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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층으로 높게 만들어진 고려의 탑

<경천사지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요즘은 원나라 형식이 많이 유행하니 이번에 세울 탑은 원나라 형식으로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 그렇게 합시다. 우리의 전통 형식인 홀수 층의 탑이 아닌 10층탑으로 만듭시다. 탑의 재료도 대리석으로 하는 것이 좋겠소.”

고려 시대에는 5층탑, 7층탑, 9층탑 등 높은 층의 탑들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 형식의 탑도 만들어졌지요. 이처럼 다양하게 만들어진 고려 시대 탑들은 또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불교가 크게 발달했던 고려 시대에 세워진 탑

고려 시대 사람들이 널리 믿었던 종교는 불교였어요.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처럼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도 불교는 크게 유행했지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도 불교를 숭상하고자 했어요. 그가 후손에게 남긴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훈요 10조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어요.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불교를 장려하라. ……
부처를 모시는 연등회와 여러 신을 모시는 팔관회를 성실하게 열도록 하라.

오래된 사찰에 가 보면 돌로 만든 탑들을 볼 수 있어요. 원래 탑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에서 나온 말이에요. 스투파는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탑파’가 되었다가, 줄어서 ‘탑’이 되었지요. 스투파는 석가모니가 열반한 다음 몸에서 나온 사리들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하였어요. 이후 탑은 부처의 상징이 되었으며, 승려들이 모여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찰에는 탑도 함께 세워졌어요.

고려 이전인 통일 신라 시대에는 주로 3층탑이 만들어졌는데,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는 층수가 더욱 많아졌어요. 그래서 5층탑, 7층탑, 9층탑이 세워졌지요. 당시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탑으로 개성 불일사 5층 석탑, 개성 현화사 7층 석탑,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이 있어요.

하지만 고려 시대에는 홀수 층의 탑만 세워진 것은 아니었어요. 고려 후기에 원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원나라 양식이 크게 유행하게 돼요. 이러한 유행은 탑을 만드는 데도 영향을 주었어요. 당시 원나라에서는 대리석으로 높고 화려한 모양을 새긴 짝수 층의 탑을 만들었어요.

이와 같이 원나라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탑이 바로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에요. 그래서 이 석탑은 기존의 전통적인 탑과는 모양도 다르고, 층수도 많이 다르답니다. 지금부터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탑들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고려 현종의 효심이 담긴 개성 현화사 7층 석탑

고려 현종은 고려의 여덟 번째 왕으로 태조 왕건의 손자였어요. 그는 아버지 왕욱과 어머니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이름은 왕순이었어요. 아버지 왕욱이 왕이 아니었기에 왕순도 세자가 아닌 여러 왕족 중의 한 명일 뿐이었지요. 왕순은 어릴 때 불행을 많이 겪었어요. 어머니는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귀양을 갔어요. 그래서 왕순은 어려서부터 보모의 손에서 자랐어요. 몇 년 후 왕순의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어요.

왕순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당시 제7대 임금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자신의 또 다른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이고자 했어요. 이처럼 왕순은 왕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의 싸움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뻔 한 적이 여러 번이었어요.

1009년 왕순이 열 여덟살이 되었을 때, 강조라는 신하가 정변을 일으켰어요. 왕순은 강조에 의해 고려의 제8대 임금(현종)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지요.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까지 피난 가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어요. 그러나 강감찬의 귀주 대첩 등을 통해 거란의 침입을 물리쳤어요. 이후 현종은 백성의 세금을 합리적으로 걷고,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는 등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노력했어요.

한편 현종은 불교를 장려하는 정책도 펼쳤어요. 한동안 중단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열었어요. 또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개경 근처에 현화사라는 사찰을 지었어요. 그리고 사찰 안에 현화사 7층 석탑을 세웠어요.

