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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침입과 고려의 항쟁

<고려궁지(인천 강화군)>   
문화재청

“폐하! 몽골이 언제 다시 침입할지 모르니 하루속히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야 합니다.”

“최우!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구려.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시오.”

태조 왕건은 고려의 왕으로 즉위한 이듬해인 919년에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개경)으로 옮겼어요. 이후 개경(개성)은 오랫동안 고려의 수도였어요. 그러나 300여 년이 지난 1232년 고종은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어요. 고려는 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을까요?

몽골이 처음으로 고려를 침입하다

몽골은 몽골 초원에서 가축을 기르며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이동 생활을 하던 유목 민족이었어요. 당시 몽골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206년 칭기즈 칸이라는 인물이 부족을 통일하고 몽골 제국을 세웠어요. 몽골 제국은 초원에서 나고 자란 민족답게 빠르고 강력한 기병을 앞세워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했어요.

몽골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점령하였고, 북중국에 있던 금나라도 공격했어요. 이어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공물(貢物)로 많은 물건을 바치라고 요구했어요. 공물은 약한 나라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강한 나라에 바치는 여러 특산품을 의미해요. 당시 고려는 군사력이 강한 몽골의 엄청난 공물 요구를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두 받아들이자니 그 부담이 너무 커서 고민에 빠졌어요.

그러던 중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저고여라는 인물이 몽골로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부근에서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어요. 몽골은 이를 핑계로 고려에 쳐들어왔어요.

압록강을 건넌 몽골군은 국경 근처의 의주를 점령한 후 곧바로 진격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을 포위했어요. 당시 고려는 무신 최우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전쟁을 일찍 끝내기 위해 몽골에 많은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어요.

최우의 약속을 받은 몽골은 군대를 되돌려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다루가치라는 관리를 고려에 두었어요. 다루가치는 많은 공물을 거두어 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고려의 정치까지 간섭했어요.

고려,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다

몽골군은 물러갔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많은 양의 공물은 고려에 큰 부담이 되었어요. 다루가치의 횡포도 점점 더 심해졌지요. 당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최우는 몽골의 간섭이 자신의 자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신하들과 함께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는 문제를 논의했어요. 최우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자고 했지만, 대다수 신하들은 수도를 옮기지 말고 개경에서 몽골과 싸우자고 했어요.

“개경을 지키지 않고 섬으로 도망가서 시간만 끌면 백성들이 몽골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끌려가 노비가 될 것입니다. 강화도 천도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개경은 태조 왕건 때부터 300년 넘게 지켜온 수도입니다. 성이 견고하고 군사와 양식이 풍족하므로 개경에서 힘을 합쳐서 몽골군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화가 난 최우는 강화도 천도를 반대한 신하들을 죽이기까지 했어요. 이런 모습을 본 신하들은 더 반대하지 못했어요. 고종도 수도를 옮기는 일을 주저했지만 어쩔 수 없이 허락했어요. 최우는 왕과 관리, 개경의 백성들을 강화도로 옮겨 가도록 했어요. 한편 지방의 백성들에게는 각자 알아서 섬으로 가거나 산성에 가서 숨으라고 했어요. 국가의 최고 권력자로서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요?

<강화도로 옮겨가는 개경의 백성들>   

고려는 왜 수도를 섬인 강화도로 옮겼을까요? 역사학자들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첫째, 고려 정부는 몽골군이 해전에 약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유목 민족인 몽골은 기병 전술에는 매우 강했지만, 상대적으로 바다에서 싸운 경험은 부족했지요. 지금은 강화도가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당시는 물살이 센 바다를 배로 건너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둘째, 강화도는 전국 각지에서 걷은 세금을 받기가 쉬운 곳이었어요. 당시 세금이 최종적으로 모이는 곳은 수도 개경인데, 강화도는 개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거든요. 따라서 수도가 강화도에 있으면 예전처럼 세금을 쉽게 거둘 수 있었지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후 궁궐도 새로 지었어요. 당시 궁궐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그 터는 지금까지 남아서 ‘고려궁지’, ‘고려궁터’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답니다.

<강화도의 고려시대 유적>   
강화군청, 문화재청

백성들이 몽골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1232년 고려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후 몽골이 다시 침략했어요. 몽골군은 고려 정부에게 육지로 나와 항복하라고 요구하면서 여러 지역을 약탈했지요. 몽골군 일부는 개경을 지나 한강 이남까지도 내려왔어요.

