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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그림에 담다, 조선의 회화

<정선 필 인왕제색도>   
문화재청

“내 오랜 벗이 하루빨리 병상에서 일어나길 바라며 이 그림을 그렸소.”

“어린 시절부터 두 분이 함께 지낸 추억이 깃든 인왕산을 그리셨군요.”

서울의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에는 비 그친 뒤의 자욱한 안개와 함께 바위 봉우리와 울창한 숲이 실감나게 표현되었어요. 눈 앞의 경치를 실감나게 그린 산수화예요. 이밖에도 조선 시대에는 수많은 그림이 그려졌어요. 대표적인 그림들을 살펴보도록 할까요?

조선 시대에 그려진 다양한 그림들

조선 초에는 중국의 여러 화풍(그림 그리는 경향)을 받아들였어요. 여기에 도교나 노장사상의 분위기가 반영된 그림도 그려졌지요. 그리고 우리나라 예술인들의 감각도 더해졌구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와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가 있어요.

안견은 도화서(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했던 관청)에 소속된 전문 화가였어요. 그는 역대 화가들의 화풍을 깊이 연구하고 장점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어요.

그래서 조선 세종 때 화가로서 이름 높았어요. 그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몽유도원도’는 무릉도원이라는 이상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가 한 화폭 안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문신 관료였던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으로 한 선비가 고요한 물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진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세부 묘사를 대담하게 생략한 인물 중심의 구도가 인상적이지요.

<묵죽도(이정)>   
국립중앙박물관

16세기에는 더욱 다양한 화풍의 그림들이 그려졌어요. 그 중 사군자 그림을 볼까요? 선비들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로 표현하여 그림을 그렸어요. 이정의 대나무 그림, 어몽룡의 매화 그림이 유명해요. 이후 화풍은 더욱 다양해졌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지고 우리 주변의 일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이러한 경향은 그림에도 반영되었지요.

산수화에서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그린 그림들이 등장했어요. 당시의 대표적인 화가로 정선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실제 모습을 보고 그린 산수화인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 등의 그림을 그렸어요.

<정선 필 금강전도>   
문화재청

조선 후기에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그린 풍속화도 많이 그려졌어요. 대표적인 화가로 김홍도와 신윤복이 있지요. 김홍도는 서민의 생활을 소박하면서도 정감 어린 필치로 익살스럽게 표현하였어요. 반면 신윤복은 주로 도시에 사는 양반의 생활과 부녀자의 모습, 남녀 간의 사랑 등을 감각적으로 그렸어요.

또 이 시기에는 서민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민화도 많이 그려졌어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화가들이 그린 민화는 해, 달, 나무, 꽃, 동물, 물고기 등 다양한 소재를 이용하여 건강과 장수 등의 소망을 담아 생활공간을 장식하는 데 이용되었어요.

  

안견의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복제품)>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조선 세종의 둘째 아들 안평대군이 1447년(세종 29) 4월 20일(음력)에 꿈속에서 거닐었던 도원의 풍경을 안견에게 말해주고 그리게 한 것이에요. ‘몽유’는 ‘꿈에 거닐다’라는 뜻이에요. ‘도원’은 ‘무릉도원’의 줄임말로 ‘복숭아꽃이 활짝 핀 정원’이라는 의미이지만, 일반적으로 ‘이상 세계’를 뜻해요. ‘도’는 ‘그림’이라는 뜻이지요.

조선 초기 최고의 화가로 이름 높았던 안견은 세로 38.7㎝, 가로 106.5㎝나 되는 넓은 비단에 3일에 걸쳐 이 그림을 그렸어요. 안평대군은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적었어요.

이제 안견에게 이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옛날부터 전한다는 도원의 그림과 비슷한지 모르겠다. 훗날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한다면 가타부타 말이 있을 것이다. 꿈이 깬 뒤 3일 만에 그림이 완성되었기에 이 글을 쓴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그렸어요. 옛날 책과 그림은 대체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는데요. ‘몽유도원도’는 꿈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니까 거꾸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봐야 해요.

왼쪽 도입부는 꿈이 시작하는 평탄한 강이 그려져 있구요. 중간 부분은 도원을 가로막은 첩첩산중의 암벽이 묘사되었어요. 그리고 오른쪽에는 분지처럼 보이는 곳에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도원이 펼쳐져 있어요.

한편 안견은 도원으로 가는 여정을 이어 그리면서 각 풍경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 했어요. 왼쪽 도입부는 정면에서 본 것처럼 그렸구요. 중간에는 아래쪽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기암절벽을 묘사했어요. 그리고 오른쪽의 도원은 위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서 그렸어요. 다시 그림을 볼까요? 입체적인 구도가 잘 보이나요?

