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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의 성립과 통일 - 고려, 후삼국을 통일하다

<금산사 미륵전(전북 김제시)>   
문화재청

“후백제에 군사를 보내 정벌해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 손으로 저를 배신한 아들에게 벌을 주려고 합니다."

936년 견훤은 왕건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자신이 세운 나라인 후백제를 공격했어요. 후백제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후 한반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신라 말 호족이 등장하다

신라는 676년 당의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했어요. 그 과정에서 진골 귀족인 김춘추가 왕이 되었지요. 무열왕(김춘추)에 이어 통일을 완성한 것은 문무왕이에요. 그다음 국왕인 신문왕 시기를 거치면서 왕권은 매우 강력해져요. 그리고 여러 제도가 만들어졌고, 나라는 더욱 발전했어요.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신라의 발전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8세기 후반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위기가 찾아왔지요. 권력을 차지하려는 귀족 간의 갈등 속에서 혜공왕이 죽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 후에도 귀족들은 왕위 다툼을 계속하였어요. 정치가 안정되지 못한 가운데 흉년까지 이어져 백성의 삶은 매우 고달팠어요. 백성들은 세금을 줄여주기를 바랐지만, 나라에서는 오히려 세금을 독촉했어요. 그러자 진성여왕 때에는 이곳저곳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어요.

수도 경주의 귀족들은 권력을 장악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지방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새로운 무리가 나타났어요. 이들은 호족이라고 불렸어요. 호족은 각 지역에 성을 쌓고 사병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불리기도 했어요.

호족의 출신은 아주 다양했어요. 먼저 촌주였던 사람들이 있어요. 촌주는 오래전부터 그 지역에 정착해 살아온 지방 세력이에요. 또는 중앙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내려온 진골 귀족이 호족이 되기도 했어요. 이외에도 해상 무역을 하거나 군인 출신이 호족이 되기도 했고요. 장보고도 청해진(지금의 완도)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신라말의 대표적 호족이에요.

<지방 호족의 성장>   

후삼국 시대가 열리다

신라 말에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호족 중에서는 신라를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왕이 된 사람도 있어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견훤과 궁예죠.

우선 견훤은 어렸을 때 호랑이 젖을 먹고 자랐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어요. 물론 사실은 아니었겠지만, 그만큼 견훤의 용맹함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거지요. 아무튼 신라가 혼란해지던 시절에 그는 군인이 되어 서해와 남해 일대를 차지할 정도로 세력을 키워나갔어요. 그러다가 900년에 전라도 일대에서 세력을 모아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하는 후백제를 세웠어요.

궁예는 신라의 왕자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그가 태어났을 때 불길하다는 이유로 버림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해요. 10살 즈음에는 강원도에 있는 세달사라는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는데, 갑자기 새가 나뭇가지를 떨어뜨리더니 ‘왕(王)’자를 만들었대요. 그 후 궁예는 호족 양길의 부하로 들어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양길에게서 독립하여 901년에 철원을 도읍으로 하는 후고구려를 건국했어요.

두 나라가 세워지자 신라의 영토는 경상도 일대로 점점 줄어들었어요. 이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약 35년 동안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가 함께 경쟁하는 후삼국 시대가 지속되었어요.

<후삼국의 성립>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틈에서 신라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어요. 이와 달리 후백제는 초기 후삼국 시대를 주도했어요. 견훤이 신라의 군인 출신으로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이었던 듯해요. 그러다가 후고구려가 바다를 통해 전라도 나주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지요. 후백제에 밀리지 않게 되었고, 후삼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어요.

왕건, 고려를 세우다

후고구려가 나주를 차지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왕건이에요. 왕건의 집안은 대대로 송악(현재 개성)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웠어요. 왕건의 아버지는 궁예가 강원도 일대를 차지할 무렵 궁예의 편이 되었고, 왕건도 20살의 젊은 나이에 궁예의 신하가 되었어요. 이후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곳곳에서 공을 세웠어요. 특히 903년에는 바닷길을 통해 전라도 남쪽 지역을 공격하여 그곳을 후고구려의 영토로 삼았어요.