고려 백성들은 몽골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어요. 특히 처인성(오늘날 경기도 용인)에서 김윤후가 이끄는 백성들이 몽골군의 침략을 물리쳤어요. 김윤후는 활을 쏴 몽골군 장수 살리타이를 죽였어요.

<몽골의 침입과 고려의 항쟁>   

몇 년 후 몽골군은 충주를 침입했어요. 이번에도 김윤후가 충주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성 안의 백성들에게 “열심히 몽골과 싸운다면 신분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직을 주겠다.”라고 했어요. 그리고 갖고 있던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웠어요. 마침내 충주성 전투도 고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지요.

<처인성 전투>   

비록 몇 차례 전투에서 고려 백성들이 몽골군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나 정규군 대부분은 몽골군을 당해내지 못했어요. 특히 고려의 군대는 거의 강화도에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스스로 몽골군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몽골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어요.

어떤 해에는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몽골군에게 붙잡혔으며, 죽임을 당한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몽골군이 지나가는 곳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피해를 입었어요. 백성들은 또한 고려 정부가 세금을 걷어갔기 때문에 이중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어요. 또한 고려의 관군이 지키는 강화도의 왕과 귀족들과 달리 스스로 몽골군에 맞서 싸워야 했으므로 백성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고려, 몽골과 강화를 맺다

몽골과의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고려 정부도 뭔가 결정을 내려야만 했어요. 당시 무신 정권은 몽골에 항복하면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길까 염려하여 몽골과의 싸움을 계속하자고 주장했어요. 그러나 고종과 문신들은 더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속마음으로는 몽골과 강화를 해 무신 정권을 끝내고 싶어 했어요. 강화란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해요.

한편 1258년에는 당시 무신 정권의 우두머리였던 최의가 무신 김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지요. 결국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등 4대에 걸쳐 이어졌던 60여 년의 최씨 무신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어요. 결국 이듬해 고종은 문신들의 주장에 따라 몽골에 강화를 요청했어요. 몽골도 당시 중국 남쪽에 있던 남송 정복에 집중하기 위해 고려와의 강화가 필요했어요.

몽골이 내세운 강화 조건은 ‘고려 고종이 직접 몽골에 와서 항복할 것’과 ‘원래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올 것’이었어요. 이후 첫 번째 조건은 고려 태자가 몽골을 방문하는 것으로 완화되었어요. 그에 따라 고려 태자는 몽골을 방문하였고 이후 고종의 뒤를 이어 원종으로 즉위하였어요.

그러나 두 번째 조건은 10여 년 뒤에야 이루어졌어요. 아직 명맥이 남아 있던 무신 정권이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개경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에요. 결국 원종과 문신들이 몽골군을 끌어들여 무신 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린 다음에야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 삼별초의 대몽 항쟁이 이어지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돌아간다고 결정하자 최씨 무신 정권의 사병이었던 삼별초가 이를 거부하며 봉기했어요. 배중손이 지휘한 삼별초는 몽골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배를 타고 진도로 갔지요.

그러나 몽골·고려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를 빼앗기자 삼별초의 일부 세력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옮겨 가서 항쟁을 이어나갔어요. 결국 삼별초가 1273년 몽골·고려 연합군에 패하면서 3년여에 걸친 대몽 항쟁은 막을 내렸어요.

삼별초의 봉기는 대몽 항쟁을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어요. 더욱이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삼별초의 봉기가 3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지요. 그러나 삼별초는 최씨 무신 정권의 사병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한계도 있어요.

우리는 고려의 대몽 항쟁과 삼별초의 항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당시 몽골군의 군사력은 세계 최강이었는데, 그처럼 강력한 몽골군에 맞서 고려는 40년 가까이 맞서 싸웠어요. 그 덕분에 고려는 비록 강화를 맺고 한동안 원의 간섭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라와 왕실은 물론 고유의 풍속을 유지할 수 있었지요.

삼별초의 봉기는 대몽 항쟁으로서의 성격과 자신들의 세력 유지라는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갖고 있었어요. 더욱 중요한 점은 당시 몽골과의 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운 주역이 지배층이 아니라 일반 백성이었다는 것이에요. 내 가족, 내 마을을 지키기 위한 백성들의 피땀 어린 항쟁을 우리는 그 어떤 높은 지위의 장군보다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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