하지만 몽유도원도는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어서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왜냐하면 이 그림은 일본의 덴리대학교 도서관에 있기 때문이죠.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에 건너 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어요.

그동안 한국에는 1986년, 1996년, 2009년 딱 세 번만 건너와 전시되었어요. 조선 시대 그려진 그림이지만 정작 우리나라 사람은 아무 때나 볼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고사관수도(강희안)>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조선 세종 때부터 세조 때에 이르기까지 문신 관료로 활동한 강희안의 작품이에요. ‘뜻이 높고 깨끗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란 뜻을 갖고 있지요.

조선 초에는 안견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산수를 웅장하게 묘사하고 인물을 보일 듯 말 듯 작게 그렸어요. 반면 강희안은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고사관수도’이지요.

‘고사관수도’는 세로 23.4㎝, 가로 15.7㎝ 크기의 종이에 그려졌는데, 어른 손바닥 크기를 조금 넘는 자그마한 그림이에요. 먹선으로 그은 나무 덩굴에서 아래로 내려온 잎사귀에는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모습이 묘사되었어요.

또 바위 사이에 이리저리 그어진 옅은 붓질을 보면 물이 움직이는 느낌도 들지요. 단순히 검은 먹으로 이처럼 다양한 광경을 묘사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나요?

이 그림을 부분마다 나눠서 보면 거친 느낌이 들지만, 전체로 보면 매우 고요하고 잔잔한 느낌이 들어요. 그것은 아마도 바위에 기대 편안히 엎드려 생각에 잠겨 있는 선비 때문인 것 같아요. 앞머리가 벗어진 넓적한 얼굴의 선비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에요. 사람 좋아 보이는 납작한 코와 인자해 보이는 입가와 수염 그리고 넓은 소맷자락에서 속세를 초월한 듯한 여유로움이 느껴지네요.

정선의 인왕제색도

<정선 필 인왕제색도>   
문화재청

이 그림은 조선 후기 화가 정선의 작품이에요. 세로 79.2㎝, 가로 138.2㎝의 종이에 먹으로 그려졌지요. 제목에서 ‘인왕’은 인왕산을, ‘제색’은 비가 온 뒤 맑게 갠 모습을 뜻해요. 정선은 지금의 서울 궁정동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이 그림을 그렸어요. 소나기가 내린 뒤 인왕산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이에요.

정선은 조선 시대 실제 경치를 그린 산수화를 개척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어요. 그 이유는 정선이 중국의 자연이나 유교 경전에 서술된 경치를 상상하여 그리는 낡은 관습을 과감하게 떨쳐냈기 때문이지요.

그는 서울 근교와 금강산 등을 두루 답사하여 그 모습을 화폭에 담기 위해 노력하였어요. 심지어 금강산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고 하니,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겠지요?

또한 ‘인왕제색도’를 살펴보면 물기를 머금은 바위산의 위용, 화면을 압도하는 인왕산의 대담한 배치, 산 아래 짙게 깔린 구름, 무성한 소나무 숲 등 인왕산의 우람한 기세가 박진감을 주고 있지요.

김홍도의 씨름

<씨름(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   
문화재청

이 그림은 조선 후기 도화서에서 화가로 활약한 김홍도의 작품이에요. 풍속화 모음책인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에 있는 25점 중 하나로, 세로 26.9cm, 가로 22.2cm의 종이에 그려져 있어요. 우리가 흔히 쓰는 공책보다 조금 큰 종이에 조선 후기의 다양한 생활 모습이 담겼어요.

김홍도가 그린 ‘씨름’은 단옷날 씨름 경기가 벌어지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이 그림에는 총 22명의 인물이 있는데, 제각기 다른 행동, 다른 표정, 다른 얼굴로 그려져 있어요. 갓을 쓴 양반들과 일반 평민들이 같이 씨름 경기를 보고 있는 것을 볼 때 엄격했던 신분제가 조선 후기에 서서히 완화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죠. 김홍도는 사람들의 표정과 시선을 모두 다르게 표현했어요. 중간 아래쪽을 보면, 댕기를 땋아내린 소년이 있지요. 뒷모습밖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짝 왼쪽으로 돌린 고개를 보면 씨름에는 관심이 없어보이네요. 그 소년은 아무래도 엿장수가 팔고 있는 엿이 먹고 싶은가봐요.

이제 사람들의 복장을 볼까요? 간편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요. 몇 사람은 부채를 들고 있지요. 아마 더운 날인가 봐요. 씨름 경기가 열린 것을 보면 단옷날이 아닌가 싶어요. 단옷날에는 더위를 잘 이겨내라는 마음으로 서로 부채를 선물하기도 했대요. 갓이나 신발의 종류도 조금씩 달라요. 상투만 틀고 있는 사람도 있구요.