그런데 후고구려의 국내 정치는 안정적이지 못했어요. 궁예가 스스로 미륵부처라고 주장하면서 마음대로 횡포를 저질렀어요. 죄 없는 사람들까지 함부로 죽이자 신하들의 마음이 궁예에게서 떠나가기 시작했죠. 그리하여 신하들은 궁예를 쫓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세웠어요. 918년 왕건은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 하고 송악(개성)으로 도읍을 옮겼어요.

<왕건에게 쫓겨나는 궁예>   

고려를 세운 왕건은 신라와 친하게 지내려 했어요. 그러다 보니 신라를 괴롭히던 후백제와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지요. 대표적인 싸움이 공산(지금의 대구) 전투에요. 두 나라가 이 전투를 하게 된 이유는 견훤이 신라를 계속 공격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신라의 경애왕이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보다 먼저 견훤의 군대가 신라의 수도인 금성(지금의 경주)까지 공격한 것이죠.

<포석정과 경애왕>   

927년 견훤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금성으로 쳐들어갔어요. 당시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고 즐기느라 견훤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도 몰랐다고 해요. 견훤은 신라왕을 죽이고 다른 왕을 세웠어요. 그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에요.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도우러 갔다가 금성에서 철수하는 견훤의 군대와 공산에서 마주하게 되었어요. 이때 왕건은 후백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공산 전투에서 크게 지고 말았어요.

3년 뒤인 930년에 왕건과 견훤은 고창(지금의 안동)에서 다시 맞붙었어요. 이때는 고창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 덕분에 왕건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어요.

고려, 후삼국을 다시 통일하다

고려와 후백제의 대립은 계속되었어요. 하지만 후백제에서는 왕위를 둘러싸고 큰 다툼이 벌어졌지요. 견훤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대요. 견훤은 넷째 아들인 금강을 왕으로 삼으려 했는데, 큰아들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고 금산사라는 절에 가두어 버렸던 거예요.

얼마 후 견훤은 금산사에서 몰래 탈출해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지역인 나주로 도망쳤어요. 그리고 바닷길을 통해 송악에 있는 왕건을 만나러 갔지요. 왕건은 견훤을 반갑게 맞아주었고, 땅을 주어 편안히 살 수 있게 했어요.

이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순왕은 고민에 빠졌어요. 더는 나라를 다스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경순왕은 왕자인 마의태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건에게 신라를 넘겨주기로 했어요. 935년 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하기 위해 송악으로 갔어요. 왕건은 견훤에게 했던 것처럼 경순왕을 우대했어요. 경순왕에게 좋은 집을 주고, 큰 딸인 낙랑공주도 시집보냈어요.

<왕건에게 항복하는 경순왕>   

신라가 항복한 후 왕건은 후백제를 공격했어요. 이때 견훤이 앞장서서 전쟁에 나섰대요. 결국 신검을 비롯한 후백제 사람들은 고려에 항복했어요. 이로써 왕건은 후삼국의 통일을 완성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비결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눈에 띄는 점은 백성의 세금을 줄여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는 거예요. 또 결정적으로 그는 각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어요.

왕건은 호족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어요. 일단 땅과 관직을 내려주면서 선물 공세를 했어요. 성씨를 주기도 했지요. 당시 지방의 호족들은 대체로 이름만 있고 성이 없었는데, 귀족들이 썼던 성씨를 내려준 거예요. 게다가 왕건과 같은 왕씨 성을 주었죠. 호족은 신분이 상승한 느낌을 제대로 받았을 거예요.

또한 왕건은 호족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어요. 그래서 왕건은 부인이 무려 29명이나 있었대요. 즉 국왕 왕건과 혼인을 맺은 호족은 왕의 가족이 되었던 거죠.

왕건은 호족을 대우하면서도 한편으로 견제하기도 했어요. 세력을 키워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여겨서 호족의 아들들을 수도인 개경에 머무르게 하는 기인제도도 실시했어요.

만약 여러분이 왕건이라면 호족을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정책을 펼쳤을까요? 또 한편이 되어 세상을 바꾸었을 때 그 정책은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할까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요.

[집필자]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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