현화사 7층 석탑은 높이 8.64m 높이로, 제일 아래에 기단(건축물이나 비석의 기초가 되는 단)이 한 층 있고, 그 위로 일곱 층의 탑신(탑의 기단과 머리 부분 사이에 있는 탑의 몸체)이 올려져 있어요. 탑신 위에는 탑머리도 있지요. 탑의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몸돌의 크기가 비례해 줄고, 각 층의 지붕돌이 비교적 얇고 처마를 길게 빼고 있어서 아주 경쾌한 느낌을 주지요.

특히 현화사 7층 석탑에서 돋보이는 것은 1층 몸돌 부분이에요. 6명의 보살(불교에서 지혜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과 동자들(어린 소년들), 2명의 사천왕(불교의 수호신)이 부처님을 둘러싸고 조각되어 있어요. 마치 이들이 가운데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모습처럼 생동감이 넘쳐요.

<개성 현화사 7층 석탑과 탑의 1층 몸돌에 새겨진 부처님,
6명의 보살과 동자들의 모습>   
문화재청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과 탑의 내부에 들어 있던 은제 도금 여래 입상>   
문화재청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평창 월정사는 신라 선덕 여왕 때 승려 자장에 의해 임시 암자로 만들어졌다가 후에 제대로 된 사찰로 바뀌었어요. 세월이 흘러 1950년에 이르러 평창 월정사는 불행한 일을 겪게 돼요. 안타깝게도 6·25 전쟁으로 인해 사찰 건물이 불탔어요. 당시 사찰을 태운 불은 석탑에까지 피해를 입혔어요.

이후 1970년에 석탑을 전면 해체해서 다시 보수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어요. 보수 작업 중 석탑 안에서 은으로 도금한 불상인 은제 도금 여래 입상이 발견되었어요. 또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을 포함해 총 12개의 유물이 발견되었지요.

2000년에는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주변을 발굴 조사했어요. 3년 동안 이어진 발굴 조사 결과 석탑 아래 땅 속에서 중국 송나라 때 사용된 동전이 여러 개 발견되었어요. 동전은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져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또한 발굴 조사 과정에서 발견한 기와를 통해 월정사가 조선 세종 때와 광해군 때 수리를 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답니다.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은 높이 15.2m이며, 돌의 모양이 8각형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또한 신라 시대에 유행한 3층탑이 아니라 무려 9층탑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면 왜 탑이 4각형이 아닌 8각형으로 만들어졌을까요?

고려 시대에는 이전 시대와 달리 4각형이 아닌 다각형으로 만들어지고 층수도 3층보다는 여러 개의 층으로 된 석탑이 유행했어요. 이러한 형식은 특히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 지방에서 유행했다고 해요. 따라서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은 고려 시대의 다각다층탑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지요.

기구한 운명의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경복궁에 있을 때의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내부에 있는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문화재청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몸돌에 기록된 글을 보면, 이 탑이 고려 말 원나라 황제의 복을 빌기 위해서 지어졌다고 해요. 왜 우리나라 석탑이 원나라 황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요?

고려는 1231년부터 1270년까지 대략 40년 동안 세계 최강국이었던 몽골과 전쟁을 벌였어요. 당시 고려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몽골과의 항쟁을 이어 나갔어요. 결국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여 강화를 맺었어요. 그 결과 고려는 왕실이 유지되었지만 한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지요. 이 시기를 원 간섭기라고 해요. 원 간섭기에는 몽골의 풍속도 고려에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몽골풍이라고 해요. 고려의 풍속도 원나라에 유행하였는데, 고려양이라고 하지요.

