를 짓고 도망간 대문예의 처형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당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대문예를 보호해 주었어요. 무왕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고, 결국 큰 결심을 하였어요.

“어차피 당과는 한판 붙어야 한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다. 발해의 힘을 보여주겠다!”

무왕, 당의 등주를 공격하다

732년 무왕은 당나라 공격을 명하였어요. 발해 대장군 장문휴는 수군을 이끌고 압록강 입구에서 출발해 바닷길로 당의 등주(중국 산동성)를 기습 공격했어요. 거침없는 기세로 몰아붙인 끝에 발해군은 등주 성을 함락하고 성주까지 죽이는 성과를 거두었어요.

당황한 당은 우선 대문예에게 군사를 이끌고 와 발해군에 맞서도록 했어요. 그런데 중국 동북 지방의 날씨가 너무 추워서 행군 도중에 수많은 군사들이 동상에 걸려 죽기까지 했어요. 대문예는 하는 수 없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한편 당은 신라에도 도움을 요청하였어요. 신라를 끌어들여 양쪽에서 발해를 협공할 생각이었지요.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을 공격해 주시오.”

신라는 발해를 견제하고 당과도 친해질 기회라 생각했어요. 신라군은 발해를 공격하러 북쪽으로 떠났어요. 하지만 신라 역시 폭설과 추운 날씨로 그만 후퇴하고 말았어요.

이렇게 무왕은 말갈족을 굴복시키는 한편 강대국 당과도 떳떳이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어요. 어느덧 발해는 주변 나라도 함부로 못 할 뿐만 아니라 당과도 어깨를 겨루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어요.

<발해의 등주성 공격>   

문왕, 나라의 기틀을 다지다

무왕이 죽고 아들 대흠무가 왕위에 올라 문왕이 되었어요. 문왕은 당과의 싸움을 멈추고 나라 안의 체제를 정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어요.

“발해는 이제 주변 나라들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힘센 나라가 되었다. 지금부터는 당과 친하게 지내면서 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문왕은 한때 당과 싸웠다 할지라도 그들의 앞선 문물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어요. 우선 당의 중앙 통치 제도를 받아들여 3성 6부를 기본으로 중앙 통치 기구를 정비하였어요. 중앙 행정 기구로 정당성·중대성·선조성의 3성을 갖추고, 정당성 아래 충부·인부·의부·지부·예부·신부의 6부를 두어 실제 일을 맡게 했지요.

당의 제도와 더불어 문화와 사상도 배우고자 했어요. 당시 유학이 여러 제도의 기반이었으므로 당에 젊은이들을 보내 유학을 배우게 하였어요. 그리고 그들이 발해로 돌아온 뒤에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도록 도왔어요.

당에서 불교가 크게 유행하자, 불교를 받아들여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고 했어요. 문왕도 자신을 불교의 이상적인 통치자와 견줄 정도로 적극적이었어요. 발해의 도읍인 상경성에는 앞다퉈 큰 절들이 지어졌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불경을 외우며 부처님께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이불병좌상(중국 지린성)
석가와 다보 두 부처가 나란히 앉은 불상이에요. 고구려 불상의 특징을 담고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상경용천부로 수도를 옮기다

나라가 점점 커지다 보니 대조영이 세운 도읍은 너무 비좁아졌어요. 더 넓고 살기 좋은 땅이 필요했지요. 문왕은 두만강 하류의 중경으로 도읍을 옮겼어요. 그런데 나라가 성장하자 그곳도 좁았어요. 이번엔 목단강 유역의 상경으로 옮겼어요. 그러다 동경(지금의 훈춘 지역)으로 거듭 도읍을 옮기게 되었어요. 문왕이 다스리는 동안 나라가 계속 성장했던 거예요.

발해가 가장 오랫동안 수도로 삼았던 곳은 상경 용천부였어요. 문왕은 상경 용천부를 당의 수도 장안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게 했어요. 상경성은 평지에 네모반듯하게 바깥성을 쌓고 그 안에 왕이 사는 궁성을 지었어요.

또 성안에는 궁궐·관청·절·집들이 있고, 남북과 동서로 크고 작은 도로가 바둑판 모양으로 길게 뻗어 있었어요. 특히 궁궐 남문에서 바깥성 남문까지 시원하게 뻗은 큰길을 냈는데, 이 길을 장안성과 똑같이 주작대로라 이름 지었어요.

