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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하회 마을과 양동 마을

<하회 마을(경북 안동시)>   

“안동 하회 마을은 어떠한 이유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나요?”

“조선 시대 마을의 특징이 가장 잘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조선 시대 전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마을은 어디일까요? 바로 안동 하회 마을과 경주 양동 마을이에요.

두 마을은 마을이 자리한 위치를 비롯해 기와집, 초가집, 서원 등 여러 건물 등에서 조선 시대의 전통이 잘 보존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그래서 두 마을 모두 201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어요. 지금부터 조선 시대 전통미를 느낄 수 있는 두 마을로 여행을 떠나볼까요?

조선 시대 마을로 떠나는 여행

하회 마을과 양동 마을은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끼리 수백 년 동안 모여살고 있는 곳이에요.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같은 성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전통 문화를 지켜 온 마을은 세계적으로도 흔하지 않아요.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집성촌이라고 해요. 혈연으로 맺어진 친척들이 모여 농사를 짓고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며 수백 년 동안 마을을 지키고 있지요. 두 마을은 모두 이름난 정치가와 학자들을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해요.

하회 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우고 최고 벼슬인 영의정까지 지낸 류성룡이 있으며, 양동 마을에는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이언적이 있어요. 이언적의 성리학 연구는 나중에 이황에게 계승되었지요.

두 마을이 집성촌을 이루게 된 과정은 조금 달라요. 하회 마을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만든 마을이지만, 양동 마을은 서로 다른 두 집안이 결혼을 통해 이룬 마을이에요. 하지만 두 곳 모두 조선의 유교적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마을이라는 공통점이 있지요.

경북 안동에 있는 하회 마을은 지형이 특이해요.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휘감아 흐르고 있지요. ‘하회(河回)’라는 마을 이름도 낙동강이 마을을 휘어 돌아간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요. 원래 하회 마을에는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가 모여 살고 있었어요.

이후 고려 말에 이르러 하회 마을 근처인 풍산 상리에 살던 풍산 류씨 가문이 들어오게 되었어요. 풍산 류씨는 하회 마을에 들어온 세 번째 가문인 셈이지요. 그런데 류씨 가문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는 살기 좋은 장소는 없고 나무가 울창한 늪지대밖에 없었다고 해요. 류씨 일가는 숲을 베어 내고 흙을 다져 터전을 마련했는데, 오늘날 양진당이 그 중심지였어요.

경북 경주에 있는 양동 마을은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러나 근처에서 발굴된 백여 기의 돌널무덤과 이웃 안계리 마을에서 발견된 고분군으로 볼 때 최소한 삼국 시대부터 부족 단위의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원래 양동 마을에는 여강 이씨 가문이 살았다고 전하는데, 이후 결혼을 통해 풍덕 류씨와 경주(월성) 손씨도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해요.

조선 시대 양반 마을은 일반적으로 제사를 받드는 큰아들이 중심이 되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양동 마을은 사위가 처가에 들어와 집성촌을 발전시켰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회 마을의 경우 원래 살았던 허씨와 안씨는 떠났지만, 양동 마을은 처음부터 살았던 여강 이씨 가문과 사위로 들어온 풍덕 류씨 가문 및 경주(월성) 손씨 가문이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어요.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양동 마을이 대표적인 예라고 해요. 이제부터 두 마을의 구석구석을 살펴볼까요?

  

  

풍산 류씨 가문이 꽃을 피운 하회 마을

현재 하회 마을에는 백여 가구의 주민들이 살고 있어요. 이 중 70%가 넘는 주민이 풍산 류씨이지요. 같은 조상을 모시는 주민들이 함께 사는 마을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회 마을에 풍산 류씨가 많이 살게 된 것은 기존에 살던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 가문이 조선 후기에 다른 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에요. 허씨와 안씨 가문이 류씨에 비해 위세가 약해지면서 이들 가문에 속한 사람들 다수가 마을을 떠났다고 해요. 결국 류씨 가문이 하회 마을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요.

한편, 광복 이전까지 전통을 유지하던 하회 마을은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 과정에서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면서 주민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어요.

하지만 1984년 중요 민속자료 마을로 지정되고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곳을 방문하면서 세계적인 명소로서 거듭나게 되었어요.