당시 원나라에서 출세한 고려 사람 가운데 강융과 고용봉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들은 개성 근처에 원나라 황제의 복을 빌기 위해 원나라 탑 형식으로 탑을 만들었어요. 이 탑이 바로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에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탑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 석탑은 원나라에서 유행한 대리석으로 만들었어요. 탑의 층수도 전통적인 홀수가 아닌 짝수로 되어 있어요. 탑의 모양 역시 기존의 탑과는 많이 달라요.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이후에 많은 수난을 겪게 돼요. 이 탑은 원래 경기도 개풍군(현재 북한 개성시)의 경천사에 있었어요. 그런데 1907년에 대한 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고위 관리였던 다나카 미츠아키는 이 탑에 엄청난 욕심을 부렸어요. 그는 자신이 고종 황제로부터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선물로 받았다고 하면서 일본 도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가버렸어요. 물론 새빨간 거짓말로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범죄 행위이지요. 그러나 당시 대한 제국의 국력이 약했어요. 그래서 대한 제국 정부에서 돌려달라는 이야기를 해도 일본의 높은 관리였던 다나카 미츠아키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돌려받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어요. 바로 대한 제국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베델과 미국인 헐버트가 특히 탑의 반환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지요. 베델은 자신이 발행하던 신문 〈대한매일신보〉에서 일본의 대한 제국 침략을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어요. 그는 당시 대한 제국에서 발행되던 영자 신문인 〈코리아데일리뉴스(Korea Daily News)〉에 일본인이 불법적으로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몰래 가져갔다고 고발하는 기사를 썼어요. 또한 이 탑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도 신문에 실었어요.

헐버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요로 부당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한 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미국인이에요. 그는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 약탈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본에 있는 영자 신문에 이 소식을 고발하는 기사를 썼어요. 그리고 탑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일본 사람들에게 호소했어요.

1910년 대한 제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이후에도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반환받으려는 노력은 이어졌고, 마침내 1918년에 국내에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러나 탑은 원래 있던 곳이 아닌 경복궁으로 돌아왔는데, 이후 40여 년 동안 돌아올 때의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방치되었어요. 195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포장을 뜯고 1년 동안 복원 공사를 했어요. 당시 복원 공사는 훼손된 곳을 시멘트로 채워 넣는 부실한 공사였지요. 게다가 그 이후 오랫동안 경복궁 뜰에 전시되면서 비바람과 산성비로 인해 탑이 점점 더 훼손이 되었어요. 결국 1995년 다시 복원 공사를 하기로 결정했어요.

우선 1959∼1960년 공사 때 채워 넣었던 시멘트를 제거하고, 레이저를 이용해 표면의 오염물도 닦아 냈어요. 심하게 손상된 곳은 64개의 새로운 대리석으로 교체했어요. 복원 공사는 10년 간 이어졌고, 드디어 2005년에 복원 공사를 마무리했지요. 이후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내부로 옮겨져 현재까지 전시되고 있어요.

여러분도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아파트 5층 높이의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웅장한 모습을 한 번 살펴보세요. 참, 탑의 안내문에 포함된 베델과 헐버트의 헌신적인 노력에 대한 글도 읽어보도록 해요. 한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고자 했던 외국인들의 노력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 거예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탑의 이름은 어떻게 짓는 것일까?

탑은 ‘소재지-형태-층수-재료(어디-모양-몇 층-무엇으로)’의 순으로 이름이 붙여져요. ‘소재지’는 원래 탑이 있던 곳, 옮기기 전에 있던 장소 내지 지역을 말해요. ‘형태’는 탑이 이루어진 형태 내지 모양, 또는 배치된 형태를 말해요. 보통 탑은 4각형을 이루고 있어 그 형태를 표시하고 있지 않지만 특별한 형태를 하고 있는 탑은 그 구별되는 형태를 표시하기도 해요.

‘층수’는 탑의 탑신부에 해당되는 층의 개수로서, 지붕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부분(옥개석)의 수가 바로 층수가 된답니다. 즉 탑의 머리와 밑부분을 제외한 탑의 몸에 해당되는 부분의 지붕 수를 가리키지요. ‘재료’는 나무로 만들었으면 목탑, 돌로 만들면 석탑, 벽돌로 만들었으면 전탑 등으로 분류하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그동안 많은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목탑은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그리고 돌을 구하기가 쉬워서 벽돌보다는 주로 돌로 만든 석탑이 많이 만들어졌답니다.

주말이나 방학 때 부모님과 함께 오래된 사찰에 가서 탑들을 살펴보기 바라요. 그리고 탑을 살펴본 후 표지판을 보기 전에 탑의 이름을 한 번 맞춰 보면 어떨까요?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문화재청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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