신분이 서로 다르지만 남자들이 한데 모여 씨름 경기를 즐기고 있는 모습은 매우 흥겨워 보이네요. 그런데 과연 씨름 경기하는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이겼을까요?

참, 맨 오른쪽 구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손 모양이 잘못 그려져 있는데, 혹시 알고 있었나요? 김홍도의 재치 있는 장난기를 엿볼 수 있는데, 기회가 되면 다른 그림에서도 찾아보세요.

신윤복의 월하정인

<월하정인(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문화재청

이 그림은 김홍도와 함께 조선 후기 풍속화의 쌍벽을 이루는 신윤복의 작품이에요. 신윤복의 풍속화를 모은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에 있는 25점 중 하나로, 세로 28.2cm, 가로 35.2cm의 종이에 그려져 있어요. ‘월하정인’은 ‘달빛 아래의 연인’라는 뜻이에요.

신윤복은 주로 양반과 부녀자들의 생활과 유흥, 남녀 사이의 애정 등을 소재로 삼았어요. 그래서 신윤복의 그림은 조선 후기의 살림살이, 의복, 머리 모양 등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요. ‘월하정인’은 늦은 밤 담 모퉁이에 남 몰래 만나는 한 쌍의 남녀를 긴장감 있게 표현한 그림이에요.

이 그림의 가운데에는 한자로 ‘달빛 그윽함 삼경(밤 11시에서 새벽 1시),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알겠지.’라고 씌어 있어요. 남녀의 연애가 자유롭지 못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늦은 밤 두 사람의 만남이 애틋하면서도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이 그림은 단옷날 여인들의 일상을 그린 ‘단오풍정’과 함께 신윤복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어요.

민화 까치호랑이

<까치호랑이>   
국립중앙박물관

지금부터는 조선 후기에 그려진 민화 ‘까치호랑이’를 살펴봐요. 세로 134.6cm, 가로 80.6cm의 종이에 그려진 그림으로 누가 그렸는지는 전하지 않고 있어요. 조선 후기에 유행한 민화는 서민의 미적 감각에 맞게,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했어요.

민화에는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은 백성의 작은 소망들이 담겨 있었어요. 까치, 호랑이, 소나무, 학, 잉어, 원앙 등 그 소재가 다양하였지요. 그런데 위에 소개된 까치와 호랑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당시 민간에서 호랑이는 나쁜 기운을 막아 주는 동물로, 까치는 반가운 손님이나 소식을 전하는 새로 여겨졌다고 해요. 그래서 민화의 인기 있는 소재였지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인왕제색도에 담긴 슬픈 이야기

‘인왕제색도’에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요. 이 그림은 정선이 76세 때인 1751년(영조 27)에 그려졌는데,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이병연이 노환으로 몸져 눕자 그를 생각하며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이병연이 사망하기 사흘 전까지 서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 무렵에 그렸다면, 이병연이 숨을 거두기 며칠 전까지 정선은 ‘인왕제색도’를 그리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정선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이병연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요? ‘인왕제색도’의 오른쪽 윗부분에 적힌 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요.

<정선 필 인왕제색도>   
문화재청

이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는 ‘辛未閏月下浣’(신미 윤월 하완)이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음력 1751년 윤5월 하순이라는 의미이지요. 이 무렵의 날씨를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해볼 수 있어요.

윤5월 초하루부터 18일까지 비가 오락가락하다가 19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일주일 간 지루한 장맛비가 계속 내렸대요, 25일 오후가 되자 활짝 개었죠. ‘인왕제색도’는 그날 오후에 그려진 것이 아닐까요? 『영조실록』에는 29일에 정선의 친구 이병연이 세상을 떠난 사실도 기록되어 있어요.

아마도 정선은 투병 중인 친구가 날씨가 개이듯 쾌유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그림을 그렸을 거예요. 그러나 정선의 바람과는 달리 친구 이병연은 ‘인왕제색도’가 그려진 얼마 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답니다.

지금까지 조선 초에 그려진 ‘몽유도원도’부터 조선 후기의 민화에 이르기까지 주요 그림들을 살펴보았어요. 그림을 통해 화가들의 생각은 물론 당시 사회 분위기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또한 단순한 그림 한 장이 아니라 그림으로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는 것도 알 수 있지요? 여러분들도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 가까운 미술관에서 우리 조상들이 남긴 그림들을 살펴봤으면 좋겠어요. 그림에 담긴 우리나라 역사와 예술의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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