류씨 가문의 상징, 대종택 양진당

하회 마을을 대표하는 곳은 풍산 류씨 대종택인 보물 제306호 양진당이에요. 대종택이란 가문의 제사를 주관하는 손위의 맏아들이 사는 집으로 가문의 가장 큰집을 의미해요.

이 양진당은 풍산 류씨 가문을 이끌고 하회로 들어온 류종혜가 처음 세운 곳으로 하회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지요. 이후 류종혜의 5대 후손에 의해 99칸짜리 대저택으로 완성되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가 파손되어 지금은 53칸만 남아 있어요.

양진당은 전형적인 조선 시대 양반가의 건축물이에요. ㅁ자형 마당을 중심으로 남자들이 머무는 사랑채와 여자들의 생활 공간인 안채, 그리고 문간채와 마구간, 사당 등의 부속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겉으로 보면 각각 독립된 건물로 보이지만 사랑채와 안채가 마루로 연결되어 있지요.

양진당 사랑채에는 ‘양진당(養眞堂)’이라는 현판 외에도 여러 현판이 걸려 있어요. 양진당이란 글자는 ‘기를 양(養)’, ‘참 진(眞)’, ‘집 당(堂)’으로, 참다운 정신을 기르는 집이라는 뜻이에요. 학문을 잘 닦아 진리를 실천하는 학자들을 키우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양진당과 충효당(경북 안동시)>   

류성룡이 살았던 곳에 지어진 충효당

양진당 건너편에는 류성룡의 종갓집이라고 알려진 충효당이 있어요. 종갓집이란 가문의 제사를 지내는 맏이와 그 가족이 사는 집을 의미해요. 류성룡의 종갓집이라고 하지만 그는 지금의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낡은 초가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현재 충효당 건물은 류성룡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과 후손들이 힘을 합쳐 세운 건물이에요.

<충효당(경북 안동시)>   

충효당도 양반집에서 볼 수 있는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마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전체적인 구조는 조선 시대 여느 양반 집과 비슷하지만 독특하게도 사랑채와 안채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충효당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쓰인 현판이에요. 조선 시대 명필가로 이름난 허목의 글씨로, 글씨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고 있어요.

사랑채 대청 뒤편에는 후원이 있어요. 아담한 규모의 후원은 아주 넓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요. 계절마다 다채로운 색깔의 꽃이 피는 안뜰과 후원을 갖추고 있어 아늑함과 푸근함이 느껴지는 곳이에요. 충효당에는 류성룡과 관련된 각종 자료와 책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영모각이란 건물이 있어요. 영모각은 1975년에 지은 건물이에요.

가난한 양반과 평민의 소박한 공간, 초가집

하회 마을에는 양반들이 주로 살았던 기와집이 많지만, 평민들이 살았던 초가집도 여러 채 남아있어요. 작은 초가집부터 헛간과 마당이 있는 조금 큰 초가집까지 다양한 초가집들을 볼 수 있답니다. 하회 마을 초가집에는 오늘날에도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어요.

초가집은 일반적으로 부엌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고 왼쪽에 안채가 배치되어 있어요. 간혹 부엌이 왼쪽에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집은 부엌 옆에 안채가 있고 그 옆으로 사랑채가 있지요.

양반이 살았던 초가집은 마루와 부속 건물을 갖춘 곳도 있지만, 대부분 부엌과 작은 문만 달린 방이 전부이지요. 주로 흙으로 지었고, 지붕도 농사짓는 과정에서 나온 볏짚으로 덮었어요. 초가집은 규모도 작고 문의 높이도 낮아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어요.

초가집이 이런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추운 겨울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어요. 주거 공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건만 갖춘 건물이었지요. 초가집은 우리 조상 중에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곳에서 살았는지 잘 보여 주는 생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회 마을의 초가집(경북 안동시)>   

조선 시대 가장 큰 집성촌 양동 마을과 서백당

양동 마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집성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곳이에요. 약 150여 가구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있어요. 마을을 대표하는 건물은 경주 손씨 대종택인 서백당이에요. 서백당은 조선 초기의 한 공신이 세운 건물이에요. 5백여 년 전에 지었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보존 상태가 뛰어나지요.

서백당은 ㅡ자형 문간채와 사랑채, ㅁ자형 안채, 사당, 디딜방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서백당의 북쪽으로 길게 지어진 사랑채와 사랑대청을 보노라면 이곳에 살았던 주인들의 단아한 성품을 느낄 수 있지요.