<용머리 석상
상경성 터에서 출토되었어요. 궁궐 건축 장식에 쓰였어요. 강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상경성 모형도>   
국사편찬위원회

상경성은 이후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도읍으로서 주변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중심 도시 역할을 했어요.

발해의 자신감을 드러내다

발해는 당의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당의 속국이 된 건 아니에요.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인 만큼 고구려 문화가 바탕을 이루었어요. 여기에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부강한 나라가 되었지요.

발해가 성장하자 발해를 대하는 당의 태도도 바뀌었어요. 이전까지는 당은 발해를 중국의 행정 구역인 ‘군(郡)’으로 불렀어요. 그러나 발해가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서자 당은 독립된 한 나라로 인정해 ‘발해국’으로 부르기 시작했어요. 나라가 날로 부강해지면서 문왕은 자신감이 높아졌어요. 그래서 왕의 호칭을 황제로 바꾸었지요. 당시 황제의 호칭을 쓰는 나라는 당밖에 없었어요.

<정효 공주 무덤 묘비>   
한국학중앙연구원

실제로 문왕의 넷째 딸 정효 공주의 묘비에 새겨진 글을 보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요. 묘비에 문왕을 ‘황상’이라 표현하고 있어 문왕을 황제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또한 발해는 ‘대흥’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어요. 이것은 문왕이 황제의 나라를 자처하며 발해를 당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알려 주지요.

한편 문왕은 일본에도 발해의 자신감을 파격적으로 나타냈어요. 문왕은 771년 6월 일본에 보낸 국서에 발해는 장인이고, 일본은 발해의 사위 나라라고 불렀어요. 발해를 중심으로 일본을 낮추어 부른 것으로 발해가 강대국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어요. 발해는 문왕이 60년 가까이 왕위에 있으면서 체제 정비를 통해 아주 강한 나라로 발돋움했어요.

  

선왕, 발해의 전성기를 이루다

발해는 문왕이 죽고 짧은 기간에 왕위가 여러 번 바뀌면서 잠시 혼란을 겪었어요. 하지만 818년 선왕이 오르면서 안정을 찾고 다시 발전하게 되었지요. 선왕은 나라의 영토를 더욱 넓혀 나갔어요. 동쪽으로 연해주까지, 서쪽으로 요동의 깊숙한 지역까지, 북쪽으로는 흑룡강 지역까지 발해의 영토가 되었어요. 그 결과 선왕 대의 발해는 옛 고구려 영토보다 더 넓었어요.

선왕은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어요. 전국에 5경 15부 62주를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했어요. 5경은 전국에서 중심지 역할을 한 다섯 개의 도시이자 도읍이에요.

상경 용천부를 비롯해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서경 압록부, 남경 남해부를 말하지요. 15부는 전국을 열다섯 개의 지역으로 나눈 행정 구역이고, 62주는 각 부를 다시 작게 나눈 행정 구역이에요.

발해는 다섯 개의 길도 닦았어요. 당, 거란, 일본, 신라 등과 교역하기 위해 교통로를 열었지요. 이 길을 ‘발해 5도’라고 해요.

<발해의 5경과 발해 5도>   

“동경 용원부의 동남쪽 바다는 ‘일본 길’이고, 남쪽 바다는 ‘신라 길’이다. 서경 압록부는 ‘조공 길’이고, 장령부는 ‘영주 길’이며, 부여부는 ‘거란 길’이다.”

이러한 발해 5도를 통해 많은 사신과 장사꾼들이 오갔어요. 덕분에 외교 관계를 튼튼히 하고 무역을 활발히 하여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요. 군사, 문화 등의 여러 분야에서도 발전을 이뤄냈어요.

고구려를 이어받은 발해는 고구려에 뒤지지 않을 만큼 부강한 나라가 되어 동아시아를 호령했어요. 주변 나라들은 이런 발해를 부러워했지요. 특히 당에서는 큰 번영을 이룬 발해를 ‘바다 동쪽에 있는 번성한 나라’란 뜻으로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어요.

여러분은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강하고 번성했던 발해의 역사를 배우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생각보다 크고 넓은 우리 발해의 역사에 마음이 뿌듯하지 않은가요? 아직 모르는 친구에게 자랑스러운 발해의 역사를 알려 주면 어떨까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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