<ㅁ자 모양의 서백당 안채(경북 경주시)>   

서백당은 매우 아름다운 마당을 가진 곳으로도 유명해요. 수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향나무를 중심으로 나무와 꽃이 어우러져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지요. 안채 북쪽에는 디딜방아채라는 곳도 있어요. 디딜방아채에는 각종 양념류와 음식 재료를 직접 만들던 디딜방아가 보존되어 있어요. 종가 여성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손맛의 비결이 숨어 있는 곳이랍니다.

그리고 서백당의 가장 높은 지점에는 조상을 모신 사당이 있어요. 사당에는 나무와 꽃이 가득하여 서백당 주인이 조상을 모시는 일에 얼마나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는지 느낄 수 있지요.

<서백당의 마당(경북 경주시)>   

<서백당의 디딜방아채(경북 경주시)>   

조선 시대 양반집의 특징을 간직한 여러 건물들

양동 마을의 대표적인 건물은 무첨당, 향단, 관가정이에요. 보물 제411호로 지정된 무첨당은 간결미와 세련미를 갖춘 양반집의 특징이 드러나 있는 주택이에요. 여강 이씨의 종갓집으로 본채와 별채로 구성되어 있지요. 특히 손님을 맞고 독서를 즐기던 별채가 아름답기로 유명해요.

무첨당은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마루에는 무첨당을 찾았던 흥선 대원군이 써 준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액자가 걸려 있어요. 좌해금서는 ‘영남 지방의 풍류와 학문’이란 의미이지요.

<무첨당 별채(경북 경주시)>   

무첨당 서쪽에는 향단이란 멋진 건축물이 있어요. 보물 제412호인 향단은 이언적이 경상 감사로 있을 때 어머니 병간호를 하도록 중종 임금이 특별히 지어준 건물이에요.

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등이 한자 ‘흥(興)’ 자 모양을 띠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어요. 향단은 처음 지어진 1543년(중종 38)에는 99칸이었으나 지금은 56칸만 남아 있어요.

마을 서쪽 끝자락에는 관가정이 있어요.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것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 가는 모습을 본다.’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이 건물은 조선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손중돈의 집인데, 마을 주변의 들판을 비롯하여 산과 강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요.

<관가정>   
경주시청

역사 속 작은 이야기: 하회 별신굿 탈놀이

하회 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문화재가 바로 중요 무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하회 별신굿 탈놀이인데요.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였어요. 사람들이 풍요롭기를 기원하는 굿을 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행사라고 할 수 있지요.

<하회 별신굿 놀이>   
안동하회별신굿보존회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고려 시대인 12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당시는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지요. 따라서 홍수나 가뭄으로 흉년이 들거나 전염병이 퍼지면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재해가 일어나는 원인이 신의 노여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신의 노여움을 풀어 주기 위한 의식을 치렀는데, 하회 별신굿 탈놀이도 그런 의식의 하나였어요.

양반: “나는 사대부의 자손일세.”
선비: “아니 뭐라꼬, 사대부? 나는 팔대부의 자손일세.”
양반: “아니, 팔대부? 팔대부는 또 뭐야?”
선비: “팔대부는 사대부의 갑절이지.”
- 안동 하회 별신굿 탈놀이 대사 중에서 -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를 풍자하는 내용이 추가되었어요. 조선 후기에 신분 질서가 흔들리면서 평민들의 의식이 높아졌고, 그들은 기존의 불합리한 제도들에 반발하기도 했지요. 이러한 사회 모습은 전통 있는 하회 마을에서도 나타났으리라 짐작이 돼요.

그래서 하회 마을에서도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고, 하층민들의 애환을 담은 하회 별신굿 탈놀이가 유행하게 되었던 거예요. 하회 별신굿 탈놀이를 주도한 평민이나 천민들은 삶의 애환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해학적으로 풍자했어요.

모두 10개 마당으로 진행되는 별신굿 탈놀이는 하회 마을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재로 매년 3월부터 12월까지 하회 별신굿 탈놀이 전수관에서 상설 공연되고 있어요.

조선 시대 양반 문화는 물론 양반을 풍자하는 서민들의 삶까지 느껴보고 싶다면 안동 하회 마을과 경주 양동 마을을 가보기 바래요. 두 마을에서 한국 전통 문화를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다 보면 어느덧 여러분들도 조선 시대 마을의 주민이 되어 있을 거예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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